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화 87층
-파아아앗!
빛과 함께 새로운 풍경이 나를 반겼다.
대기실은 어디까지나 대기실,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느낌은 비슷하지만 넘어갈 것이 정해져 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푹 쉬었으니까. 나야 좋지.”
“그에에.”
덕춘이도 동감인지 팔을 휘적인다.
대기 시간이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5일 정도는 시간이 있었다.
뭐, 쉬기만 한 건 아니다. 오징혁에게 건네줄 포션과 장비를 만들기도 했고, 스킬 합성으로 실험을 하기도 했으니 정작 쉰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평소 하던 것을 생각하면 널널했다. 적어도 목숨의 위협은 받지 않았으니까.
이게 참 그런 것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환경에 떨어진 것만으로도 심력이 쭉 빠져서.
“이번에는 나름 평범하네.”
주변을 슬쩍 확인해 보니 그다지 위험한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범했지.
80층대에 들어서고부터는 조금만 있어도 세기말 분위기였는데 여기는 나름 평화로워 보였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지금은 평범한 숲길이 펼쳐져 있었으니.
“사람의 흔적이 느껴져.”
시간이 흘러 곳곳이 깨지기는 했으나 포장된 도로가 보였다. 산맥도 험난하기는 했으나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곳은 아닌 거 같았고.
초인의 영역에 들어서면서 오감이 예민해진 덕에 몬스터 특유의 포악함은 예민하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적어도 근방에는 몬스터가 없다. 이제 와서는 고등급 몬스터가 나타나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6성급 몬스터도 이제 와서는 귀여울 따름이다. 그동안 상대한 게 일반적인 몬스터랑은 궤를 달리하는 놈들이었어서.
못해도 재앙. 그것도 아니라면 에이션트 몬스터나 혼돈의 파편과 연관된 놈이 아니면 그다지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
문제는 80층대 치고 그런 놈들이 엮이지 않은 곳이 없다는 거지. 이곳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다.
-타박, 타박
마땅히 드러나는 것도 없어 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찰나 알림 떠올랐다.
[87-89층 시나리오]
[용의 숨결]
“용의 숨결이라.”
난 작게 감탄했다. 용이라는 게 무엇이냐. 동양과 서양의 이미지가 다르기는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으니…….
“지상 최강의 생명체 그거 아닌가?”
“그에에.”
직접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지만 드래곤은 유명하다. 당장 헌터들에게 악명 높은 드레이크나 와이번도 드래곤의 아종으로 분류되니까.
특유의 강력한 육체도 문제지만 가장 큰 위협은 그거다, 브레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화갑룡의 비늘을 뜯기 위해 목숨을 버리고 그러지 않았던가. 80층대에서 드러난 시나리오의 이름은 용의 숨결. 영어로 따지자면 드래곤 브레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이 나타나는 곳 같은데. 이건 또 새롭군.”
굳이 따지자면 이상하지는 않다. 종족별로 타고난 강함이 다르니까. 일전에 프램버그에 있을 때도 이야기 듣지 않았던가.
탑은 등반 가능성이 있는 대상들을 초대한다고. 그에 따라 제약이 걸린다고 했었다.
당장 우리가 고등학생부터 30대까지만 불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정령계는 최하급 정령은 부름을 받을 수조차 없고 하급도 거의 못 받았다. 적어도 중급은 되어야 탑에 들어오지.
반면에 종족값이 높은 세계는 좀 달랐는데…….
‘드래곤은 헤츨링부터 들어올 수 있다고 했었지.’
헤츨링만 돼도 자그마한 마을은 없애 버릴 수 있는 종족이 드래곤이라고 했었다.
내가 보기에는 드워프도 그리 약한 종족은 아닌데 말할 때 이를 가는 느낌이었지.
별개로 이야기하자면 천사와 악마 또한 대부분 초대를 받는 편이라고 들었다. 개인 편차가 심하기는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밑바닥을 기던 이들도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는 구조라서.
작게 숨을 내쉬며 손을 털었다.
어디까지나 드래곤이 나온다는 건 예상에 불과하다. 저게 은유적인 표현인지 아니면 대명사 같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가능성에 불과하다.
“다들 어디로 떨어진 걸까.”
