409화 비틀린 세계선
탑 숭배자 마하나가 데이본드의 가호를 받기 전 사용한 업보 청산.
변화를 예고하던 메시지가 뚝 끊겼다.
그도 그럴 것이.
-털썩
스킬에 적중당한 마하나가 즉사했으니까.
그대로 쓰러진 놈의 몸에는 수포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
내가 저거 잘 알지. 몸이 뜨거웠다가 차가웠다가 어느 순간 죽는 것이었다.
혼돈의 파편과 내기했을 때 죽었던 수많은 순간들. 그중 하나가 재현된 거겠지.
[업보 청산이 비활성화됩니다.]
스킬이 잠겼다. 어쩔 수 없다. 애초에 그런 페널티를 가지고 있는 스킬이니까.
거기에 이어.
[힘 스텟이 영구적으로 4 감소합니다.]
스텟이 줄었다. 그나마 다행이네. 마기를 가져갔으면 짜증 났을 거 같은데.
약간이지만 힘이 빠지는 기분. 생각보다 스텟을 많이 가져가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뭐, 확정적으로 한 명 잡는 대가치고는 싼 편이지.
영약도 있고, 층을 클리어하면 스텟이 오르니까 힘 스텟 4 정도는 금방 복구할 거다.
스킬 정보를 떠올렸다.
[업보 청산]
-당신의 죽음의 순간을 상대방에게 재현할 수 있습니다.
-죽은 횟수만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충격을 일부 공유합니다.
-사람이 태어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은 9개월.
-9개월에 한 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텟 일부가 영구적으로 차감됩니다.
“확실히 효과가 좋기는 한데 쿨타임이 너무 길단 말이지.”
자그마치 9개월.
머리를 긁적였다. 나름 밸런스가 맞는 거 같으면서도 아쉬운 기분.
마하나한테 스킬을 쓰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이후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급하게 쓴 건 아닐까?
아니다, 확실한 순간에 쓰는 게 맞았다. 빙의된 데이본드와 이미 싸워 보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빙의가 아니라 가호였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몰랐다.
아끼다 똥 되는 말이 있듯이 필요하다 생각하면 쓰는 게 맞았다. 나중에는 다른 해결 방법이 생기겠지.
우두머리가 갑자기 쓰러져서일까…….
“마하나 님?”
“뭐 하시는 겁니까? 저놈을 처단하셔야지요!”
“전투 중에 장난이라니 평소답지 않습니다.”
당연히 평소랑 다르겠지. 평소에는 숨을 쉬었을 테니까.
나머지 놈들도 알고 있을 거다. 놈이 죽은걸. 이곳에 있으면서 전투를 얼마나 했을 것이고, 죽은 사람을 몇 명이나 봤을 것인가.
그저 믿기 힘들어 인정하지 않는 것에 불과했고.
“일단 이놈들도 조져야겠지?”
“이, 이익!”
“괴물 같은 새끼가!”
“도, 도망가! 일단 피해!”
내가 몸을 틀고 나서야 현실을 직시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을까? 괜히 도망가게 놔두었다가 문제가 생기느니 미리 처치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다만.
“루나르, 후렌. 몇 놈만 잡아 와. 다 잡을 필요 없고 끝까지 추적할 필요도 없어.”
“알겠습니다요. 갔다 오겠습니다!”
“얘들아, 가자!”
굳이 몰살시키지는 않기로 했다.
놈들을 배려하는 건 아니고…….
‘생각보다 대미지가 누적됐네.’
대공의 아들, 포라드에게 맞으면서 내부에 충격이 좀 쌓였다.
무식하게 공격을 몸으로 받으며 스킬 레벨을 올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게다가 지금에서야 느끼는 건데 놈이 사용한 악의 갑주는 시간이 지나도 내부에서 영향력을 끼쳤다.
지속 대미지라고 해야 하나. 마기의 잔해가 남아 속을 계속 헤집는다.
놈이 그 정도였으니 대공이라 불리는 놈은 더 심하겠지. 신성 위에 있다는 놈들은 어느 정도려나.
“좀 쉬자.”
“안 그래도 누울까 합니다!”
“거, 너무 부려 먹으십니다. 우리도 인권이 있다고요.”
“아고고, 죽겠다.”
쉬자는 말에 악마들이 널브러진다.
