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7화 스쿠룬타
지옥과 연결된 곳이 동쪽. 반면에 멸망한 차원과 연결된 계약의 문은 북쪽에 있다.
위치로 따지면 바람의 영역과 요정계가 합쳐지며 기묘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곳.
“요정계에 있던 사람들도 정신 나갔을 거 같은데.”
누가 신비의 종족 아니랄까 봐. 지금까지 탑을 등반하면 본 적 없던 생태계가 꾸며져 있다.
나쁜 쪽은 아니다. 적어도 식인 식물이라던가 뿌리를 다리 삼아 질주하는 나무는 없으니까 다만.
-뾰로롱
-슈르르륵
다채로운 색을 자랑하는 꽃과 나무들이 요상한 몸짓을 하며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에 따라 반짝이는 꽃가루가 날리는 건 덤. 그뿐일까.
“규르륵?”
깜찍하게 생긴 생물체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 땅굴로 몸을 숨긴다. 정령계에서는 본 적 없으니 요정계에 서식하던 거겠지.
잡아가면 반려동물로 키우려는 사람이 꽤 많지 싶은데. 말랑하게 생긴 몸통에 앙증맞은 부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어디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다.
동화를 보면 요정을 따라갔다가 정신 못 차리고 그곳에 살았다는 내용도 있는 게 거짓은 아닌 거 같다.
“요정계에서는 진지하게 싸우는 게 바보짓이라 했던가.”
대충 만화적 허용이 넘쳐나는 세계라고 할까. 전해 들은 바로는 그렇다. 절벽에서 떨어지면 기연을 만나고, 몬스터 사이에 둘러싸이면 각성하고 그런 거.
클리셰 같은 느낌이다만 요정계에서는 그게 보통이라고 한다. 나야 안 겪어 봐서 모르겠지만.
같이 갈 수는 없지만 도움은 주고 싶었던 건지 떠나기 전, 프로네와 카트란스가 이것저것 많이 알려 줬다.
안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물건도 하나 줬고.
[계약의 고리(B)]
-정령계와의 계약에 반응한 대상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일종의 나침반이라고 할까. 멸망한 차원에서 계약에 부응할 대상은 혼돈의 파편밖에 없으니 사실상 놈을 찾는 이정표라고 보는 게 맞았다.
“왔다.”
“그에에.”
가파르게 솟은 절벽을 기어오르니 대기실 화면에서 봤던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문. 활짝 열려 있는 그곳에는 시커먼 소용돌이만 치고 있다.
이곳으로 오면서 멤버들한테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는데 아직까지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이곳을 놔두고 지옥에 전념하고 있다고.
몇몇 안으로 들어가 확인하려던 인원도 있었으나 혼돈 수치가 부족하다고 진입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탈모맨까지 거부당했으니 실질적으로 꽤 높은 혼돈 수치를 요구하는 모양.
나야 프리 패스지만.
-우우우웅
계약의 문에 손을 데자 물컹한 뭔가를 만진 듯한 기분이 들었고 이내.
[계약의 문에 진입합니다.]
[주의!]
[굉장히 위험한 차원입니다!]
[진입 조건-혼돈 수치 90점]
[멸망한 차원과의 통로로 진입합니다.]
경고 문구와 함께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역시나 혼돈 수치를 90점이나 요구하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 거다.
이미 멸망한 차원으로 진입하는 만큼 안전장치를 마련해뒀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리고 내가 예상하기로는.
‘반대편에도 뭔가 요구 조건이 있었을 거야.’
어느 쪽이 요청하냐에 따라 다르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계약의 문은 정령들을 다른 차원으로 보내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즉, 이곳 정령계에서 넘어가는 조건이 훨씬 수월하다는 것. 사실상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까 혼돈의 파편도 이곳으로 바로 넘어오지 못하고 계속 시도하고 있는 거고.
지옥은 어떤 조건이 걸려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쪽으로는 가 보지 않아서. 그곳에서 넘어온 괴물들도 대가를 치르고 왔겠지.
그쪽은 다른 사람한테 맡기고 이쪽에 집중하자.
“그다지 좋은 광경은 아니군.”
“그엑, 그엑.”