올라온 이들이 제법 될 텐데도 근방에 떨어진 이는 없는 거 같다.
망할 탑 같으니. 어째 한 번을 쉽게 안 가냐.
쯧, 혀를 차는 것도 잠시.
“그엑.”
덕춘이가 귀를 잡아당겼다. 나도 느꼈다.
‘뭔가가 온다. 사람인 거 같은데.’
인기척이 가까워지고 있다. 숨길 생각이 없는 건지 숨길 능력이 없는 건지는 몰라도 움직이는 방향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리저리 꺾이고는 있지만 내가 있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푸하!”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하던 찰나, 꼬맹이 한 명이 수풀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꼬맹이?
잘못 봤나 싶었지만 꼬맹이가 맞다.
‘뭐, 상위층으로 올라오면서 애가 나오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만.’
NPC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상위층에 올랐던 이들을 대상으로 꾸려지는 만큼 힘이 부족한 어린이나 노인은 비교적 적은 게 사실이었다.
70층대에 올라오고 나서부터는 시나리오를 위해 시스템이 배치한 경우도 있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최근의 일. 지금도 탑에서 어린이나 노인이 나오면 낯선 편이다.
“엉? 뭘 봐, 아저씨.”
“어허, 아저씨라니. 아직 한창인 사람한테 말이야.”
반사적으로 항변했다.
으흠. 애의 입장에서는 아저씨가 맞기는 하다. 척 봐도 아직 초등학생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10년 이상의 나이 차가 존재한다는 것. 이 정도면 아저씨가 맞기는 하지.
것보다.
[바일]
-87층의 중립 NPC.
‘중립 NPC로군.’
80층대부터는 이런 경우가 있었다. 시나리오의 무대가 되는 세계를 보다 현실감 있게 만들기 위해 설치된 NPC.
거인계에 있을 때도 그랬다. 중립 NPC라고는 하지만 나야 그렇게 보는 거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다른 NPC와의 차이점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정교한 가짜. 가짜라고 말하니 기분이 묘하군. 사실 나도 중립 NPC의 정체가 정확히 아는 건 아니라서, 그저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은 한다만.
‘따지고 보면 완전히 탑에 종속된 NPC도 시스템의 일부 아닌가?’
등반을 하면서 만난 놈 중에는 내 손으로 완전한 NPC로 만든 녀석도 있었다. 48층에서 만났던 데니엄.
호문쿨루스가 되어 헤이다와 짝짝꿍 놀고 있는 오델토와 함께 만났었다. 하도 괘씸해서 엿 먹이고 진짜 NPC로 만들었었지.
“흐음, 이 아저씨 좀 이상한데.”
“어허, 잠깐 생각에 잠긴 것뿐이야.”
내가 잠시 가만히 있자 물끄러미 날 바라보던 바일이 얼굴을 찡그린다.
꼬맹이가 말이야. 사람이 생각 좀 할 수도 있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바일을 바라봤다. 짧게 자른 머리와 척 봐도 개구쟁이일 거 같은 얼굴. 이마에 점같이 찍힌 흉터를 보아 하니 말썽 꽤 부렸지 싶다.
하기야 저 또래 남자애 중에 말 안 듣는 애들이 한둘인가.
“이블아이다.”
“난 바일. 여기서 뭐 해?”
“그러는 넌 뭐 하는데.”
도로가 닦여 있기는 해도 이곳은 산길. 어린애가 함부로 돌아다니기에는 좋은 곳이 아니었다.
몬스터는 없는 거 같았으나 산에 몬스터만 있나, 산짐승도 있고 하지.
“아, 그거 말이지. 헤헤.”
“것보다 요놈이 보자마자 반말을 하네, 이거.”
“그러는 아저씨도 반말하잖아.”
그건 그렇지.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다. 그렇다고 냅다 꿀밤을 박을 수도 없고.
말이 궁해질 때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 난 그런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부모님 어디 있어. 내가 가서 버릇없이 군다고 일러야겠다.”
“와! 치사해.”
정정당당하게 어른끼리 이야기를 할 생각.
이게 맞지. 애를 상대로 싸워 봐야 나만 바보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바일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건가. 꼬우면 본인도 이르던가.
“칫,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어.”
“어?”
