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화 재밌는 거 보여 줄까?
자이언트 폴리스, 이주민이 모여 생성된 언더 시티는 5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암시장을 기반으로 성장 중이었으며, 그중 1번 구역과 3번 구역은 숭배자들을 주요 고객으로 삼았고, 가운데 위치한 2번 구역은 두 구역의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개방하시죠? 그쪽도 알 텐데요. 이곳에 터를 잡은 이상 그들과 거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이언트 폴리스의 여론이 좋지 않아. 그곳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는 숭배자들의 도움이 없다면 마찰은 예정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2번 구역을 관리하는 조직, 파란 손. 그들의 본거지에 외부에서 온 두 거인이 앉아 있었다.
깔끔한 옷을 입은 채 양 손가락에 반지를 착용하고 있는 남자, 달루. 그는 1번 구역을 지배하고 있는 자였고, 그 옆에 앉은 여인은 3번 구역을 차지한 헤르마였다.
그들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거인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근래에 들어 숭배자와 거래하라는 압박이 강해지고 있다.
처음에는 구역 간의 작은 마찰이 벌어졌으며 손님을 빼돌리는 일도 있었고, 루머가 분명한 소문이 돌며 구역간의 감정이 격해졌다.
특히나 언더 시티에 필요한 물자를 조금씩 차단하기 시작했다.
“우리와 손을 맞잡으면 식량을 더 풀도록 하지요.”
달루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구역마다 주거래가 달랐다. 달루의 1번 구역은 자이언트 폴리스에서 몰래 들여오는 식량을 주로 다뤘으며.
“아픈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어.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아?”
헤르마가 관리하는 3번 구역은 의약품을 주로 다루었다.
각 부족의 성향과 특기를 바탕으로 나뉜 역할.
식량과 의약품은 삶에 있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으며, 두 구역이 작정하고 물자를 줄이자 곤란해지는 건 2번 구역이었다.
“어차피 그쪽도 해결사 노릇을 하잖아요. 고객을 가려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받아들이기만 하면 숭배자들은 너희의 최고 고객이 될 수 있어. 알잖아, 그들에게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걸.”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2번 구역의 우두머리, 파머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양쪽에서 들어오는 압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
그가 이끄는 파란 손 조직은 힘이 강했다. 강인한 전사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고, 온갖 더러운 일과 해결사 노릇을 수행하며 살아왔다.
자이언트 폴리스의 주민 중에서도 파란 손 조직을 고용할 정도. 만약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다면 진작에 흡수되어 언더 시티는 4개의 구역만 남았을 거다.
각자의 역할을 나누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곳. 그게 언더 시티였으니까.
그럼에도 버티는 건 쉽지 않았다. 거인은 덩치가 컸고 전사는 다른 거인들보다 많은 에너지를 사용했으니 충분한 음식을 섭취해야 했다.
거친 일을 주로 하니 다치는 것도 일수. 의약품 또한 절실하다.
그나마 숭배자들이 스며들 것을 경계한 4, 5번 구역에서 물밑으로 지원해 주지 않았다면 굴복했을지도 몰랐다.
‘그 지원도 지금은 줄어들고 있지만 말이지.’
파머가 얼굴을 구겼다.
4번 구역(이블아이가 속한 구역)은 장물을 취급하는 곳. 온갖 더러운 돈이 들어오는 곳인 동시에 가장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문제는 숭배자의 입김이 작용한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거래량이 줄었다는 것.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원해 주던 것이 줄어들고 있었다. 5번 구역이야 애초에 그리 많은 지원을 해 준 곳이 아니었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는 것은 그였다.
‘이 녀석들에게 흡수되든, 4번 구역의 지원에 의존하다 길들여지든 결과는 똑같다.’
결국에는 다른 구역에 흡수된다는 것.
작은 탁자에 놓인 컵을 만지던 파머가 달루를 바라봤다.
“반지가 바뀌었군, 옷도 그렇고.”
“아, 이거요? 별거 아닙니다. 숭배자들이 거래 고맙다고 선물로 주던데요. 괜찮지 않아요?”
“처음 봤을 때의 옷차림은 상상도 하기 힘들어. 거부감은 없나?”
“에이, 그때가 언젠데요.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바뀌는 거죠. 구닥다리도 아니고.”
그가 피식 웃었지만 파머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파머는 기억했다, 처음 언더 시티가 만들어졌을 때의 모습을.
지금이야 깔끔한 옷에 반지와 같은 장신구를 잔뜩 끼고 있는 달루였지만 전에는 달랐다.
부족을 상징하는 깃털 장식이 달린 옷차림이었지. 지금은 몸 어디에도 깃털은 보이지 않았다.
