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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53화 (553/740)

553화 등장할 타이밍

생각을 해 봤다. 어떻게 해야 혼돈의 파편을 불러들일 수 있을까.

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찾아내자니 놈을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름도 불명이요, 적어도 91층에서는 권능도 제한이 걸리니.

방법은 하나. 직접 나서도록 판을 짜는 것.

“잘한다, 잘해.”

난 마그마 요정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미 몇 시간째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지금 마을에 잠을 자고 있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지. 이 난리가 펼쳐지고 있는데. 속 편히 잘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낮 소속 인원들이 힘을 합치기 위해 모였으며, 밤에 속한 이들도 공격을 쉬지 않고 이어 나가고 있다.

그뿐인가. 전장에 합류하려는 낮 소속 인원들을 잡아내기까지.

이 부분이 가장 문제였다. 중간에 잘라먹히면 아무래도 전력에서 크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서.

게다가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봤을 때 밤에 속한 이들이 더 많다. 며칠동안 여럿 잡아서 지금은 수가 엇비슷한 것도 같았지만 여전히 놈들의 수가 더 많다.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은 간단하지.”

밤 소속인 척하면서 놈들을 해치우는 것. 놈들이 우리를 잘라먹는 것처럼 나 또한 놈들을 하나둘 처리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방식이다. 달리 말하면 적진 한가운데에서 정체를 숨기고 날뛰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목격자가 한 명이라도 살아 도망친다면 그때부터는 내가 당한다. 한순간에 포위당해서 공격받을 테니.

그런 만큼 신중하게, 확실히 처리할 수 있는 놈들만을 노렸는데.

“놈들도 대충 눈치챈 거 같지?”

“그에에.”

내 물음에 덕춘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놈들도 이상하겠지. 진작 합류했어야 할 동료들이 안 오고 있는데. 낮 소속 인원들에게 당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것도 한두 번 아닌가.

이상을 느낀 놈들이 조를 이어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다. 경계를 하며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제거하고 같은 밤 소속은 합류시킨다.

저렇게 움직이고 있으면 건드는 것도 부담이기는 하다만.

‘좀 더 흔들어야 돼.’

힘들어도 해야 한다. 아직까지도 혼돈의 파편으로 보이는 놈은 없었으니까.

여러모로 짜증 나는 녀석이다. 다른 혼돈의 파편들은 지들이 날뛰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이 녀석은 모습을 숨기기나 하고.

느낌상 혼돈의 파편이기는 하지만 재앙과 같이 움직이는 녀석이다.

규칙을 정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덕분에 혼돈의 파편도 스타일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생기는데.

“혼돈의 파편은 자신이 만든 규칙을 어겼을 때 어떻게 되려나.”

재앙은 자신이 만든 규칙을 어기면 스스로 무너졌었는데, 추월을 허용하지 않은 쌍두귀가 그랬었다. 옥토선생에게 졌었던 영물.

과연 이번 녀석은 어떨까.

그거야 확인해 보면 알게 되겠지.

“판을 더 크게 만들어 보자.”

한두 명씩 자르는 것도 좋다. 기껏해야 40명 정도 규모의 마을이다.

이미 인원은 절반 가량으로 줄었다. 달리 말하면 이제 어지간한 인원들은 서로의 정체를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것.

“낮 소속 인원도 많이 죽었어.”

못해도 7명은 넘게 죽었다. 그리고 낮 소속 사람들은 최대 밤에 당한 사람의 숫자만큼 낮 동안 처형대에 상대방을 올릴 수 있고.

낮이 되면 사실상 끝이라는 거다. 밤 동안 싸웠던 놈들을 처형시키면 그만이니까.

밤 소속 인원들도 필사적이다. 오늘 밤 끝을 보지 않으면 죽는 건 본인이었으니.

수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여러 사람이 죽었다. 그나마 살아남는 사람이 있다면 마을이 아닌 밖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 정도.

최악의 경우가 이거다.

사실 혼돈의 파편은 마을에 있지 않았고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있을 가능성.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서 걱정되기는 하다만 그럴 거 같지는 않았다.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오랫동안 게임을 즐기고 있는 녀석이야.’

혼돈의 파편을 이루고 있는 2개의 개념.

델버튼이 역병과 도박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이곳에 있는 놈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것이 규칙이 되어 진행되는 것이 게임이고.

