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9화 86층 클리어
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행운 스텟이 오르고 그동안 아무런 일도 안 일어났었는데 이런 식으로 발동될 줄이야.
생각해 보면 파이어 밤도 그렇고, 안개질주도 그렇고, 권능인 별을 주시하는 눈과 스킬 합성으로 얻었던 거였다.
그때 도움을 줬던 것이 행운 스텟이었고.
‘지금은 두 권능뿐만 아니라 행운 스텟도 강화됐어.’
더욱 큰 시너지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
어떻게 해야 할지 대략적으로나마 알 것 같다.
스쿠룬타가 당황하며 거리를 벌린 상황. 선택은 빨랐다.
“사용해야지.”
난 망설임 없이 권능을 발휘했다.
-스스스스스
행운 스텟과 별을 주시하는 눈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였다.
게다가.
[혼돈 수치가 반응합니다!]
[스킬 초월(S) Lv.10이 자극됩니다!]
혼돈 수치와 스킬 초월까지 작용했고, 거기에 혼돈까지 적용됐으니.
[당신의 유형은 정의할 수 없는 혼돈입니다.]
[혼돈이 일정 수치를 넘어섰습니다!]
[당신만의 규칙이 새롭게 쓰여집니다!]
-파지지지지직!
어마어마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시커먼 무언가. 홀로그램이 이리저리 튀면서 깨져 나간다.
그동안 여러 번 봐 왔던 버그 메시지. 그것이 나타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내가 직접 버그를 만들어 냈다는 것.
그동안 내가 저지른 일에서 후발적으로 발생했던 것과는 달랐다.
나를 둘러싼 무언가가 바뀌고 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무언가…….
[혼돈의 영역에 들어섭니다.]
-우우우우우우웅
세계가 공명한다.
마치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듯한 느낌. 아득한 공간으로 떨어진 듯한 아찔함이 전신을 덮쳤고 단순한 착각일까, 일전에 보았던 탑의 모습이 스치듯 지나갔다.
끝을 알 수 없이 뻗은 무언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조차 불분명한 채 오래도록 세계를 무너트려 온 그것.
‘탑.’
탑의 실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역시 별을 주시하는 눈으로 얼핏 봤던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한 번 봤었기 때문일까, 그때처럼 압도되지는 않았다. 그저 알 수 없는 끌림이 느껴졌을 뿐.
한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홀린 것처럼 빨려 들어가는 느낌…….
-사아아아아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시야가 돌아오자 정신이 들었다.
꽤 오랜 시간을 부유한 것 같았건만 실제로 시간은 거의 지나지 않았거나 멈췄던 모양.
마지막으로 봤던 스쿠룬타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에는 차이가 없었다.
시스템적인 뭔가가 개입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거야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기존의 규칙을 벗어납니다.]
[파이어 밤(S) Lv.MAX와 혼돈을 합성합니다.]
[스킬 초월(S) Lv.10이 개입합니다.]
-파지지지지짓!
그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권능이 발휘되었다는 것.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홀로그램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요구했다.
[강화의 대가가 필요합니다.]
촤르르르륵.
수없이 지나가는 스킬 목록. 그중에는 내가 익힌 스킬들도 존재했다.
무엇을 요구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재료. 스킬을 합성시키는 데 필요한 재료를 원하고 있는 거다. 그것도 상당한 양의 스킬 재료를 말이다.
요구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면 내가 익힌 스킬을 재료로 써 버려서라도 스킬 합성을 마치겠다는 권능의 의지가 느껴졌다.
잠깐이라도 머뭇거렸다가는 스킬창에 있는 것들도 사라질 판이라 다급히 보물 주머니와 아공간 팔찌를 열었다.
“다 가져가라! 내가 익힌 거 건들지 말고!”
잴 것 없이 가지고 있던 스킬북을 쏟아 냈다.
화조국과 거래를 하면서 정산 일부를 스킬북으로 받고 있었던 만큼 등급 상관없이 꽤 많은 스킬북을 보유하고 있었고.
-수우우우우
내 권능이 탐욕스럽게 스킬북을 흡수했다.
혼돈이 개입해서인지 기존과는 전혀 다른 형태. 이전까지만 해도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스킬을 먹어 치우지는 않았다.