“너도 마찬가지다, 헤르마.”
“피부 관리는 기본이야. 사막에 있을 때랑은 다르지. 좀 더 피부가 하얘진 것도 같네. 너도 늦기 전에 관리해, 수염도 좀 깎고. 나이 많은 게 자랑은 아니잖아?”
헤르마는 사막 지역에 살아가던 부족 출신. 거친 환경에 맞게 날카로운 이미지였지만 지금은 칼보다는 도자기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녀의 지적에 파머가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너희는 뿌리를 잃고 있다. 근본을 잊은 자는 모든 것을 잃게 돼. 너희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기억해라.”
“주술은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어. 오히려 컨디션이 좋아서 더 강해졌지.”
“맞아요. 자꾸 고향 이야기 하는데 이제 없잖아요. 현실을 좀 받아들이세요. 그놈의 설산도 이제 없지 않습니까.”
-콰앙!
달루의 말에 파머가 발을 찍어 눌렀다.
종아리까지 다리가 파묻히며 건물을 울린다.
“그게 모두 저 더러운 비 때문이다! 왜 너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도 그것을 옹호하는 자들을 따르는 것이냐!”
그의 호통에 달루와 헤르마가 입을 다물었다. 기세에 압도당한 것은 아니었다.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살기를 올릴 뿐.
드르륵.
달루와 헤르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 모두 한 구역을 담당하는 만큼 자존심이 강한 인물. 동시에 조직원들을 책임지고 있는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파머가 흥분한 이상 더 이상의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 다음 기회를 노려 보기로 생각했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었고 굳이 급하게 나설 필요가 없었다.
“오늘은 이만 가죠.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를 빕니다.”
“흥분 좀 가라앉혀. 다 같은 처지잖아. 우리도 예전처럼 살고 싶지만 세상이 바뀐 건 사실이야. 어쩌면 예언이라는 것도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닐지도 모르지. 잘 생각해.”
마지막으로 할 말을 건넨 두 거인이 자리를 나섰다.
문이 열리자 둘을 보호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던 조직원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2번 구역의 파란 손 조직원들의 눈빛이 곱지는 않았지만 함부로 움직이는 이들은 없었다.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파머가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 나는군.”
“맞아, 동의해.”
그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 *
안내를 받아 2번 구역으로 들어온 나는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레고리도 함께 움직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외부인이다 보니 따라붙는 시선이 있어서.
안내를 자처한 녀석과 그레고리는 2번 구역을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살피기로 했다.
나는 은신을 사용해 2번 구역을 담당하는 우두머리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원래 계획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것이었는데, 선객이 있어 방구석에 숨어 대기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1번과 3번 구역에서 온 거인들. 그것도 각 구역을 관리하는 조직의 보스들이었다.
정보도 얻을 겸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 둘이 떠난 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네놈은 누구냐.”
“너랑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
“소인?”
“뭐, 그렇지? 넌 그래도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군.”
“어린이가 나와 저들의 눈을 속이고 숨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숭배자들이 보내서 왔나. 그놈들은 수상한 힘을 쓴다고 들었다.”
-스으으으
녀석이 주먹을 쥐자 손에 냉기가 흐른다.
주술인가. 설산 출신이라더니 저런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다. 조직 이름도 파란 손이더라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들었다.
“나 숭배자 싫어하는 사람이야. 너랑 싸울 생각도 없고. 오히려 숭배자 놈들을 없애고 싶어 하지.”
“그따위 말은 믿지 않아. 지금 당장 형제들을 부르면 네놈은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해. 이곳으로 찾아온 의도를 밝혀라.”
제법 머리 회전이 빠르다. 경계는 경계대로 하고 자신이 유리한 부분을 어필할 줄도 알고.
오히려 잘됐다. 멍청한 놈보다는 이쪽이 대화가 통하니까.
“4번 구역에서 왔다.”
디레트가 내게 준 서류를 녀석에게 건넸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던 녀석이 주술을 거두더니 턱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두 번째 태양을 없앤 자라. 솔직히 믿음은 안 가지만 이야기는 들어 주지. 디레트는 악랄하지만 현실적인 녀석,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일 리가 없다.”
“그거 고맙네.”
거인들 사이즈로 만들어진 의자여서 거의 올라탄 느낌이지만 얼굴만 마주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세계가 멸망에 접어들고 있다는 건 알지? 검은 비가 내리고 그런 거 말이야.”
대답이 없다. 떠들고 싶은 주제는 아니라는 거겠지.
“멸망을 예고하는 예언. 거기에 등장하는 현상들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지. 그리고 난 예언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지.”