게임의 중심에 있으면 있었지 결코 벗어나 있지는 않을 거다. 그것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행위였으며,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혼돈의 파편도 이 부분에 있어서는 명확했으니.

놈은 이 자리에 있다.

그리고 개판이 되어 끝나게 될 게임을 뒤집을 수 있는건…….

“본인밖에 없지!”

-콰아아아악!

골목을 돌며 마을을 뒤지고 다니는 밤 소속 녀석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총 3명.

당황했는지 멈칫거린 녀석의 목을 베어 내고 옆에 두 녀석에게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강렬한 폭발과 함께 일대가 박살 났지만 놈들도 보통은 아니었다. 적이라는 것을 인지하자마자 몸을 날렸고.

-차아아앙!

-카앙!

예상할 수 없는 각도로 날아온 쇠사슬과 단검이 나를 덮쳤다.

빠르게 검으로 쳐 냈다. 아쉽게도 기습으로 한 명밖에 못 해치웠다. 2명 정도는 해치우고 싶었는데.

“네놈이었구나!”

“어째서 소속이 뜨지 않는 거지? 설마 배신자냐!”

저마다 목청을 높이며 무기를 겨눈다. 내게 쌓인 게 많아 보이는데.

“이제 와서 뭐가 중요하겠어, 응? 그리고 말이지 왜 다들 나보고 뭐라 하는지 모르겠네.”

빙글 검을 돌리며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너희가 하는 행동도 그리 정의로운 건 아니잖아? 서로 죽고 죽이고. 정작 이 망할 게임을 만든 녀석을 찾으려는 행동은 없지.”

아직도 궁금하다. 어째서 이들은 이리도 순종적일까.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하는 불합리한 게임에 참여하면서도 근본적인 원인을 없애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까.

이유는 많을 것이다.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것도 있고, 어차피 너희는 위로 올라갈 게 아니니 편히 쉬고 싶을 거야. 이게 쉬는 거 같지는 않다만서도.”

등반가과 NPC의 근본적인 차이.

그들은 갈 곳이 없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탑이 곧 살아가는 터전이라는 것.

이곳은 91층. 탑의 최상단 중 하나.

모든 층은 등반가가 와야 시련이 시작된다. 그전까지는 아무런 일도 걱정도 없다는 것.

그저 이번에 찾아온 등반가가 떠날 때까지 몸을 사리면 그만이다. 그럼 다시 평화가 찾아올 테니까.

굳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 없다는 거다. 그러다 죽으면 자신만 손해일뿐더러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이해한다. 그럴 수 있지. 나쁜 선택은 아닌데.

“난 잘 모르겠어.”

내가 등반가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성격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런 걸까.

그냥 혼돈의 파편이라는 놈이 하는 짓이 아니꼬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스스스스스

전투를 앞두고 말이 너무 많았다.

이러나 저러나 저지른 일. 끝은 봐야 했다.

상대방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구태여 입을 열지 않고 무기를 고쳐 쥐었으며.

-카아아아앙!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향해 격돌했다.

2 대 1. 머릿수로는 내가 불리하다. 소란이 커지면 이쪽으로 시선이 쏠릴 테니 더 위험해지겠지.

‘확실히 강해.’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전력 파악을 잊지 않았다.

궁금했다. 90층대. 등반가가 오를 수 있는 한계나 다를바 없는 곳. 그것에 있는 NPC들의 전투력과 등반가의 전투력은 비등할까?

90층대를 올랐던 NPC들을 여럿 봐 왔다. 말도 안 되게 강하다. 내가 겪어 온 이들만 보더라도 그러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 또한 결코 약하지는 않겠지.

NPC는 등반가보다 강하다. 저층일수록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허나 지금은?

“크흡!”

“제기랄, 알고는 있었지만 만만한 놈이 아니야.”

둘을 상대하고 있음에도 질 거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그럴 거 같았으면 이런 작전은 시작도 하지 않았지. 여럿을 상대하는 것을 기본 조건으로 가져가는 계획인데.

강해진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 이곳에 올라온 이들 모두가 그러하다.

어쩌면 이곳에 있는 이들이 비교적 약한 걸지도 모르겠다. 91층은 90층대에 있어 가장 낮은 곳이니까.

위로 올라갈수록 수준이 높아진다. 더 강한 적이 등장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들 또한 비례해서 강해진다.

특히나 이곳은 정상을 오르는 마지막 구간. 층마다의 격차가 더 크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한마디로.

“너희한테 막히면 위로는 절대 못 올라간다는 거야.”