“으으으으! 이노오옴!”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느낀 스쿠룬타가 팔을 길게 펼치며 달려온다.
지금까지는 당황해서 머뭇거리고 있었지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이 안 좋지. 나름 얕보고 있던 대상한테 한 방 먹어서 경계심을 가지게 됐으니까.
저래 보여도 삶에 대한 의지가 굉장히 큰 녀석이다.
여전히 압박감이 대단하다만 왤까.
‘처음처럼 압박감이 느껴지지 않아.’
권능과 함께 깨어난 혼돈의 영향인가. 아니면 단순히 익숙해졌기 때문인가.
잘 모르겠다. 그저…….
[스킬 합성 완료!]
[파이어 밤(S) Lv.MAX → 억겁의 폭화로 변경됩니다.]
녀석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인 행동.
[억겁의 폭화]
-콰아아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놈을 휩쓸었다.
얼핏 보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 홍염.
하지만 시뻘건 불길과 함께 치솟는 검보라색 아지랑이가 기존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해 줬고, 그 안에 담긴 혼돈의 힘은.
“크하아아악! 어찌하여 등반가가!”
혼돈의 파편에게도 놀라운 것이었다.
전력으로 내뿜은 열기에 놈의 피부 일부가 익는다. 두 개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진다. 두 쌍의 눈에 감도는 당혹감.
그것도 잠시. 놈이 내 목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 나를 죽이겠다는 명백한 의지가 섞인 일격이다.
목을 꺾어 피하고자 했지만 단번에 빠져버린 마력과 혼돈에 몸에 힘이 빠졌다.
놈의 손끝이 목을 꿰뚫려는 그 순간.
-우우우우우웅
[계약의 문이 닫힙니다.]
공간이 찌그러졌다. 아니, 늘어진다고 해야 하나.
놈의 손과 목과의 거리는 고작해야 10센티미터 안팎. 그 짧은 거리가 한없이 멀어진다.
공간이라는 고무줄을 주욱 늘린 것 같은 느낌. 계약의 문이 닫히며 두 세계의 연결이 끊기고 있었다.
원인은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덕춘이.
‘성공했구나.’
내가 놈을 잡고 있는 사이, 타락 천사의 검으로 경계를 끊은 게 분명했다.
순식간에 멀어진 스쿠룬타가 뭐라 소리치는 것 같기도 하다만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차원의 연결의 끊어지면서 내 몸 또한 길게 늘어나며 사라지고 있었으니까.
죽는 건가. 연결 통로와 함께 몸이 터져 버릴 건 분명하다. 운이 좋아 봐야 차원 사이에 버려지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차원 상인들은 이런 차원 틈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한다고 했었나.
‘릴카도 이런 곳에서 돌아다녔던 건가.’
정신이 희미해지니 잡생각이 많이 난다.
조금은 나른해진 정신 속.
[알 수 없는 존재의 등장에 혼돈의 파편이 관심을 보입니다.]
[경계선에 놓인 존재에게 탑의 의지가 전해집니다.]
[시스템 개입!]
[당신은 혼돈의 파편이 아닙니다.]
[스킬 합성 결과가 바뀝니다.]
[86층 클리어!]
.
.
.
어지럽게 메시지가 떠올랐고 미쳐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
[사망했습니다.]
의식이 끊겼다.
* * *
“흐업!”
난 급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을 깜빡이며 몸을 살폈으나 팔다리는 무사히 붙어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일단 목이 말라 워터로 물을 불러 내 마셨다.
“그에에.”
자기도 달라며 손가락을 까딱이는 덕춘이. 옆에는 타락한 천사의 검이 놓여 있다.
검신에 금이 가기는 했지만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아 수리할 수 있을 거 같다.
일단 덕춘이를 들어 허공에 띄운 물덩이에 넣어 줬다. 그제야 살겠는지 물덩이 안에서 잠시 헤엄치던 덕춘이가 물방울 위로 고개를 내밀더니 내게 물을 뱉었다.
“야야, 방금 일어난 사람한테 물대포를 쏘냐.”
“그헤헤.”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예 손을 휘둘러 물을 튀긴다.
이래서 털 없는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
됐다. 개구리를 상대로 부들대는 것도 웃기는 일.
찬물에 덕분에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다.
“여긴 어디야.”
