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예언 속에 나오는 사람입니다
거인들의 파이팅은 어떨까. 기본적으로 피지컬이 장난 아닌 만큼 박력이 넘치는 건 알고 있다. 그레고리가 싸우는 모습도 잠깐이지만 봤었고.
그런 이들이 우르르 몰려서 싸우는 모습?
-콰아아아앙!
“으랴아아아!”
트럭이 돌진하듯 내뻗는 주먹에 맞은 검은 쥐 조직원이 날아가 바닥을 구른다.
10미터가 넘는 구체가 굉음을 내며 날아가는 모습에 현실감이 없을 지경.
걷어차기 한 번에 사람 몸에서 나올 수 없는 소리가 나고, 팔을 휘두를 때마다 풍압이 느껴진다.
가뜩이나 체온이 높은 녀석들이 작정하고 움직이자 이건 뭐 괴물이 따로 없을 정도.
“흩어지지 마! 한꺼번에 몰아붙여!”
“어쭙잖게 할 거면 그냥 꺼져! 걸리적거리니까!”
바위쯤은 가뿐하게 부술 파워.
안면을 강타당했음에도 버티는 목 근육.
거인들 기준에서는 날렵한 체형을 지닌 그레고리조차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는 뜯어 버리는 피지컬을 가지고 있다.
저 덩치에서 나오는 속도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파고든 녀석이 발길질을 한다.
-빠아아아악!
귀가 아플 정도의 타격음이 울리고, 무릎이 꺾인 녀석에게 박치기.
“크흡!”
뒤로 주춤 물러나는 사이, 그레고리가 주먹을 날리려 했으나.
“어딜!”
머릿수로 따지면 검은 쥐 쪽이 훨씬 많았다.
곧장 양옆으로 파고든 이들이 압박해 온다. 옆구리를 노리고, 허벅지를 찍어누르고, 숨 쉬듯 자연스러운 연계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으나.
[오로라 빔(S) Lv.10+]
-찌유우우우웅!
오로라 빔을 쏘아 달라붙는 녀석을 튕겨 냈다.
와, 징그러워라. 아무리 거인족이 마법에 내성이 강하고 몸이 튼튼하다고는 하지만 튕겨 나가고 끝이라고?
다른 건 몰라도 오로라 빔이 관통력 하나는 장난 아닌데.
“하긴, 저러니까 무기 갖다 버리고 맨주먹으로 싸워 대지.”
“그에에.”
애초에 금속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한 세계. 불순물이 많아 기껏 만들어도 거인들의 괴력을 못 버티고 금세 부서진다.
사실상 이들에게 있어 최고의 무기는 몸 그 자체.
“이이익! 어린놈이!”
“어리긴 자식아, 다 컸구만.”
이놈들도 나름의 정도가 있는지 내게는 덤벼들지 않았다.
거인들 입장에서 굳이 애까지 건들 필요는 없다 이거겠지.
이게 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애매하다.
어쩔까. 앞으로 활동하려면 대놓고 움직일 때도 있을 텐데.
비록 언더 시티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숭배자 놈들의 눈을 피해 애인 척했지만 여기서는 잠깐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지 않을까?
일단 이놈들 모두 숭배자는 아닌 거 같고. 듀렉의 설명을 들었을 때 언더 시티에는 멸망 옹호론자들이 별로 없는 거 같았다.
적어도 대놓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왜냐…….
‘이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멸망이니 뭐니 하는 거 때문에 몰려온 이주민들이거든.’
검은 비를 피해 모이고 뭉쳐 만들어진 곳이 언더 시티.
멸망에 대해 떠드는 것에 반감이 들 수밖에 없다. 다들 고향을 버리고 온 사람들이니까.
다르게 말하면 멸망이 다가오고 있는 세계를 직접적으로 겪었음에도 그에 저항하고 싶은 이들이라 이거지.
내가 이곳을 먼저 접수하고 싶은 것도 이 때문.
결국에 직접 움직이려면 어느 정도 정체는 밝혀야 한다. 모두에게는 아니어도 수족으로 부려야 하는 놈들에게는 말이지.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다. 약간의 블러핑을 섞을 생각.
-딸깍
가면을 벗었다.
순간적으로 내게 모이는 시선.
“…소인?”
“설마 전설 속에서 등장하는 그거?”
“요정의 일종이라는 말은 들었는데 대체 왜 여기에.”
역시 주술과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곳답다.
사람이냐는 말보다 소인이니 요정이니 말하는 게 더 빠른 걸 보니.
