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8화 헤렐다
내가 그레이트 브릿지에 온 이유는 간단했다.
드래곤에 대한 이야기와 게드릭으로 추정되는 군단장을 없애기 위함.
물론 이것 말고도 크고 작은 사고는 계속해서 일어났다. 두 번째 챕터로 넘어온 시점에서는 악명을 떨친 마족과 흑마법사가 수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고.
멸망을 앞당기는 존재가 차고 넘친다는 거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세계가 버티고 있는 이유는…….
‘영웅들.’
뭉뚱그려 말하기는 했지만 이게 맞다.
지금 상황에서 실력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많지 않다. 탑의 초대를 받은 이들도 있었으나 높은 곳까지 올라간 이는 많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니까.
이상하지는 않았다. 당장 지구도 대격변을 겪은 지는 10년이 훌쩍 넘어갔지만 아직도 탑 밖에서는 60층대에 들어선 이가 가장 높이 올라갔던 이니까.
대형 길드와 정부의 계략이 있었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높은 층에 오른 이들이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여기도 비슷하지 않을까. 아니지, 어쩌면 더 심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각성자의 양극화. 아예 제대로 못 올라갔든가, 높이 올라갔든가.
‘이미 탑의 초대는 끝났어.’
이번 시나리오의 배경이 되는 세계에서 마지막 탑의 초대는 6년 전.
여전히 탑을 오르고 있는 사람도 존재할 수 있었지만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웃기는 노릇이다. 상위층에 도달한 자가 많지 않아 멸망의 속도가 늦어졌지만 그 결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사람의 수는 한계가 있었으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기기에는 내가 있는 세계와 닮은 점이 많았다. 이곳에 마법과 오러가 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말이지.
처한 상황이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듣자 하니 지구보다 초대받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도 있고.’
정확히 말하면 파악이 안 되고 있다.
초대받았다 하더라도 지구와 달리 통신망이 갖춰지지 않은 곳이니, 별다른 준비 없이 끌려갔다가 허무하게 밖으로 나온 이들도 적지 않을 거다.
적어도 지구는 잘못된 공략법을 알려 주었을지언정 몬스터나 게이트, 온갖 괴물에 대한 정보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이런 꼴임에도 여전히 세계가 망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영웅, 혹은 용사라고 불릴 만한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
소수의 인원으로 지켜지는 평화, 미루어지는 멸망. 이게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상황은 그리되었고 난 그 바탕에서 해결을 봐야 했으니까.
“안으로 들어가 보자.”
“어, 으응.”
잠시 멍을 때리던 샤일이 고개를 끄덕인다.
완전히 초행길인 나보다는 어릴 때 이곳을 와 봤던 샤일이 그나마 아는 게 많을 거다.
‘그것도 그리 믿음직스러운 정보는 아니겠지만.’
샤일이 충격을 받은 것도 그 때문 아니던가.
생기를 잃고 무너져가는 건물은 몬스터가 창궐하며 많은 것이 바뀌었음을 암시했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는 이유?
특별한 사명감이 있거나 한 건 아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이 막혔기 때문이겠지.
그게 몬스터 탓인지, 지형적인 변화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에이션트 몬스터가 등장하면서 생긴 문제이기도 했다. 이미 겪지 않았던가. 끊임없이 몬스터를 쏟아내는 특이한 게이트, 그 안에는 에이션트 몬스터가 있음을.
처음 생성된 이후로 그 자리를 지키기 때문에 잘 피하기만 한다면 당장은 문제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계속해서 생성된 몬스터 때문에 결국에는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한다.
같은 이유로 잃어버린 인류의 영역도 제법 되고.
‘지금은 그보다 더한 문제들이 있지만 말이지.’
인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내가 지구의 전 세계를 커버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니까.
“거기 처음 보는 얼굴인데 와서 놀다가!”
“싸게 대접해 주지. 먼 길 왔을 게 뻔한데 피로는 풀어야 하지 않겠어?”
“저런 데 가지 말고 일로 와. 그런데 가 봤자 썩기 직전인 고기밖에 없으니까.”
“뭐어? 그냥 말이라고 막 뱉는구나!”
우리가 이방인임을 알아차린 이들이 나와 호객 행위를 한다.
상권 자체가 고립되었다. 대부분의 장사는 그레이트 브릿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다만 내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한 여인.
[헤렐다]
-중립 NPC.
-비밀스러운 진실에 가까운 자.
-한쪽 눈에 금안을 품은 자, 세상의 편린을 살피리라.
난 설명에 집중했다. 비밀스러운 진실에 가깝다라.