무지개단 녀석들도 연속된 전투에 지쳤다. 정상 컨디션이라면 모를까 쫓아갔다가 다른 숭배자 무리가 있다면 전멸할 가능성도 있다.
연옥계에 숭배자가 저놈들만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었으니까.
숭배자에 악마뿐만이 아니라 천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규모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 여러모로 숭배자들을 쫓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그리고…….
“…이블아이.”
“몸 좀 괜찮냐?”
“너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티 났어?”
“내가 장님인 줄 알아?”
다른 놈들보다는 백터에게 신경을 써야 할 거 같아서 말이지.
여전히 경계심은 남아 있었으나 조금은 가까워진 느낌이다. 뭐가 됐든 도움을 준 건 맞으니까.
물론 완전히 날 신뢰하거나 한 건 아니다. 천사를 등 뒤에 숨기고 있으니까.
“너무 그렇게 보지 마. 그쪽 천사를 건들 생각은 없거든. 애초에 무지개단 규율 중 하나가 천사를 죽이지 않는 거야.”
“왜지?”
보다 나은 결과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려고?
그래야 혼돈 수치도 얻고 보상도 달달해서.
속마음 그대로를 말할 수는 없다.
대신…….
“나도 천족 진영에 친구들이 있어.”
거짓말은 아니다. 핥짝이와 냥펀은 천족 진영에 속해 있으니까.
각 진영을 먹은 뒤 평화 협정을 맺는 것. 그게 우리의 계획이다.
“친구들이라… 흐음.”
“못 믿겠으면 말고.”
“아뇨, 믿어요.”
의외로 대답은 천사에게서 나왔다. 백터도 놀랐는지 뒤를 돌아본다.
“헤나라고 해요.”
“난 이블아이라고 하지.”
“당신에게서 신성력이 느껴져요.”
“헤나, 천마대전에 참가한 악마 중에는 신성력을 빼앗은 악마들도 있어.”
백터가 첨언했지만 헤나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블아이한테서 느껴지는 신성력은 결이 달라요. 보다 선명하고 밝은, 강제로 얻은 게 아닌 생겨난 느낌이에요.”
감 좋네. 칭호 효과기는 하지만 일단은 성자다. 신성하기로 따지면 엄청 신성하지.
확신 가득한 어조 때문인가 백터도 별말 없이 넘어갔다. 녀석이 날 바라본다.
“이블아이, 우리에 대해 알릴 거냐.”
“음, 너희? 무슨 관곈데.”
“그, 그건.”
슬쩍 헤나의 눈치를 보는 백터.
좋을 때구만. 누구는 탑에 갇혀서 밖에 나갈 수 있나 없나 걱정하고 있는데.
“별 관심 없어. 따지고 보면 킬더레스도 플레타랑도 그렇고 그런 관계였잖아.”
“대, 대, 군주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건 좀…….”
“괜찮아. 인연이 좀 있어서.”
인연이 있기는 하다. 지금 시점에 있는 인연은 아니지만.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 때문일까.
“킬더레스 님이랑 아는 사이셨습니까?”
“오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이블아이 님!”
“충성! 충성을 다 합니다!”
악마들의 눈에 존경심이 깃들었다.
헤나는 좀 불편한 기색이었지만. 어찌 됐든 킬더레스는 천계 입장에서는 침략자였으니까. 플레타는 천계의 배신자고.
아무튼 그거야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 그렇다 치자.
중요한 건.
“백터, 헤나. 난 연옥계를 먹을 거다. 악마들의 위에 설 거지. 넌 어때?”
“나 역시 그럴 생각이다.”
“그걸로 끝?”
끝이 아닐 텐데? 연옥을 집어삼킨 후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다.
잠시 입을 다문 녀석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난 연옥을 악마와 천사들이 어울려 살 수 있는 동네로 만들 생각이야. 그러고 싶고, 그럴 능력이 있으니까.”
“…너.”
“뜻 같으면 같이하지? 방향성은 비슷해 보이는데.”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함께하자는 제스처였고.
“하, 어떤 놈인지 지켜보마.”
“마음대로.”
헛웃음을 지은 녀석 또한 손을 맞잡았다.
경계와 의심. 가능성과 희망이 교차하는 순간.
[77층 클리어]
세상이 암전됐다.
* * *
손의 감각이 사라지며 세상이 멀어진다.
어두운 공간. 이제는 익숙한 대기실의 소파에 걸터앉아 화면을 바라봤다.