확실히 애의 모습은 아니니까 본인들이 이해하기 쉬운 방향으로 생각하는 게 맞긴 하다.
내가 노린 것도 이쪽이고.
“난 이블아이, 멸망의 예언에 등장한 종말을 거부하는 자이다!”
마력을 담아 큰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기세를 난폭하게 풀자 지금까지와 다른 분위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레고리를 비롯한 산맥의 거인들도 뭐 하는 건가 하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표정을 바꾼다.
“그렇다. 우리는 종말을 거부하는 자와 함께하는 산맥의 거인들이다.”
“두 번째 태양을 없앤 게 우리다!”
“검은 비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지. 하늘의 눈물 호수에서 솟아난 괴물의 짓이다.”
“우리는 그것을 쫓아 이곳에 온 것이지.”
처음부터 짜기라도 한 듯 술술 입을 여는 녀석들.
이 정도 실력이면 배우를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싸우다 말고 예상치 못한 말들이 튀어나오자 검은 쥐 조직원들이 멈칫한다.
“예언에서 나온 소인이라.”
“…어, 그런 게 있던가?”
“나야 모르지.”
“근데 그거랑 우리랑 무슨 상관?”
머리를 긁적이는 놈을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빠악!
“이런 멍청한 녀석! 무슨 상관이라니! 거인계를 구하기 위해 하늘의 천명을 받고 이곳에 발을 내디뎠거늘!”
“이런 씨……!”
느닷없이 돌멩이를 맞은 거인이 울컥했지만 옆에서 싸움을 관망하던 보스, 디레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입을 다물었다.
“예언을 외치는 놈들이 또 있었군.”
“밖에서 설치는 애들이랑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유목민들은 미신을 많이 믿지. 죽은 산양을 보면 돌아가라, 갈라진 대지에 들어서면 소변을 봐라, 그런 것들.”
손을 푼 녀석이 앞으로 한발 다가온다.
“약탈자인 우리는 그딴 건 믿지 않아. 오로지 현실을 살아갈 뿐이다.”
“그 부분은 나랑 통하네.”
“달리 말하면 네놈들이 누구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지. 우리 구역에 들어왔으면 이쪽의 규칙을 따르는 게 도리고, 거부한다면 찍어 누르면 그만이다.”
그가 수신호를 보내자 검은 쥐들이 자리를 만든다.
산맥 출신의 거인들을 압박하며 나와 디레트 둘만 남게 만든 것.
“확실히 소인을 직접 보니 흥미가 생기기는 해. 수많은 괴물과 신비를 봐 왔지만 소인은 처음이거든. 예언이니 뭐니 하는 건 기분 나쁜 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멸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것만 봐도 그렇지.”
기본적으로 검은 쥐 일당들은 유목민들을 습격해 약탈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들.
검은 비로 대지가 오염되고 가축을 기를 수 없자 유목민들이 고향을 떠났고, 자연스레 약탈할 대상이 없어진 이들도 이곳까지 스며들게 되었다.
“궁금해. 멸망을 거부하는 자라, 갑작스럽게 나타난 소인과 밖에서 탑의 뜻을 따르라고 소리치는 머저리들까지. 세상이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다.”
녀석이 몸을 굽혀 나를 내려다봤다.
“두 번째 태양을 없앴다고 했나?”
“그래.”
“어쩌면 예언이 사실일지도 몰라. 난 두 눈으로 본 것만 믿거든. 태양이 그러하다.”
-스으으으으으!
놈에게서 강렬한 기세가 흘러나온다.
살의와 호기심. 알 수 없는 흥분이 가득한 열기.
“여전히 믿음은 안 가지만 그건 확인해 보면 될 일이지. 네놈이 진짜 예언 속의 존재라면 이런 곳에서 쓰러질 일은 없을 거다, 맞나?”
“대충 하고 싶은 말이 뭔지는 알겠군. 길게 말할 거 없어. 상대해 달라 이거잖아.”
“큭! 말이 통해서 좋아.”
짜악.
몸을 일으켜 세운 녀석이 손뼉을 친다.
“다들 힘을 다해도 좋다. 방해꾼들 못 오게 막아.”
“알겠습니다!”
“맡겨 주십쇼!”
힘을 다한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걸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검은 쥐 부족이 약탈자의 주술을 발휘합니다!]
-쿠구구구구궁!
놈들의 기세가 바뀐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문신이 전신으로 퍼지더니 정체 모를 기운이 형태화되어 발과 다리를 감싼다.
흡사 짐승의 그것을 닮은 느낌.
위험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는 단순한 몸싸움에 불과했다는 건가.
