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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07화 (506/740)

507화 그레이트 브릿지

그레이트 브릿지.

말 그대로 거대한 다리를 뜻하는 지명이다.

남부에 있는 거대한 협곡.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이라고 불릴 만큼 까마득한 높이를 자랑하는 곳에는 협곡과 협곡을 잇는 다리가 하나 있다.

말이 다리지 거의 땅을 하나 이어 붙인 거랑 같은 수준이라 낭떠러지와 연결된 거대한 다리에 자리 잡은 특이한 도시였다.

“제국이라는 이름값이 좋기는 좋아.”

“적어도 이 세상에서 황제의 이름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불러도 안 가고 이용해 먹을 건 다 이용해 먹고.”

원래라면 내가 있는 제국에서 걸어서 한 달, 말을 타고 강행군을 해도 10일은 걸리는 곳이었으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지척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제국에서 운영하는 포탈을 이용했기 때문.

물론 정상적인 포탈은 아니다. 마법사 대부분이 흑마도의 길로 돌아서며 가뜩이나 귀한 마법사가 더 귀해져서.

그나마 교단의 신성 마법사 군단과 무너진 마탑의 도움으로 일방적인 통행은 가능한데 떨어지는 위치가 부정확하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반대편에 있어야 할 포탈이 망가져서 근처에 떨구는 것.

“어디 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떨어졌군.”

품에서 지도를 꺼내 위치를 살폈다. 교단에서 준 아티팩트였는데 세상이 망하기 전에 대륙 곳곳에 위치한 신전을 통신망 삼아 꽤 구체적인 지도를 만들었다.

뭐랄까. 우리나라로 따지면 교회마다 신호기를 달아서 그걸 기준으로 만든 지도라고 해야 하나.

제국에서도 탐내 하는 보물 중 하나다. 내게 있어서는 좀 편리한 물건에 지나지 않지만.

위치를 파악한 난 대충 지도를 보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샤일이 질린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교단의 성물을 그렇게 막 다루는 건 너밖에 없을 거다. 황제도 전쟁 때마다 빌려 달라고 사정을 하는 물건인데.”

“성물은 개뿔. 신성력도 안 담겨 있구만. 내가 나름 성물에 있어서는 전문가거든.”

“가짜 신도가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진짠데. 내가 성물 약탈자로 쓱-한 성물이 몇 갠데. 모르긴 몰라도 나만큼 다채롭게 성물을 써 본 사람은 드물 거다.

가짜 신도도 여기 기준에서나 그런 거지 얼음과 불의 교단에서는 성자 소리를 듣고. 물론 이곳도 그렇고 지구도 그렇고 얼음과 불의 교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왜 가짜 신도라는 말을 듣고 성물이라 불릴 정도의 물건을 지니고 있느냐.

“어허, 이래 보여도 명예 백금 소속이거늘. 무엄하다.”

챕터가 넘어가면서 연이 생긴 교단에서 명예 신도 자격을 얻었기 때문.

이것도 내 이름값이 높아져서 생긴 일이었다. 이때를 틈타 나를 이용해 교단 홍보도 하고 내가 이룬 업적의 일부를 공유하려는 것.

첫 번째 챕터에서 신성 마법사라고 거짓말하고 다닌 것도 있어서 뭐라 할 말은 없다. 나도 교단과 연을 만들어 두면 얻을 게 있을 거 같아 동의한 거지만.

상부상조하는 관계라고나 할까?

“아, 예에. 대애애단하십니다. 신의 뜻을 사람의 눈으로 판단할 수 없다지만 정말 이상한 일이로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마기를 사용하는 자에게 이만한 신성력을 내리다니.”

뭐라 구시렁거리던 녀석이 손바닥을 탁 친다.

“그렇군. 이해했어. 마기를 줄기줄기 내뿜는 녀석이니 신성력으로 정화를 하려다 실수를 하신 게 아닐까!”

“오, 제법 그럴듯한 개소리였어.”

1년 가까이 동행하다 보니 이 녀석도 친근하게 날 대한다. 어디까지나 시스템에 의해 진행된 기억이지만.

나쁘지는 않다. 나도 불편한 놈이랑 같이 다니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아서.

그보다.

“거의 다 왔군. 선객이 있지만 알이야.”

그레이트 브릿지로 향하는 방향, 몬스터가 보였다.

