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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591화 (591/740)

591화 옛말 하나 틀린 게 없다

살다 보면 억울할 때가 있다. 선의로 했던 말이 돌고 돌아 거짓말이 되거나, 분명히 했는데 알 수 없는 오류로 작동이 되지 않는다거나.

지금도 비슷한 느낌이다.

“저 새끼 잡아!”

“저놈이 말하는 건 듣지도 마라!”

억울하네. 분명 친절하게 어딜 공격할지도 알려 준 거 같은데.

이래서 뱀파이어가 욕을 먹는 거 같다. 나처럼 성실하고 진실되게 살았으면 어딜 가서도 환영받았을 텐데.

“그에에?”

덕춘이가 의문을 표했으나 무시했다. 양서류의 조그마한 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등 사회의 일이었으니까.

-텁

“아야야. 물론 우리 덕춘이는 영물이니까 다 알지. 그러엄.”

일단 목부터 잡고 보는 덕춘이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손도 조그마한 녀석이 힘이 왜 이리 셀까. 나도 분명 강한데 덕춘이는 혼돈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상식 밖의 힘을 내고는 한다.

그 힘이 주로 내게 발산돼서 문제지만, 어쨌든.

-서걱!

“크하아아악!”

또 한 놈의 목을 베어 내고 앞으로 슬라이딩했다.

내 머리가 있던 위치로 스쳐 지나가는 손톱. 피를 뿜어 길이를 늘렸는지 1미터가 넘는 길이다. 그 예리함은 말할 것도 없고.

‘의도한 대로 됐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위협적인 일격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애먼 곳에 구멍이 뚫릴 지경이었으나 난 오히려 웃었다.

내가 유도한 건 난전. 서로가 뒤엉켜 싸우는 것이었으니까.

비록 난 혼자 싸우는 거라 객관적으로 보면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면서 싸우는 거였지만.

‘진형은 유지될 때 힘을 발하지.’

지금처럼 진형이 붕괴됐다면 개인과 개인. 많아 봐야 서너 명과 싸우는 게 전부였다.

특히나 이렇게 뒤엉켜 싸우면.

“커헉!”

“같은 편을 찌르면 어떻게 해, 멍청한 녀석아!”

“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실수로 아군을 공격하기도 한다.

내가 일부러 붙잡은 녀석을 방패로 쓰기도 하고 말이다.

적들은 아군을 공격할까 조심스러워지며 동시에 깊게 파고들다가도 뒤에 있는 동료가 찌르지는 않을까 의심하게 된다.

믿음으로 만들어진 협공이 역효과를 낸다는 이야기.

그에 반면에 나는.

-콰아아아아아앙!

-콰과과과광!

제대로 조준할 것도 없이 전 범위로 폭발을 일으켜 댔다.

애초에 일대를 날려 버리는 것이 폭파 스킬의 장점이자 단점 아닌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이 근처에 없다는 건 내 마음껏 불길을 쏟아 내도 된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손쉽게 녀석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고.

“제기랄, 일단 거리 벌려!”

“놈의 의도에 휘말리면 안 된다!”

뱀파이어들 역시 실전 경험이 있었기에 뒤늦게나마 나와 거리를 벌렸다.

그래 봤자 피해가 막심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없앴군.’

이 정도면 거의 3분의 2는 치운 거 같은데.

쉴새 없이 움직이며 가빠진 숨을 골랐다. 거리를 벌린 덕분에 나도 쉴 시간이 생겼으니까.

한 덩치 하는 뱀파이어들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프렐다와 자할.

-기이이이잉!

-쿠구구구구구궁!

둘이 격돌하고 있다.

본신의 무력과 기어의 힘으로 자할과 대등하게 맞붙는 프렐다.

그동안 기어에 몸을 적응시키던 걸 마쳤는지 움직임이 부드럽다. 물론 큰 걸 한 방씩 터트릴 때마다 대미지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래가면 불리하겠군.’

시간이 지난다면 상황은 역전이다.

몸에 부담이 될 정도의 출력을 가진 무기를 펑펑 써 대는 만큼 피로 누적이 빠를 테니.

그전에 내가 합류해야 한다.

-키릭

검을 고쳐 쥐었다. 놈들의 피가 흘러내려 끈적이면서도 미끌거리는 감촉. 손아귀에 힘을 더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녀석들.’

당하면서도 그냥 곱게 가질 않는다.

피를 마시고 다루는 종족이라 그런가 죽으면서 흩뿌린 피는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달라붙고 미끄러져 진이 빠지게 만들고 있다.

뭐랄까. 늪지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

검도 평소보다 잘 안 잡히고 움직임도 묘하게 느려지거나 밀려 버린다.