살짝 침울해진 표정을 짓는 것이 내가 실수한 건가?
순간 너무 쉽게 말한 게 아닌가 싶었다. 나 역시 친인척 하나 없는 처지. 이곳은 어찌 됐든 80층대 시나리오다.
다양한 사건·사고로 가족과 생이별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괜히 멋쩍어져 할 말을 고르는 찰나.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될 테니까.”
-촤아아아아악!
땅바닥에서 열댓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덩이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건가.
호오, 이건 몰랐는데.
“하하하하! 참 쉽게 걸리는군!”
“옷차림을 보아하니 돈이 좀 있는 거 같은데. 취향은 괴이쩍지만 말이야.”
“그래도 색을 입힌 갑옷은 보통 물건이 아니지. 겁도 없이 홀로 다니다니 긴장감이 느슨해서 제명에 살겠느냐! 하하하!”
인기척을 죽이기 위해 온몸에 진흙을 바르고 옷을 껴입은 놈들이 저마다 조롱을 해 댄다.
상태가 좋지 않은 무기를 아무렇게나 쥐고 있는 것이 말로만 듣던 산적 같은 건가.
후다닥 놈들 뒤로 모습을 숨기는 꼬맹이 흘낏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처음부터 이럴 심산이었던 건가.
“허어.”
나도 모르게 작게 감탄했다.
“얼빠진 모습이 보기 좋구나!”
“흐흐흐. 너무 놀리지 마십쇼, 형님. 보는 제가 다 불쌍합니다 그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겁에 질렸다고 생각한 건지 웃음소리가 커진다.
무서운 건 아니지만 놀라기는 했다.
놈들이 매복해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거?
‘기운이 너무 약해서 무시하고 넘어가 버렸네. 이건 좀 조심해야겠다.’
여태 거인이니 상급 요정이니, 그것도 아니면 5, 6성급 몬스터나 에이션트 몬스터를 상대하다 보니 놈들에게 익숙해져 버렸다.
사람이 아무리 예민해도 그렇지 발 밑에 개미 지나가는 걸 일일이 인지하며 조심하는 건 쉽지 않은 법이다.
어떻게 한다, 이곳에 오자마자 마주친게 하필 평범한 산적이라니.
곤란하네.
“싹싹 빌면 목숨은 살려 줄 수도……!”
-퍼걱!
뭐라 떠드는 놈의 몸통을 손바닥으로 쳤다.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날아가는 녀석.
내가 움직이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산적들이 눈을 부릅뜬다.
“역시 힘드네. 살살친다고 쳤는데.”
차라리 몸이 튼튼한 놈들이면 마음 편히 두들기겠는데 이놈들은 까딱 실수하면 몸 일부가 그대로 터져 나갈 거 같다.
괘씸하기는 하다만 곧장 죽여 버리자니 직접적으로 위해받은 게 없어서. 저기, 마음에는 안 들지만 꼬맹이도 한 명 있고.
“그에에.”
“고귀한신 영물님은 구경만 해. 네가 하면 난리 난다.”
슬쩍 나서려는 덕춘이를 만류했다. 혓바닥 한 번이면 팔다리 찢어져서 날아다닐 게 분명해서 말이지.
그러니…….
“대충 몇 군데만 부러트리지 뭐.”
-퉁
-뻐걱!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차서 날 둘러싸고 있는 놈들의 정강이를 부숴 줬다.
“크하아아악!”
“자, 잘못 걸렸다! 일단 쳐!”
“저런 놈한테는 도망도 못 친다! 때려 박아!”
“제길, 운이 없으려니까!”
비명을 지르며 나뒹구는 놈이 둘.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놈들이 달려들었고.
“와 준다면 편하지. 가만히들 있어. 실수로 머리 치면 케첩 된다.”
난 정성들여 부드럽게 놈들을 마사지해 줬다.
몇 분도 안 돼 마무리된 전투. 이걸 전투라고 하는 것도 민망하다.
“이번 시나리오는 좀 만만하게 흘러가려나.”
일단 시작은 쉬운데.
그런데 왤까…….
‘이 찝찝한 기분은.’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알 수 없는 시선에 난 훽 고개를 돌렸고.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그럼 그렇지.”
시선의 정체를 파악한 난 작게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