검을 꺼낼 필요도 없다. 끽해야 3성급 정도. 맨손으로 찢어 버리면 되니까.

일렉트릭 쇼크로 날려 버려도 괜찮고. 챕터가 진행되면서 스킬 레벨이 꽤 올라갔다. 얼마나 강한지 시스템으로 생겨난 기억으로는 알고 있는데 직접 써 보고 싶다.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었지만.

“찢어라!”

-콰가가가각!

내가 나서기도 전에 샤일이 마법을 부렸다.

늑대의 형상을 한 바람이 앞에서 알짱거리던 몬스터를 찢어발겼다.

“후후. 이것이 대마법사 샤일의 힘이로다.”

어깨를 으쓱이는 녀석. 처음 봤을 때는 별거 없는 마법사였는데 지금은 상당한 실력에 도달했다.

그때만 해도 정령의 기운만 느껴졌지 형상화되지는 않았었는데 지금은 정령의 성질을 그대로 가져와 쓰고 있다.

정령술사가 아니라 정령 소환은 못 하지만 오히려 이편이 낫다. 전투 중에 정령이 다쳐 역소환될 일도 없고 시전자의 부담도 적은 편이라.

‘어째 나도 모르게 마법에 대한 지식이 늘었군.’

시나리오가 이게 문제다. 멋대로 기억이 생겨나니 나도 모르게 그 세계에 맞는 지식이 쌓이는 것.

나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스킬을 쓰지 않더라도 마력을 이용해 비슷한 것을 할 수 있게 됐다. 여전히 스킬보다 실용성이 없어서 쓸 일이 없을 뿐이지.

어떻게 보면 좋은데 나쁘게 보면 정체성에 혼란이 오기 딱 좋다.

나야 정신 보호가 있어서 상관이 없다만 최근 들어 상위층을 오르고 있는 연합 사람 중에 정신적으로 혼란이 찾아온 이들이 좀 있는 거 같아서 걱정이다.

‘모르겠군. 일단은 문제가 생긴 거 같으면 탑 밖으로 나가는 것을 추천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받아들이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이준석과도 이야기를 나누어 봤는데 당장은 강제적으로 조치를 취할 방법은 없다.

애초에 그런 권한이 내게 있지도 않고 당사자는 자신의 정신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몇몇은 증상이 심해져서 동료를 공격하거나 낯선 말투를 쓰고 행동하는 등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이건 또 다른 위험이군.’

다행히 멤버들을 비롯해 오징혁과 김소담은 괜찮은 거 같다만 79층에 오래 머물렀던 상위 헌터들만 하더라도 사회적인 문제가 생겼다.

탑에 머문 시간이 너무 오래돼서 밖으로 나가는 걸 무서워하니까.

밖으로 나가면 확실히 좋은 대우를 받으며 도움이 될 사람들이지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엇나가면 어떻게 될지 나도 확신이 안 든다.

이 사람들도 그럴진대 나보다 위에 있을 상위 헌터들은 어떤 상태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 스타트가 오징혁이 될 거고.

‘시나리오가 끝나기 전에 오징혁을 봐야겠어.’

87층까지만 해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생각했지만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최대한 지원해 줄 수 있는 건 다 지원해 줘야겠다. 그래야 나중에 녀석보다 높은 층에서 나온 헌터가 있더라도 커버할 수 있지.

아무튼 이건 여기까지 생각하도록 하고.

“들어가자.”

나와 샤일은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협곡 위에 위치했기 때문인지 바람이 매서웠지만 나도 그렇고 녀석도 그렇고 이 정도는 끄떡없었다.

오히려 녀석은 미미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는데.

“그레이트 브릿지는 오랜만이야.”

“와 본 적이 있나?”

“예전에. 내 고향이 이곳과 멀지 않은 곳이거든. 그때는 여기가 가장 큰 도시인 줄 알았어.”

“가자고 할 때만 해도 싫다고 난리더니.”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자 녀석이 빨리 오라며 손을 까딱인다.

“그때는 여긴지 몰랐고. 그거 아나? 이곳만의 명물이 있다는 거. 고기랑 빵을 같이 파는 게 있는데 이게 또 그렇게 맛있다고. 맞다 맞다. 저기 옷가게 거리에서 꺾으면 웬 저주 물건 판다는 곳 있거든? 다 구라야. 어린 애들 겁주고 안 사면 저주 걸린다고 강매하고. 왜 속았나 모르겠어.”