대충 이렇게 될 거라 예상은 했다.
“역시 백터가 기준점이었네.”
“그에에.”
챕터 이름과 백터의 행동에서 대충 예상은 했다.
[챕터Ⅰ- 잔당 클리어]
[세계선이 비틀립니다.]
[혼돈 수치 +10점]
“오?”
혼돈 점수를 꽤 많이 받았다. 그만큼 이번에 한 행동이 영향을 많이 줬다는 건가.
그뿐일까. 세계선이 비틀렸다고 한다. 지금까지 첫 번째 챕터에서 저런 말이 나온 적은 없던 거 같은데.
마냥 좋아할 건 아니다.
“미래가 비틀린 건 맞지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확실치 않아.”
제2 천계 때는 보다 나은 미래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좋다 나쁘다는 말이 없고.
그저 원래의 흐름과는 다른 형식으로 진행될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맞았다.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른다. 아직 정보가 남았다.
집중해서 알림을 바라봤고.
[악마, 백터가 탑 숭배자에 포섭되지 않았습니다.]
[연옥계 숭배 집단의 주축 중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원래대로 흘러갔다면 백터가 숭배자에 포섭되고 그곳에서 활약했을 거라는 거겠지.
이것만 보면 좋은 소식 같은데?
숭배자 세력이 얼마나 클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위협을 사전에 없앤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왜 좋은 미래로 나아간다고 안 하는…….
“어?”
생각을 잇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떠오르는 메시지. 어두운 공간 빠르게 흘러가는 화면.
[영웅의 탄생!]
[천계 진영이 세력을 키웁니다.]
영웅의 탄생? 다르게 생각하면 기존의 흐름이었다면 영웅이 없었다는 뜻이었다.
화면을 노려봤다.
천계 진영으로 보이는 무리가 악마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악마 무리 역시 규모가 작지 않다.
인원수로만 따지면 악마 쪽이 배는 많다.
“못해도 60명. 저 정도면 신성급은 되어야 만들 수 있는 규모야.”
내가 상대한 포라드가 그 정도 됐으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겪어본바 천족 잔당들의 수준은 대단치 않았다. 물론 내게 덤빈 놈들 말고 뛰어난 이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저건…….
“너무 일방적이잖아.”
“그에에.”
머릿수를 극복하는 게 아닌 무시해 버릴 정도의 저력.
그 중심에 있는 건 갑옷을 입은 여인이었고, 그녀가 메이스를 들고 돌진하자 천사들 역시 함성과 함께 돌격했다.
메시지가 영웅이라 말한 사람이 누군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메이스를 휘두를 때마다 머리가 터지는 악마들.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붉은 무언가.
적에게 둘러싸였을 때 폭발하듯 쏟아져나오는 불길과 바위마저 녹여 버리는 용암.
“마그마 요정?”
이번 시나리오로 넘어오기 전에 만났던 녀석이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래, 이상하다 생각했다. 영웅이 탄생했다길래 멤버들을 말하는 건가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었다.
어디까지나 우리의 계획은 양 진영의 대표가 된 다음 화합하는 거였으니까.
저런 식으로 다른 진영을 때려 부술 생각이 없었다.
내 입장에서는 트롤이었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저게 맞았다. 단순히 생각해서 양쪽 진영 중 한 곳을 밀어버리면 되는 거였으니까.
적이 없으면 싸울 이유도 없지. 단순하지만 확실한 방법.
대기실에서 얼핏 대단한 녀석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과연 폼으로만 상위층까지 올라온 건 아니라는 건가.
“그래. 얘 때문에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이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얘한테도 작전을 설명하는 거였는데.
후회해 봤자 늦었다. 일은 벌어졌고, 상황이 바뀌었다면 그에 맞춰 행동하면 된다.
끝까지 화면을 지켜봤다. 전투 장면이 끝나고 악마들과 천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하나같이 한자리할 거 같은 놈들이 가득.
-촤르르르르
그걸로 모든 장면이 끝났고 적막이 내려앉았다.
[78층으로 진입합니다.]
[챕터Ⅱ- 악마들의 악마]
[세계선이 비틀렸습니다!]
[챕터Ⅱ가 바뀝니다!]
-우우우우우웅!
전송 마법진이 활성화된다.
몸을 감싸는 새하얀 빛.
다음 층으로 전송되기 전, 난 보았다.
바뀌어 버린 두 번째 챕터.
그 제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