자할이 놈들의 몸에 장난질이라도 한 건가.

“후우. 짜증 나는군.”

[저주 내성(SSS) Lv.1]

[샤워(S) Lv.MAX]

[달라붙기(S) Lv.MAX]

[클린(S) Lv.MAX]

스킬을 사용해서 오염된 갑옷과 피부를 깨끗이 만들었다. 검도 다시 고쳐 잡고.

S급 이상의 스킬들을 중첩해서 펼치자 괴상하게 몸을 옭아매던 핏덩이가 떨어져 땅에 고인다.

잔기술이라 할 만하지만 알게 모르게 움직임을 방해하는 걸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었고, 그러다 손이 꼬이면 목이 날아가는 거였다.

다시 생각해도 이 녀석들을 내가 상대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플레다는 날랜 몸과 파워에 몰빵한 한 방을 위주로 싸우는 도박성 전투를 주로 하니까.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나도 참 좋아하는 방식이지만 어디까지나 강력한 대상 하나를 상대할 때 좋은 방법이었다.

이런 어중간한 놈들을 상대로 도박을 해봤자 성공해도 손해다.

“덕춘아.”

“그엑.”

작게 중얼거리자 덕춘이가 빠르게 등 뒤를 타고 내려간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전진.

“온다!”

“달라붙지 마라! 한 명이 죽어도 잡아!”

그새 전략을 짰는지 유독 덩치가 큰 녀석이 나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달려온다.

한 명을 희생하는 대신 나머지 인원이 화력을 쏟아내려는 전략인 거 같은데.

‘그건 날 잡고 늘어질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지.’

잡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 없다.

카드드드득!

돌진하던 기세 그대로 급커브를 했다. 땅이 뒤집히며 돌멩이가 튀어 오르고.

-콰앙!

옆으로 파이어 밤을 터트려 직각에 가까운 방향 전환을 만들어 냈다.

그와 동시에 어스월을 사용해 애매한 위치에 있던 녀석들을 흙벽 위로 올려 버렸다.

다급히 벽 위에 올라갔던 녀석들이 뛰어내렸지만.

[프로즌 브레이크(SS) Lv.3]

-꽈드드득

떨어지는 모양 그대로 얼음에 갇힐 뿐이었다.

물론 이걸로는 오래 붙잡고 있지 못한다. 이러나저러나 이 녀석들도 90층에 배치된 녀석들이니까.

그래도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다. 남아 있는 자할의 부하들은 기껏해야 6명. 방금 2명을 프로즌 브레이크로 잡아 두었으니 남은 놈들을 잡으면 된다.

-촤아악!

길게 뻗은 검. 검강으로 늘어난 검격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녀석의 가슴을 가른다.

피가 솟구치며 뒤로 넘어가는 녀석을 향해 일렉트릭 쇼크를 사용했다.

물에 전기가 통하듯 피도 전기가 통하는 건 매한가지였으니.

“캬하아아아악!”

“으그그그극!”

근처에 있던 녀석들이 함께 감전되어 몸을 떨었다.

제자리에서 발작하는 놈들을 향해 오로라 빔.

-찌유우우우웅!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날아간다.

이걸로 남은 건 이제 막 얼음을 깨부수며 빠져나온 두 녀석과 맨 처음 나를 붙잡기 위해 달려들던 덩치 한 명뿐.

“이런 빌어먹을!”

“죽여! 죽더라도 죽여!”

“어차피 도망쳐 봤자 끝장이다!”

이미 본인들로는 날 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썩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딱히 의리가 있어 보이는 건 아니고.

‘자할이라는 녀석도 꽤 잔인하게 군림했나 본데.’

도망쳐봤자 자할의 보복을 받을 거라는 공포 때문인 거 같았다.

이것 참 신기하네.

“도망치는 게 나았을 텐데.”

놈들이 걱정하는 보복도 자할이 살아 있을 때나 벌어지는 일 아니던가.

이래서 사람이 공부를 해야 하는 거다. 상황 판단을 냉정히 할 줄 알아야지. 그러지 못하면…….

“죽는 거야.”

-촤아아아악!

내 검에 상반신이 절단된 녀석이 하나.

“궤에에엑!”

덕춘이의 뺨 때리기에 목이 돌아간 녀석이 하나.

남은 한 명은.

[잊히지 않는 창기사(SSS) Lv.6]

“끼에에에에엑!”

기습적으로 풀어 버린 망구가 내지른 창에 가슴이 관통당했다.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뚫린 가슴을 내려다보는 녀석.

“다굴은 너희만 할 줄 알았냐?”

“끝까지, 농락을. 쿨럭!”