-촤아아아악!

강력하기 짝이 없는 스킬들을 뚫어 내고 정면에 있던 녀석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대로 횡으로 강하게 휘둘렀으니. 그대로 상체가 날아간 녀석이 쓰러졌고, 망설임 없이 옆으로 파고드는 놈을 향해 오로라 빔을 쐈다.

아무리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단순한 경로의 공격이라지만 코앞에서 그것도 광범위하게 쏟아진다면 피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쿠르르릉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땅속으로 몸을 숨겨 피하려 했으나.

[어스 월(S) Lv.10+]

“크하아아아악!”

바로 놈 아래에 흙의 벽을 세워 다시 위로 올려 버렸다.

오로라 빔에 적중당하며 몸을 비트는 것도 잠깐이다. 놈의 앞뒤·좌우 4방향에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다음으로 위아래로 2방 더.

구사일생과 같은 부활 스킬이 있을 것을 염두에 두고 시간차로 폭발을 날렸다.

반응을 보니 딱히 그런 건 없는 거 같았지만 확실해서 나쁠 건 없겠지.

“이걸로 3명. 꽤 시끄럽게 싸웠는데도 지원 병력이 오지 않는다라.”

이것이 의미하는 건 간단했다.

내가 있는 곳까지 전부 커버할 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

지금 뭉쳐 있는 낮 소속 인원이 대략 6명. 공격하고 있는 밤 소속 인원이 대충 8명 정도.

아마 이게 마을에 남은 인원의 대부분이 아닐까 싶다.

당장은 놈들이 좀 더 많은 머릿수를 가지고 있지만 내가 합류하면 어떻게 될까?

7 대 8.

별로 차이도 나지 않는 숫자였고 난 외부에서 들어오는 입장이다. 딱 한 번 정도는 놈들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이야기.

단번에 전세가 뒤집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내가 전장에 합류하는 순간이 혼돈의 파편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타앗.

가볍게 발을 박찼다.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다. 며칠 밤을 새우고 제대로 된 휴식도 없이 전투를 벌였으며,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고 신경을 세우고 있었으니.

마력은 여유가 좀 있었으나 체력과 정신적인 피로도는 그리 좋지 않았다.

건물 지붕을 발판삼아 앞으로 달렸다. 마그마 요정을 비롯한 낮 소속 인원들이 보인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나도 고생하기는 했지만 정면 대결을 지속해 온 건 그들이니까.

악으로 깡으로 버티고는 있었지만 한 명이라도 낙오하는 순간 우르르 무너질지 모른다. 그만큼 위태로웠으나.

“으아아아! 이블아이 언제 오냐!”

“버텨! 굳이 죽어라 안 싸워도 돼! 아침이 올 때까지만 버티면 이긴다고!”

“이제 1시간도 안 남았다! 시간은 우리 편이다!”

투지만큼은 살아 있었다. 피로에 찌든 것과는 달리 눈에는 희망이 엿보인다.

과격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성공적으로 마무리가 되어 간다는 것을 아는 거겠지.

반대로 밤에 속한 이들은 조급해했고, 어떻게든 방어선을 무너트리기 위해 집요하고도 악랄하게 공략을 해 나갔다.

모두가 몰입해 있는 상황.

사람은 어딘가에 몰두했을 때 시야가 좁아진다.

“기습하기 가장 좋은 시점이라는 거지.”

놈들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오로라 빔.

허공에 생성된 오색 광선 수십 개가 한 번에 쏘아진다. 가공할 만한 기세. 빠른 속도. 뒤늦게 공격을 감지한 이들이 방어를 하려 했으나.

“왔구나!”

[용암 덮기(SSS) Lv.3]

마그마 요정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부르르 몸을 떠는 것 같더니 전신에서 용암이 폭발하듯 쏟아졌고, 땅이 갈라지며 뿜어져 나온 마그마가 해일처럼 놈들을 덮쳤다.

시뻘건 용암이 빛과 열기를 내뿜으며 일대를 잠식하는 광경은 내가 봐도 소름이 돋는 풍경이었으며.

“이런, 제길.”

“아직도 저럴 힘이 남았다고?”

당하는 놈들 입장에서는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앞에는 용암이 뒤에는 오로라 빔이. 피할 곳도 막을 방법도 없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와 마그마 요정을 바라보던 녀석들이 이내 공격에 받는 순간.

“아, 이런 그림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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