내 말에 동의하는지 덕춘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계약의 문. 내부가 원래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 거다. 왜냐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진득한 혼돈의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원래라면 보다 정상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었겠지. 지금은 뭐랄까. 공간이 일그러진 시커먼 어딘가에 떨어진 기분.
좋게 말하면 우주를 보는 듯했고, 나쁘게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버려진 것 같다.
몸이 주욱 늘어났다가 줄어들 듯 움직인다. 공간이 비틀려졌다는 증거. 웜홀에 빠지면 이런 기분이려나.
원근감이 사라지고 내가 서 있는 위치조차 불명확하다. 그나마 제대로 보이는 건 내가 넘어온 문과 저 멀리 시커먼 구멍 하나.
솔직히 말하면 멀미 날 거 같다. 혀를 씹으며 정신을 되잡았다.
진짜 우주라도 되는지 점멸하는 빛과 안개와 같은 무언가가 이리저리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맞은편.
-그으으으으오오오
불길하기 짝이 없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프로네가 건네준 아티팩트 역시 그곳을 가리킨다.
저곳에 혼돈의 파편이 있다. 어떤 놈일지는 알 수 없으나 이번에는 긴장해야 한다. 혼돈의 파편으로 변하고 있는 놈이 아니라 진짜 혼돈의 파편이니까.
[혼돈의 파편, 스쿠룬타가 당신을 응시합니다.]
-구구구구궁
그저 바라만 봤을 뿐인데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진다.
나라는 존재를 짓누르는 듯한 거대한 존재감. 비틀린 공간마저도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쭈욱 펴진다.
덕분에 멀미는 좀 줄었는데.
“저건 뭘까.”
그 너머에 보이는 존재를 보자니 이곳으로 들어온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개의 머리가 달려 있다. 어깨 위에 하나. 가슴에 하나. 한쪽은 웃고 다른 한쪽은 눈물을 흘리며 길게 뻗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린다.
얼핏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으나.
-쯔으으으윽
-꽈드드드득!
억지로 차원 통로를 비집고 몸통을 구겨 넣는 모습을 보자니 절로 소름이 돋았다.
당장 나도 등 뒤로 따끔하면서도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으니.
“델버튼도 저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단순히 저 녀석이 더 강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직접 붙어 보지 않은 만큼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느껴지는 아우라가 범상치 않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충동적인 뭔가가 올라오는 느낌.
[혼돈이 상대의 기운을 막아 냅니다.]
[정신 보호(SSS) Lv.10+]
혼돈과 정신 보호가 나를 보호했다.
작게 숨을 들이마시며 권능을 사용했다.
[스쿠룬타]
-혼돈의 파편.
-죄책감과 변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죄책감과 변명이라. 그 부분을 유심히 살폈다.
지금까지 살펴본바 혼돈의 파편은 두 가지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델버튼이 내기와 질병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70층 안전지대에서 만난 혼돈의 파편 흔적, 하이덴은 위선과 부끄러움으로 이루어져 있었지.
다른 놈은 몰라도 내게 동정심을 품은 유일한 혼돈의 파편이라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놈들이 가진 특성은 능력과 그들이 살아온 세계의 배경과 깊은 관계가 있어.’
저 녀석이 있던 세계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대략적이나마 알 거 같다.
죄책감과 변명. 너무나 잘 어울리는 단어 아닌가. 불신지옥.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환경이 펼쳐졌을 거다.
크게 관심은 없다. 멸망한 세계가 하나도 아니고 사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나 멸망이 다가온 세상의 사람은.
“온다.”
“그에에.”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놈 또한 나를 인식했는지 더욱 세차게 팔다리를 움직였고.
[칭호, 잊힌 세계의 왕이 빛납니다.]
칭호가 반응했다.
연옥계 시나리오를 마치고 얻은 칭호.
여기에 반응한 존재들은 다양했으며 그중에는 혼돈의 파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 그들은 100층에 도전했다가 모두에게 잊힌 영웅들이니까.
씁쓸한 결말이라고 할지 몰랐으나 동정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그런 감정을 가지기에는 혼돈의 파편은 새로운 인격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오오, 잊힌 자들의 빛이여. 그대를 찾아 이곳에 왔다.”
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말을 하니 B급 공포 영화에서 나올 법한 목소리가 들렸다.