중립 NPC임에도 이런 설명이 붙은 사람이 있었던가.
‘이번 시나리오에는 일반적인 NPC가 거의 없어.’
대부분이 중립 NPC다. 소수의 영웅들로 멸망을 견뎌낸 세계인 만큼 당연한 일이기는 했으나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탑에 맞춰 시련을 준다.
어떤 식으로든 공략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준다는 것.
헤렐다도 그런 NPC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 타이밍.
“헤렐다?”
샤일이 먼저 움직였다.
구면인가, 자세히 보니 그녀 역시 우리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샤일만을 보고 있었다.
깔끔하지만 여러 번 꿰맨 흔적이 있는 옷. 왼쪽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한쪽 눈이 가려져 있다. 그녀가 후드를 벗었다.
“오랜만이네.”
“헤렐다!”
샤일의 분위기가 묘하다. 분명 이곳에 온 건 최소 10년은 더 된 거 같은데.
어릴 때 만났더라도 얼굴을 잊기 충분한 시간이다. 하물며 그 기간 동안 온갖 일을 겪은 후에 마주쳤을 때는 과거의 기억도 흐려지기 마련이고.
그렇다는 것은…….
“내 편지 받았어?”
“…아니.”
“난 계속 보냈는데! 날 데리러 온다면서!”
어릴 때 이후로도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헤렐다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샤일을 바라보더니 눈물을 터트렸다.
편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진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이건 당사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였다.
“변명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될 건 알고 있었어.”
조금은 체념한 듯한 말. 샤일이 어쩔 줄 모른다.
아무래도 진짜 소식이 끊긴 거 같은데.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 녀석은 무너진 마탑에 속해 세계 곳곳에 마련된 은거지를 돌아다니며 살았던 녀석이니까.
당장 표정만 봐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 같고.
기억에 났던 거라면 진작에 말했을 거다. 그레이트 브릿지에 간다는 말을 듣고는 흥분해서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댄 녀석이니까.
그녀가 뭐라 말하기 전에 먼저 앞으로 나섰다.
“이블아이라고 합니다. 샤일의 동료이자 제국과 함께하는 무너진 마탑의 핵심 일원과 동행하는 영광을 누리고 있죠,”
어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샤일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더군요. 그레이트 브릿지에 인연이 있다고.”
“정말인가요?”
“예. 머리카락 너머의 금안이 매력적이라는 말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나의 말에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던 헤렐다가 샤일을 향해 새침하게 고개를 든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샤일이 경악했지만 그건 알 바 아니었다.
“아니, 나는…….”
“지금도 샤일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무너진 마탑에 받은 임무가 막중해 수시로 거처를 옮기며 활동하고 있죠.”
샤일 녀석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을 이었고.
“제가 방해를 하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아, 아뇨! 그렇지 않아요!”
고개를 푹 숙이자 헤렐다가 손사래를 친다.
샤일 또한 입을 벌리며 나를 바라보더니 입술을 씹고 헤렐다에게 손을 내민다.
“늦었지만 약속을 지키러 왔어.”
“내가 보낸 편지 내용은 모르겠네요.”
“그건, 미안. 보지 못했어. 내가 준 수정구는?”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예요.”
단순히 편지만 보낸 게 아니라 통신구도 줬던 건가.
얘도 정상은 아니네. 마법사 대부분이 흑마법사로 전향한 상황에서 제국과 협력하는 통신구는 흑마법사의 최우선 약탈 대상 중 하나였다.
제국의 움직임을 알아야 그를 피해서 수작을 부리던 하니까.
살짝 혀를 찬 것도 잠시, 그녀가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디까지 받았죠? 혹시나 연락을 받지 못할까 봐 편지는 항상 여러 장을 써서 보냈어요. 상인의 발걸음이 끊긴 이후에는 마편으로, 이후에는 전서구로.”
헤렐다가 의외의 말을 전했다.
영리하다고 해야 하나. 이 시대에 먼 거리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은 많지 않다.
목적지가 같은 상인의 손을 빌리거나, 우체부 비슷한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그것마저 몬스터나 천재지변으로 길이 끊기면 전서구를 보낸다.
적어도 하늘은 육지보다 제한이 적으니까. 수정구야 말할 것도 없고.
‘잠깐, 수정구가 있다는 건 적어도 마법사로 어느 정도 활약을 했을 때 줬다는 건데.’
단순히 연심으로 그것을 줬을까?
그럴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상황에 따라서는 말도 안 되는 힘을 내는 법이니까.