거짓말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거짓말을 사실로 바꾸면 되지. 챕터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움직일 생각이고.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냐.”
“별거 없어. 앞으로 하는 일에 동참해 주기를 바라는 거 뿐이야.”
“앞으로 할 일?”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먼저 숭배자 놈들을 처리할 거야. 선동질하면서 거인들이 갈라지게 만들고 있어. 그다음은 검은 비를 멈출 생각이지.”
“잠깐.”
꿈틀. 놈의 눈썹이 모인다.
“검은 비를? 단순한 헛소리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끝이 좋지는 않을 거다. 검은 비를 증오하는 이들이 이곳에는 아주 많으니까.”
“왜? 고향을 떠나게 만든 원흉이라서?”
답하지는 않았지만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살기가 정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도 그걸 알고 있어서 살짝 긁어 본 거고. 겪어본바 거인들은 고향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기는 편이란 말이지. 저 녀석, 파머는 그 정도가 더 심한 거 같고.
보물 주머니에서 병을 꺼냈다.
“그건.”
“맞아. 검은 비야.”
망설임 없이 테이블에 병에 담긴 검은 비를 부었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액체. 점성도 있고 흐르는 성질도 있고 여러모로 이상한 물질이었다.
“내가 재밌는 거 보여 줄까?”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2번 구역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바로 움직인 게 아니다. 파머와 파란 손 조직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전략을 짰지.
무작정 가서 우리와 함께하라고 외쳐 봤자 긍정적인 답변을 받기는 힘드니까.
3일이라는 기간 동안 준비했다. 그 결과가 이거.
-두웅
손끝을 검은 액체에 넣었다.
멸망과 함께 찾아온 현상. 이해하지 못할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힘에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물질.
불에도 타지 않았고 물속에서도 흩어지지 않는다.
다양한 실험을 했고 그중에는 몇 가지 반응을 보인 것이 있었으니.
-사아아아
첫 번째는 신성력.
손가락을 타고 흘러든 신성력에 반응한 검은 비가 부글거리더니 처음보다 확연히 옅게 변했다.
부정한 것을 정화하는 힘을 가진 만큼 당연한 현상이기는 했다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것만으로도 놀란 것 같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음은 마기다.
불규칙적이고 난폭한 기운. 그렇기에 더욱 자유롭고 강렬한 힘.
-치이이이익
그에 반응한 검은 비가 제멋대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 의지에 따라 모양이 바뀐다. 세모. 네모. 동그라미.
여기서 힌트를 얻었다.
신성력이 검은 비를 약화시키는 효능을 지녔다면 마기는 동조하여 영향력을 끼쳤다.
그리고 마기는…….
‘혼돈에 가장 가까운 힘이야.’
유독 마계에 멸망이 빨리 찾아오는 이유. 악마들이 워낙 날뛰는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악마들이 그런 경향을 가지게 된 것도 마기의 영향이 있기 때문이니까.
-구구구구구궁
손끝을 따라 혼돈의 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혼돈 수치가 100점을 넘긴 상황.
그동안 느끼지 않았던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과 능력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혼돈이 잠재되어 있었다.
재앙들을 보며 겪었던 것이고, 혼돈 수치가 높아지면서 재앙의 효과에 저항력을 가지게 됐다.
다르게 말하면 스테이터스로는 표시되지 않는 또 다른 힘.
규칙을 거부하고 파괴를 일삼는,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힘.
그리고…….
‘혼돈의 파편을 이루고 있는 근원.’
-사아아아
검은 비가 일순간 투명해지더니 손가락으로 스며들었다.
“이게 무슨!”
바닥을 더럽혔던 검은 비가 감쪽같이 사라진 모습에 파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은 비. 그건 혼돈의 힘이 깃든 현상이었고, 누구보다 강력한 혼돈을 가지고 있는 난 검은 비를 흡수할 수 있었다.
살짝 찝찝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별다른 부작용이 없다.
손끝을 튕기며 파머를 올려다봤다.
“어때? 이제 좀 믿음이 가?”
“…설산도 정화시킬 수 있나?”
“그건 아직 안 해 봐서 모르겠는데. 가능하지 않을까.”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사실 내가 일일이 돌아다니며 정화할 생각은 없다. 거인계가 얼마나 넓은데. 비도 계속 내릴 거고.
뭐든 문제가 생기면 원흉을 없애는 게 정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챕터부터 정리를 해야 하고.
“내가 뭘 하면 되지?”
결정을 굳힌 듯 파머가 물었다.
뭘 하면 되느냐, 글쎄.
일단은…….
“1번 구역이랑 3번 구역부터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