개인적인 감상이 그러할 뿐 실제로 느껴지는 건.
[정신 보호(SSS) Lv.10+]
가공할 만한 절망감과 존재감이었지만. 그저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의 정신을 무너트릴 수 있는 존재.
“누구 마음대로 날 그렇게 불러. 난 관심도 없구만.”
귀를 후비며 놈을 향해 걸어갔다.
이거 갑자기 저 녀석이 왜 튀어나오나 했더니만 나를 보러 온 거였나.
어쩐지, 정령들이 혼돈의 파편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나중의 일이라 하더라니. 내 기운을 읽고 억지로 안으로 진입한 거였다.
왜?
“델버튼을 구원한 게 그대인가!”
이미 나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까.
혼돈의 파편은 NPC도 아니고 등반가도 아니다. 그저 탑에 속해 있는 오랜 망자. 완전한 멸망을 예고하는 괴물이다.
그런 놈들의 관심을 받자니 썩 달갑지는 않았으나.
“그래. 보고 싶다니 실컷 봐라.”
나름 호의적으로 나와준다면 나야 땡큐지. 굳이 힘 빼지 않고 대화로 해결을 볼 수도 있으니까.
아직도 시나리오가 끝나지 않은 이유도 이러한 가능성 때문이 아닐까.
“나는 억울하다. 최선을 다해 세상을 위해 움직였을 뿐. 손에 묻은 피는 세계의 악의로 인해 생겨난 것뿐이다. 내게는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
뭐라 뭐라 중얼거리면서 내게 다가오는 녀석.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오니 키가 상당하다. 대략 4미터 정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놈이 내게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다. 구원? 그게 뭔데. 설마 혼돈의 파편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으나…….
‘어째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단 말이지.’
이제야 확실해진다. 놈과 델버튼의 차이점.
적어도 델버튼은 혼돈에 집어삼켜 인격이 바뀌었을지언정 나름 정신 상태가 멀쩡했다.
반면에 이 녀석은 머리가 두 개라 그런지 알 수 없는 말만 중얼거렸고.
“날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줘!”
“끼아아아아악!”
-과아아아아아앙!
포효와 함께 놈이 몸을 날렸다.
강력한 파장으로 일대가 일렁거린다. 가슴에 달린 머리는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고, 어깨 위로 달린 머리는 눈물을 철철 흘린다.
명백한 살기. 초인의 영역에 들어서며 한계를 뛰어넘는 감각을 가졌음에도 반응하기 버거운 속도였고.
“그래. 그냥 대화로 끝날 턱이 있나.”
-카아아아아앙!
난 애써 공격을 피하기보다는 막아 내기로 했다.
놈의 손과 혼돈검이 겹쳐진다.
엄청난 반동! 어깨째로 팔이 날아갈 것 같았으나 이를 악물며 버텼다.
놈 또한 입을 벌리며 주춤 물러선다.
“오오. 역시 탑의 선택을 받은 자로다.”
[혼돈 수치가 일정 수준을 벗어났습니다.]
[혼돈의 파편이 당신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과연 올라서 그런지 놈에게 대미지가 들어갔다.
무기질적으로 빛나는 피부에 생채기가 생겼다. 감탄하는 눈으로 손을 뒤집어 살핀 녀석의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길게 뻗은 혀로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피를 핥은 스쿠룬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마 만에 맛보는 피인가! 내게도 피가 흐르고 있으니 그 어떤 벌도 달게 받으리라! 으아아아아!”
포효하며 눈물을 흘린다. 눈물샘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콸콸 쏟아지는 눈물.
기괴한 모습에 절로 얼굴이 찡그려진다. 자고로 미친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 했거늘.
“이건 못 피하겠는데.”
[스쿠룬타가 징벌을 내려 줄 대상을 찾았다고 선언합니다!]
[멸망의 존재는 당신을 쫓을 것입니다.]
위로 떠오른 메시지를 보자니 아무래도 글러 먹은 거 같다.
한참을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을 짓던 녀석이 뚝, 하고 얼굴을 굳혔고.
“내 죄를 참하라, 등반가여. 죄인의 목을 들며 정의를 외쳐라.”
쿵! 쿵! 쿵!
양팔을 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내 죄를 씻어다오, 탑의 부름을 받은 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