아니, 그렇다 치더라도 무너진 마탑에서는 허락하지 않았을 텐데.
“창궐하는 언데드. 수많은 용사. 그 안에 모습을 숨긴 진짜 희망. 여기까지였어.”
샤일이 중얼거렸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내가 혼령탑에 갔을 때 미리 준비하고 있었지.
내가 진짜 용사인 걸 확신하고 있었고, 그 외에 자질구레하게 마족이니 흑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무너진 마탑이 제공한 정보를 전달하는 줄 알았는데.
‘설마 이 사람이 알려 준 거였나?’
권능으로 확인한 정보도 그런 뜻이었고?
미래의 편린을 볼 수 있다는 건가. 한마디로 예지. 가뜩이나 소수의 영웅들로 사전에 위협을 없애야 하는 지금,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의 가치는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왜 이런 사람을 여태 방치하고 있었을까. 무너진 마탑. 아니, 제국에서도 영입하기 충분한 것인데.
“다리 위의 미친 사람. 그게 한둘은 아니었지만 내가 될 줄은 몰랐는데. 난 아직도 그림일기를 써. 너에게 보여 주고 싶어. 옆에 분에게도 괜찮으면 보여 주고 싶고. 같이 일하는 거 맞지? 무너진 마탑 최고의 꿈 해석자잖아, 샤일. 너밖에 없잖아. 내 말을 들어 주는 건.”
그러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는 건 금방이었다.
평소에도 샤일과 만날 날을 고대하며 품에 가지고 다녔던 걸까, 양피지와 종이, 누가 쓰다 버린 것으로 보이는 양면지에 휘갈기듯 그린 그림으로 가득한 뭔가를 내민다.
남이 보기에는 낙서. 하지만 샤일에게는 그러지 않아 보였다.
“너무 무서웠어.”
종이 뭉치를 안은 헤렐다가 샤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정령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 무너진 마탑의 일원.
그리고 꿈 해석자.
샤일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미안해.”
* * *
조금은 어색한 회우를 마친 후, 난 폐가나 다를 바 없는 공간에서 샤일과 단둘이 마주했다.
헤렐다가 건네준 종이 뭉치를 바닥이고 벽이고 여기저기 다 붙여 둔 상태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헤렐다는 예언가야. 정확히 말하면 반쪽이지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마탑에서도 제국에서도 인정하지 않아.”
설명은 간단했다. 헤렐다는 꿈을 통해 뭔가를 본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무의미한 환상과 다를 바 없지만 샤일의 눈에는 달랐다.
이미 한 차원의 벽을 넘어 정령과 계약한 자. 이어 어릴 때 만나 연락을 주고받았던 헤렐다와 이어진 유대감. 거기에 마법적, 정령학적인 지식이 쌓인 샤일이 형이상학적인 꿈의 영역을 공부하게 되자…….
‘꿈을 해석할 수 있게 됐다 이거지.’
이제야 알겠다. 무너진 마탑이 아무리 영세했다고는 했지만 내가 처음 만났던 샤일은 마법적인 능력이 일천했다.
그럼에도 용사로 추정되는 내게 전면으로 내세운 이유는 하나.
‘그동안 헤렐다와 연락하며 해석한 미래에 대한 정보를 믿고,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야.’
이마저도 정확한 건 아니었겠고, 애초에 관련해서 실적이 있었으면 대우를 받았겠지.
샤일이야 나를 만나게 될 것을 믿고 대기하고 있었겠지만, 마탑은 그저 근처에 있던 샤일을 보낸 것뿐이었다.
마탑 기준에서는 보기 드문 정령 마법사를 안고 가면서 잡다한 일을 맡기려고 했겠지.
미간을 찌푸렸다.
‘헤렐다가 본 미래가 너무 뒤에 일어날 일이었어.’
당연히 그 전에 일어날 일을 몰랐으니 신뢰 자체가 안 생겼을 거다.
이제야 나라는 존재가 나타났고, 헤렐다의 말이 맞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었으나 이것도 지금의 일. 그동안 지나간 세월은 누구도 보상해 주지 못한다.
아니지. 보상해 줄 방법은 있다. 지금이라도 그 가치를 인정받으면 되니까.
“샤일, 좀 알겠어?”
“기다려 봐. 나도 오랜만에 하는 거야.”
뚫어져라 헤렐다가 준 종이와 양피지를 바라보던 샤일이 손뼉을 쳤다.
“아.”
뭔가를 통달한 듯 소리치는 녀석.
샤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죽음의 군대.”
가까이에 있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목소리로 녀석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