뱀파이어가 원통한 얼굴로 쓰러진다.

농락은 무슨. 지들도 신나게 다굴 쳐 놓고. 내가 혼자 움직인다는 인식을 심어 준 뒤 역공을 하는, 매우 똑똑하면서도 전략적인 방법을 쓴 것뿐이다.

“이쪽은 정리 끝났고.”

후두둑.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프렐다와 자할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후우. 후.”

“많이 늘었구나, 프렐다.”

기어를 얼마나 사용했는지 연기가 올라오는 오른팔을 움켜잡고 거친 숨을 내뱉는 프렐다.

어깨 아래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더 이상 팔을 쓰기는 어려워 보인다.

자할이라고 상태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여유 있는 척 웃고 있기는 하다만.

“어이, 거렁뱅이. 멋진 척 그만하지?”

“네놈!”

옷은 넝마였고, 폭발에 휘말려 온통 검댕이 투성이라 거지꼴이나 다를 바 없었다.

뱀파이어 특유의 재생 능력 덕에 상처는 어느 정도 회복한 거 같다만 미묘하게 질질 끌리는 발을 보니 발목이 제대로 아작 났었나 보다.

“선수 교체. 잠시 쉬고 있어. 덕춘아, 부탁한다.”

“그에에.”

프렐다를 등 뒤로 보내고 놈 앞에 섰다.

나 역시 방금까지 전투를 치렀던 터라 힘이 좀 빠지기는 했지만 자할만큼은 아니다. 아직 체력은 충분하다.

자할도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아는지 눈알을 굴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도망쳐 봤자 소용없을걸. 나가도 기사들과 마주칠 테니까.”

기사라는 말에 녀석이 입술을 악문다. 과거에 당한 적이 있는 만큼 더 신경이 쓰이겠지.

물론 거짓말이기는 하다.

‘기사들은 다른 쪽으로 갔거든.’

대폭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위장한 빌러, 녀석을 통해 자할과 무리들이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곳을 거짓으로 알렸다.

지금쯤 기사단 대부분은 그쪽에 몰려 있지 싶은데.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기사들이 우글거리면 자할이나 파무다라, 칼리버가 숨어 있을 거 같아서 한 거지.

“함정을 공들여 파 두었구나.”

“내 노력을 알아봐 주다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이번 건 진심. 내가 이놈이랑 칼리버 잡겠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당사자한테 이런 소리를 들으니 더욱 감격스럽다.

프렐다는 몸을 회복하며 수혈팩을 지키고 있으니 난 자할만 잡으면 되겠군.

-파앙!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놈을 향해 달렸다.

빠르기는 하지만 전력은 아니다. 놈 또한 대각선으로 달리며 나와 거리를 벌린다.

그런 녀석을 향해 망구가 창을 쥐고 날아든다.

“끼아아아아아!”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매섭게 날아드는 창.

SSS급에 달하는 만큼 그 위력은 보통이 아니었으나.

“흥!”

자할이 팔을 휘두르자 창이 옆으로 밀려 나간다.

어느새 그의 양손에 잡힌 쌍도끼. 피로 만들어 낸 무구가 모습을 드러냈으며.

-주르르륵

자할의 입과 귀에서 피가 쏟아지더니 쉬네파가 사용했던 피의 갑주가 온몸을 감싼다.

저건 볼 때마다 징그럽네.

어지럽게 창과 쌍도끼가 교차하는 곳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오로라 빔(S) Lv.MAX]

빠르게 머리를 노렸지만 가뿐히 머리를 숙여 피한다.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잠깐 멈추라고 쏜 거니까.

-카아앙!

질주하며 수평으로 그은 검격. 망구 또한 절묘하게 창을 내질렀다.

거의 동시에 들어오는 공격을 쌍도끼로 막아 낸 자할이 뒤로 주룩 밀려난다.

뱀파이어 대부분이 맨손을 선호하는 데 반해 녀석은 무기술에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나름 흥미로웠으나 그게 전부.

이번에는 놈이 몸을 날리며 거칠게 도끼를 휘두른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얼핏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처럼 보이는 도끼질에 빈틈은 없다.

그래서 그냥 맞았다.

[강철의 의지(SS) Lv.2]

[강체强體(SS) Lv.3]

[물리 공격 내성(SSS) Lv.1]

-콰드드드드득!

펠라인 세트를 우그러트리며 떨어지는 도끼.

흉갑과 왼쪽 어깨에서 피가 뿜어져 올랐고.

“이, 이런 무식한!”

“똑똑한 거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말이 있으므로.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검강]

[절삭(S) Lv.MAX]

[영혼찢기(S) Lv.MAX]

높이 쳐든 검을 내리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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