추억에 잠긴 듯 녀석이 큭큭거리며 웃더니 발을 재촉한다.

고향은 파괴된 지 오래. 그나마 추억이 남은 곳으로 가니 기분이 좋은 거 같다.

다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아.”

거대한 다리 위로 세워진 도시.

원뿔형으로 솟아오른 도시는 반쯤 부서져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본래 장엄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성벽 또한 급하게 수리한 티가 역력했으며, 교역로를 중심으로 성장했던 도시는 척박한 환경에 노출되어 병들고 있었다.

도시 입구,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갑옷을 두른 채 통일되지 않은 무기를 쥔 병사가 우리를 힐끗 쳐다봤다.

별다른 관심도 없는 표정. 그저 따분한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근처에 다가가자 별다른 말도 없이 손을 내민다.

별생각 없이 증명패를 보이자 인상을 팍 찡그리더니 창대를 바닥에 친다.

“뭐 하자는 거야?”

“신분을 확인하려는 거 아니었나?”

“하아. 언제 적 이야기를. 이거 원, 진짜 구석에 박혀 있다가 넘어온 사람인가.”

위아래로 우리를 훑던 병사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얼굴에 피로와 짜증이 묻어난다.

“들어가고 싶으면 대가를 줘야지.”

“금화면 되는 건가.”

“그딴 건 필요 없어. 들어가는 데 흰 빵 2개, 흑빵 4개. 그것도 아니면 고기도 나쁘지 않아. 말린 고기면 더 좋고. 술이면 내가 안쪽까지 안내해 주지.”

그의 설명에 샤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병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명확했다. 화폐조차 가치를 잃을 정도로 도시가 몰락했다는 것.

바꿀 수 없는 금화보다 음식, 신용보다는 물물거래로 도시가 굴러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이곳은 제국의 손이 거의 닿지 않는 곳이었고, 멸망에 다가갈수록 인류의 역사는 퇴보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입술을 달싹이는 샤일의 앞으로 나서며 보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가족이 있나?”

“어머니, 동생 셋.”

“남들 몰래 챙겨.”

난 식량이 담긴 보따리를 그의 옆에 놓았다.

경계도 잊고 보따리를 열어 본 병사의 눈이 커진다.

깨끗한 물과 신선한 채소. 약간의 조미료와 생고기. 그 외에도 자잘한 주먹밥과 말린 생선이 함께 들어가 있다.

“여, 염치없는 말입니다만 혹시 약도 있습니까? 어머니가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뱉습니다. 원하시는 게 있다면 제가 무슨 짓을 해서도…….”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굽힌 병사가 손을 내민다. 허리가 점점 구부러지더니 무릎이 땅에 닿았으며 고개는 바닥을 향했다.

난 말 없이 그의 손에 포션을 얹어 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려는 샤일의 등을 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금 느낀 거 잊지 마라. 보고 있는 것도 잊지 말고.”

멸망에 다가가는 세계를 너무 많이 봤다.

같은 목적을 가졌지만 난 언제나 한 발 떨어져 있다. 어디까지나 이 세계는 재현된 것이고 난 이 세계를 지나 위로 올라야 하는 사람이니까.

진짜 멸망에 다가가는, 탑 바깥 세계의 사람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살아가는 NPC는?

‘황량하다.’

바람 소리만 들리는 거리. 창문이 깨지고 문이 부서진 건물들이 가득한 공간, 인기척은 없었고 깨진 타일이 이어진 도로에는 냉기만이 감돈다.

골목에 싸지른 인분이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구워 먹은 것을 보이는 쥐의 뼈와 잿가루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닌다.

해가 지며 짙게 깔린 노을. 그림자만이 길게 이어져 도시를 집어삼키고.

한동안 말없이 발을 옮기던 샤일이 입을 열었다.

“…이블아이, 나도 용사가 될 수 있을까?”

도시 중앙, 과거에는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을 성을 보며 샤일이 중얼거렸다.

상위층에 있는 NPC라면 가능성이 있다. 멸망에서 벗어나 크나큰 역할을 한 자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생기니까.

내 눈에는 보인다.

[샤일]

-중립 NPC.

-무너진 마탑 소속입니다.

우뚝. 멈춰서 녀석을 바라봤다.

샤일 또한 태양을 등지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찰나의 정적.

“될 수 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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