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화 최선을 다해 막아라
이건 또 뭐람. 나를 찾는 사람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이게 바로 인싸의 삶이라는 건가.
멤버들도 그렇고, 델버튼도 그렇고, 저기.
“이블아이가 나타났다!”
“최우선으로 놈을 죽여!”
“목격자가 생기기 전에 끝을 봐야 한다!”
숭배자들도 신나서 개떼같이 몰려든다.
이 망할 놈들 같으니.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사실상 80층대에선 숭배자와의 싸움이 강요되고 있다.
놈들은 멸망을 가속하는 요인 중 하나. 탑이 이들을 이곳에 배치한 이유도 그 때문일 거다.
세상에 망조가 들면 들수록 저런 놈들이 늘어난다는 거니까.
아무튼.
“반갑지?”
“살아 있었군. 거인의 무덤에서 발견된 적 없다고 들었는데.”
난 두 번째 챕터에서 마주쳤던 녀석을 바라봤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이름도 몰랐지만.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츠즈즈즈
[브레이]
-탑 숭배자입니다!
-거인계 숭배자들의 수장, 그라함의 오른팔.
-골드 등급 시니어입니다.
브레이라, 이게 놈의 이름이었군.
그라함의 오른팔이라고 하는 걸 보니 실력은 확실하겠고.
일단 이놈부터 잡자.
“탈모맨, 괜찮냐?”
“물론이지. 이제 막 몸이 풀렸다고.”
어깨를 돌리며 브레이를 노려보는 녀석.
그래 보인다. 밀리고 있기는 했지만 압도당한 것도 아니고 큰 부상도 안 보인다.
타박상 몇 개 정도? 움직이는 걸 보니 컨디션도 나쁘지는 않은 거 같고.
저쪽에 가장 조심해야 할 대상인 그라함은…….
“어찌 고대의 망자가 일어섰느냐!”
“네놈들이 설치는 걸 보고 죽어서도 눈이 감기지 않았다!”
내가 데리고 온 강철 거인 아니지, 헬그레이트가 상대하고 있었다.
그라함 또한 결코 얕볼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안다. 느껴지는 기세만 해도 그동안 만난 숭배자들과는 격이 달랐으니까.
지구에 나타난다면 작은 나라 정도는 삽시간에 초토화시키지 않을까.
상위층으로 올라오면서 스펙 차이가 커져서 정확히 측정하기는 힘든데, 예상하기로는 최소 80층대 후반 이상을 오른 거 같다. 어쩌면 90층까지 올랐을 가능성도 있고.
왜냐 당장 내 앞에 서 있는 녀석이 80층대 중반은 넘어선 거 같아서. 그러지 않았다면 탈모맨이 밀렸을 리가 없다.
핥짝이와 냥펀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는 그라함은 말할 것도 없고.
“밸런스 한번 개판으로 해 놨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강한 놈들을 배치하면 등반가들은 어떻게 하라고.
막말로 놈들이 작정하고 쓸어버리면 등반가들은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 거 아닌가.
억울한 마음이 드는 타이밍.
[Tip. 상위층은 각 챕터의 업적에 따라 난이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팁 메시지가 떠올랐다.
얼씨구? 친절하기도 해라.
맞는 말이기는 하다. 내가 챕터를 어떻게 깨냐에 따라 다음 챕터의 상황이 달라지니까. 변동성이 있을 수밖에 없지.
시스템적으로도 어느 정도 개입을 하는 거 같고.
메시지창을 노려보며 권능을 사용하자 추가적인 정보가 떠오른다.
[특정 등반가의 수준을 고려, 숭배자 그라함과 브레이의 제약이 일부 사라집니다.]
[두 NPC는 지정된 대상 외의 등반가에게는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지정 대상은 4명입니다.]
-파아앗
추가 정보와 함께 나와 탈모맨, 냥펀, 핥짝이의 머리에 작은 빛무리가 생겼다가 사라진다.
아무래도 나 포함 멤버들이 지정 대상인 모양.
그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놈들은 우리만 두들겨 팰 수 있다 이거지.”
물론 완전히 그런 건 아닐 거다.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했지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고는 안 했으니까.
대충 벽을 무너트리거나, 숭배자들한테 버프를 걸어 주거나 하는 식으로 움직일 거다.
뭐든 좋다만.
“아무래도 좀 서둘러야 할 거 같은데.”
하늘을 올려다봤다. 폭우가 심해지고 있다. 홍수라도 일으키고 싶은 건가.
불길함으로 가득한 구름은 주저앉듯 내려오고, 섬뜩한 번개가 간헐적으로 번쩍인다.
검은 비가 이곳까지 다시 찾아온 이유는 하나.
혼돈의 파편이 되어 가고 있는 델버튼이 내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
기억한다. 검은 비를 흡수하며 일시적이지만 델버튼이 정상화되었던 것을.
-콰아아아앙!