우선 주변부터 살폈다. 계약의 문 안에서 스쿠룬타를 상대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이후에는 모르겠다.
환경을 보아하니 차원의 경계선도 아니고 정령계는 더 아니다.
적당히 바람이 불기는 하지만 정령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으니까. 내가 있는 곳은 높은 절벽 위.
그 아래로 흐르는 강을 보고 있자니 제법 장관이기는 하다.
[대기실- 바람 절벽]
그런 내게 보이는 메시지창.
대기실이라, 그렇다는 건?
“클리어됐나 본데?”
머리를 긁적이며 기억을 되짚었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은 안 나는데 86층을 클리어했다는 알림을 본 것도 같다.
뭐, 죽었다는 알람도 떴던 거 같지만. 아무래도 층이 클리어되는 것과 동시에 죽었던 모양.
하긴 처음 탑에 들어왔을 때도 비슷했지. 입장과 동시에 죽어서 코인을 하나 날렸으니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의 난 코인이 무한이라는 것 정도?
“으으읏차.”
몸이 찌뿌드드해 기지개를 켰다.
죽었다는 것 자체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특별하게 고통스러운 것도 없었고, 코인이야 얼마든지 쓸 수 있으니까.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한다. 목숨 하나 내주면서 혼돈의 파편에게 엿을 먹여 줬으니.
따지고 보면 나한테 달려들었던 스쿠룬타도 시나리오를 위해 배치되었던 만큼 진짜 죽지는 않았겠지만 끊어진 차원에 고립되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닐 거다.
“끔찍했지.”
“그에에.”
정신 나간 녀석이 기다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달려드는 모습이란.
다시 생각해도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헛소리는 또 얼마나 해 대는지.
혼돈의 파편이라고 다 같은 놈이 아니라는 걸 톡톡히 알았다.
델버튼 정도면 양반이지. 암, 그렇고말고.
아무튼.
“클리어 보상이나 확인해 볼까.”
시나리오를 클리어한 만큼 그에 따른 보상이 나왔다.
이번 시나리오는 정신없었다. 망할 숭배자들이 수작질을 벌여서 말이지.
등반가 중에도 숭배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이용할 줄은 몰랐다.
골드 등급인 유헤다를 잡은 건 소득이었지만 앞으로도 이딴 짓을 반복하면 여러모로 골치 아플 터.
다른 상위 헌터와 인맥을 동원해 조치를 취했으니 빠르게 안정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혼돈의 파편의 위협에서 벗어났습니다.]
[혼돈 수치 +10점]
혼돈 수치는 그다지 많이 얻지 못했다. 하기야 3개의 챕터 중 하나는 거의 아무것도 안 하고 넘어갔으니 당연한 건가.
그나마 혼돈의 파편이 넘어오지 못하게 막아서 10점이라도 얻은 거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보다 적게 얻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머지는…….
[정령과精靈果(AAA)]
-정령계에서 수확할 수 있는 과일.
-섭취 시 정령과의 친화도가 상승합니다!
-정령술사들이 구하고 싶어도 구하기 쉽지 않죠.
[요정 잎새주(AA)]
-요정계에 자라는 식물의 이파리와 이슬로 만든 술.
-청아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일품입니다!
생각보다 조촐한 결과물이다.
정령이나 요정과 인연이 있는 게 아니라면 얻을 수 없는 만큼 귀한 물건이기는 하지만 나한테는 그다지 메리트가 없는 것들이라.
그나마 정령과가 좀 쓸 만한 거 같기는 하다만…….
‘난 정령술을 쓰는 게 아니라서 말이지.’
헌터 중에도 정령술사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극소수. 관련된 권능이나 스킬이 없다면 쓸 일이 없다.
그들이야 정령과 친해지기 위해서라도 써먹겠지만 나야 이미 정령의 친구 칭호가 있어서 친화도는 걱정할 게 없다.
이것들이야 나중에 헬다잉 키친에 넘기든 먹든 하고.
“좀 살펴볼까.”
난 자리에 앉아 대기실로 넘어오기 전에 떠올랐던 메시지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막바지에 메시지가 몰려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스킬도 확인해 봐야 하고. 파이어 밤에 변화가 있었다. 그것 먼저 살펴보자는 마음에 난 스킬창을 열었고.
“…어?”
가늘게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