산맥 거인들 또한 위기감을 느꼈는지 힘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다들 괜찮아. 괜히 끼어들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손을 들어 막았다.
물론 곧장 내 말을 듣지는 않았다.
“여기서 네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 우린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 나가야지.”
“그동안 만나 온 놈들과 넌 다르다. 우린 가능성을 걸고 있어.”
“위험하다 판단되면 전력을 다해 막을 거다.”
녀석들은 진짜 NPC고, 등반가인 내가 없으면 챕터를 진행할 수 없으니까.
첫 번째 챕터에서도 그래서 날 보호하려 하지 않았던가.
이해는 한다. 그런데…….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나 말고도 조만간 다른 녀석들이 올라올 거야. 그리고…….”
-차앙
-파아아아앗!
혼돈검을 뽑고 펠라인 세트를 착용했다.
“질 일도 없어.”
모든 파츠를 모아 일곱 빛깔로 번뜩이는 갑옷.
각 파츠마다 특유의 기운이 담겨 있다. 모든 속성이 섞인 장비에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조화롭고 신비롭다.
“…오.”
“과연 요정의 일족이라는 것인가.”
“지금껏 본 적 없는 모습이다.”
“저렇게 선명한 색이 드러나는 갑옷은 처음 보는군, 확실히 거인계와는 다르다.”
작게 감탄하는 녀석들.
그래도 이상하다고 뭐라 하지는 않네. 요정이라고 오해하는 건 좀 그렇지만.
뭐, 거인계 출신이 아닌 건 맞는 말이지만.
화학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만큼 물감과 같은 색료도 별로 없으니 거인 대부분 칙칙한 옷차림이었다. 신기할 만하지.
디레트 역시 눈을 빛내며 자세를 가다듬는다.
“신비의 종족과 싸우는 건 처음이지. 얕보지 않으마.”
“나도 그럴 생각이야.”
산맥 거인들도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는지 난입할 기색을 지운다.
차라리 잘됐다. 우두머리를 꺾으면 세력을 흡수하는 건 물론이고, 예언에 등장한 인물이라는 타이틀도 가질 수 있다.
물론 거짓말이지만 뭐 어떤가. 여기서 예언이 적힌 벽화를 본 사람이 얼마나 있다고.
숭배자들 예언을 가지고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으니 나도 그래야지.
‘나중에 거인의 무덤에 들어가서 벽화도 위조해야겠군.’
마침 거인의 무덤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도 있겠다, 혼돈의 파편이 될 예정이라는 옛 영웅, 델버튼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다. 한 번은 가야 한다.
그건 그거고.
“나도 궁금하더라.”
-콰아아아앙!
놈을 향해 돌진했다.
지금의 나는 80층대에 머무는 NPC들과 싸울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숭배자와 같은 놈들을 없앨 능력이 되는지.
디레트는 탑에 완전히 종속된 NPC. 본인이 NPC인 것마저 인지하지 못하는 과거의 인물.
하지만…….
“들어와라!”
거짓 없이 80층대에 머물 정도의 실력을 지녔던 존재다.
나보다 먼저 탑을 올랐던 등반가.
챕터 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거인.
[검은 쥐의 수장, 디레트가 약탈자의 주술을 사용합니다!]
한순간 온몸에 검은 기운을 두른 녀석이 주먹을 뻗는다.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손놀림. 손톱처럼 자라난 기운이 정면으로 파고들었지만.
[안개 질주(S) Lv.10+]
곧장 안개화를 사용해 안으로 파고들었다.
시간 끌 생각은 없다. 스스로 콘셉트를 잡지 않았던가. 종말에 저항하는 인물이라고.
강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게. 진짜 종말에서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망자귀환(S) Lv.10+]
[버프 다이스(S) Lv.10+]
[5]
[연쇄 충격]
버프에 버프를 둘렀다.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검강]
[절삭(S) Lv.10+]
권능과 스킬을 검에 담았으며.
[아스트랄 레인보우(S)]
[홍예참(SS)]
펠라인 세트 스킬을 터트렸다.
-우우우우우우우웅!
이미 몸과 검은 하나의 빛이 되었고 놈을 향해 검을 내뻗는 그 순간.
모든 파츠를 모아 새롭게 생겨난 펠라인 스킬, 그 두 번째 스킬을 사용했다.
[엘리멘탈 레인보우(SS)]
-모든 속성이 증폭됩니다.
-해당 속성이 담긴 모든 활동에 보정치가 붙습니다.
그리고 홍예참은…….
‘모든 속성을 담고 있다.’
놈을 향해 검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