한눈을 파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브레이가 기습적으로 공격해 왔다.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가 탄력적으로 놈의 대검을 쳐 냈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 그때도 느꼈지만 힘이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저번 같지는 않을 거야.”
할 만했다. 그때와 달리 몸 상태가 괜찮거든.
빙글 검을 돌리는 것으로 손목을 풀었다.
“덤벼라, 이블아이.”
“왜? 마음이 좀 급한가 봐?”
삐딱하게 서서 입가를 비틀었다. 조급함이 느껴진다. 방금 일격도 육중하지만 날카롭지는 않았다.
뭐랄까. 나를 잡는 것보다는 날려 버리고 싶은 느낌이었달까.
그야 그렇겠지.
“네 주인이 죽을 거 같아서?”
“닥쳐라.”
정답을 말했는지 놈이 얼굴을 구겼다.
그라함이 강한 건 맞다. 그런데 내가 데리고 온 녀석이 너무 강했다.
-콰아앙! 쾅!
-쿠구구구궁!
지금도 연달아 들려오는 굉음.
흘낏 바라보자 마음껏 도끼를 휘두르는 헬그레이트와 악을 쓰며 저항하는 그라함이 보였다.
도끼를 빌려 주기 잘했군. 원래 녀석 거였지만 부활시켜 준 대가로 가져갔으니 내 소유지 뭐.
얼추 예상은 했지만 진짜 괴물이네.
“이블아이, 대체 누굴 데려온 거야?”
“음, 고대의 영웅?”
탈모맨도 어이가 없는지 물어볼 정도로 강하다.
어쩌면 이거 때문에 숭배자들의 제약이 일부 풀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라함만 처치하면 나머지 놈들은 별거 아니다.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헬그레이트가 다 쓸어버릴 테니까.
핥짝이와 냥펀도 합세했으니 비교적 빠르게 정리를 마치겠지.
그렇다면…….
“우리도 저놈을 끝장내야겠지, 탈모맨?”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하하하! 저번에 못 끝낸 승부를 보자고!”
“정정당당하게 2 대 1로 말이지.”
브레이와 싸운 건 탈모맨도 마찬가지.
억울해하지는 마라. 그런 거 따질 거였으면 비가 내리는 타이밍에 맞춰 기습한 놈들이 더 비겁하다.
-파아앙!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놈을 향해 달려갔다.
덩치가 큰 녀석. 사용하는 건 대검. 다른 거인들과는 다르다. 대부분은 주술과 맨손으로 싸우니까.
가뜩이나 덩치가 큰데 무기까지 사용하니 리치 싸움에서는 답이 없다.
놈에게는 근거리 공격이 우리에게는 중거리 이상의 공격이니까.
하지만 파고든다면?
-쿠르르릉!
땅굴 이동을 사용했다.
놈이 진동을 감지해 칼을 찍어 누를지도 몰랐으나 위에는 탈모맨이 있으니 어그로를 끌어 줄 거다.
-쿵쿵
덩치가 커서 그런가 발소리도 우렁차네. 덕분에 어디에 있는지 잘 알겠다.
쿵! 다시 한번 울린 진동에 위치를 감지.
-파아아앗!
그대로 위로 솟구쳤다.
나이스. 놈의 뒤꿈치가 보인다. 내가 올라온 것을 느낀 녀석이 다급히 뒤를 돌았지만 늦었다.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검강]
[절삭(S) Lv.10+]
[영혼 찢기(S) Lv.10+]
[칭호, 발목 수확자가 발휘됩니다!]
-촤아아아악!
아킬레스건을 검으로 그었다.
핏줄기와 함께 놈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재빠르게 옆으로 뛰어 거리를 벌리기까지.
“아쉽군.”
워낙 큰 놈이다 보니 아킬레스건도 상식 밖으로 질기고 크다.
아쉽네. 칭호 효과까지 사용한 공격이었는데.
역시 시니어급은 다르다 이건가, 아니면…….
-스스스스
놈이 사용한 주술의 효과인가.
다리는 물론이고 몸 전체의 피부색이 바뀌었다. 찰나의 순간 주술을 사용한 것이다.
보다 탁한 무채색에 가까운 색. 회색 인간이라고 하면 되려나.
효과를 보아하니 방호력을 높이는 쪽 같은데. 그것도 단순 육체의 강화가 아닌 거 같은 게 영혼 찢기에도 저항을 했다.
몸에 위해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느낌.
혼돈 수치가 쌓이고, 내게 들어오는 모든 효과가 일부 반감되는 거랑 느낌이 비슷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녀석은 주술을 쓴 순간만 그런 거고 난 상시 발동이라는 것 정도.
게다가…….
-사아아아
회색으로 바뀌었던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걸 봐서 오랫동안 지속하기 힘든 종류의 주술인 거 같다.
그냥 체력 유지를 위해 조절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거야 확인해 보면 되는 것.
“흣차!”
탈모맨이 돌진했다. 그때마다 놈이 검을 휘둘렀으나 탈모맨 또한 전투의 전문가.
몸을 컨트롤하는 실력이 굉장하다. 아무렇지 않게 스텝을 밟으며 안으로 파고드는데, 보는 내가 다 소름 끼칠 정도.
‘저렇게 나한테 들어오면 압박감 장난 아니겠는데.’
같은 팀이라 다행이다.
아무튼 탈모맨이 들어가는 지금이 기회다.
아무리 대단한 녀석이라도 팔다리는 우리와 같다. 종족 특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거인족은 스킬 의존도가 매우 낮다.
타고난 종족 값으로 빠르게 위로 올라온 이들이 대다수라고 하니까. 스킬을 얻을 기회도, 이유도 없었을 거다.
그래서 다행이다.
“여기서 스킬까지 남발했다면 너무 사기잖아.”
[어스 월(AA) Lv.4]
-콰가가가각!
발밑에 벽을 생성시켜 놈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가는 와중에도 연속적으로 벽을 생성.
“어림없다!”
놈의 움직임을 방해했으나 무식하기도 하지. 몸을 들이박으며 부숴 버린다.
오히려 파편 때문에 탈모맨의 발이 더 분주해졌다.
그게 마음에 든 걸까.
“어리석은 녀석! 오히려 동료의 발목을 잡는……!”
놈이 날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고.
“눈뽕샷!”
“크하아아아악!”
난 파이어 밤에 러브 앤 피스를 적용. 신성력을 때려 박아 거대한 광채를 만들었다.
탈모맨의 발목을 잡아? 내가?
그냥 나 바라보라고 어그로 끈 거였다.
여기서 파이어 밤.
가속하며 놈을 향해 돌진했다. 순간적으로 시야를 잃은 녀석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으나.
[안개 질주(S) Lv.10+]
[망자귀환(S) Lv.10+]
안개화해서 그대로 통과 육체를 되찾는 것과 동시에 버프를 둘렀으며.
[홍예참(SS)]
펠라인 스킬을 사용해 검을 내려찍었다.
노리는 곳은 놈의 목. 놈의 피부가 수시로 색을 바뀐다.
역시나 놈의 주술은 강력하지만 오래 지속할 수 없다.
시야를 잃어 언제 공격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무력하다는 이야기.
엄청난 속도로 주술이 적용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으나 나 역시 초인의 영역에 들어선 상태. 타이밍을 노리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니.
-사아아아
놈의 피부가 원래대로 돌아온 순간.
-촤아아아아악!
내 검이 놈의 목을 그었다.
검강을 사용해 늘어난 검격. 손끝으로 감각이 왔다. 두꺼운 근육과 피부가 잘리는 느낌이.
뼈까지 닿았나? 미묘하게 검 끝이 걸렸는데.
상관없다. 깔끔하게 잘라 내지 못했더라도 치명타를 입힌 것은 분명했고.
-쿠구궁
용암처럼 뿜어져 나오는 핏줄기와 함께 목을 감싼 녀석이 무릎을 꿇었으니까.
마무리는 탈모맨.
[SS급 권능, 두 세계의 지배자가 빛납니다!]
[칭호, 초인의 길이 함께합니다!]
[칭호, 마왕의 가호가 깃듭니다!]
[정의의 일격(S) Lv.10+]
파괴적인 에너지를 머금은 주먹.
주변이 일렁거릴 정도로 강력한 힘의 파동이 번지듯 뻗어 나갔고, 그 범위에 닿은 녀석은.
“크흐아아아악!”
괴성과 함께 뒤로 넘어갔다.
해치운 건가? 일단 미동은 없다. 보통은 죽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거인들은 워낙 생명력이 강해서 확신할 수가 없다.
지금이 기회다. 확실히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혼돈에 물들고 있는 델버튼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콰르르르릉!
번개와 함께 델버튼이 모습을 드러냈다.
충격에 언더 시티 일부가 무너져 내렸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끈적한 기운이 주변을 감쌌다.
섬뜩한 느낌에 숭배자와 거인들조차 몸을 떨었으며.
“이블, 아이.”
온몸이 검게 물든 채 몸 일부가 기괴하게 비틀린 델버튼이 내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틀거리며 위태롭게 한 발 한 발 옮기고 있었지만 왤까, 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죽음의 사자가 멸망을 예고하러 내려온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이, 이이이익!”
영혼을 옥죄는 듯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숭배자 한 명이 델버튼에게 달려들었으나.
-촤악
손 한 번 휘두른 것으로 온몸이 녹아내린 숭배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숭배자들의 수장인 그라함과 멤버들도 긴장해 얼어붙은 순간.
“조금만 더, 빨리 왔, 으면 좋았을 텐데.”
[혼돈이 델버튼을 좀먹습니다.]
“그래도 아, 직 늦지 않았다. 나를, 막아라.”
델버튼이 내게 손을 내뻗었다.
“최선을 다,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