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93층의 지배자
인류 측 정보를 모으는 것. 제한된 시간 동안 알아내야 할 목록들을 만들었었다.
가장 중요했던 것이 내가 상대해야 할 플레이어의 숫자, 그들의 평균 레벨.
‘이걸 확인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
다들 레벨 업하기 위해 쉴새 없이 움직였으니 수를 파악하기 굉장히 어려웠다.
대략적인 규모와 통계를 통해 파악하기는 했지만 처음 가 보는 마을이기도 했거니와, 밖에 있는 사냥터도 돌아다녀야 해서 필연적으로 시간이 들었다.
인원을 파악하면서 레벨도 확인했고, 아직 레벨 10 언저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하는 데 소모한 시간이 대략 14시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늦게 나올 걸 그랬나.’
해가 뜨자마자 나와서 사람들이 활동하는 시간과 살짝 엇나간 감이 있었다.
마왕성에 가져갈 만한 물건이 있나 싶어 상점을 둘러보려 해도 연 곳이 그리 많지는 않았고.
92층에 있던 반트 성은 새벽같이 사람들이 일어났었는데 여기는 좀 여유롭게 돌아다녔다.
그래도 덕분에 미리 마을 구조와 지리를 익힐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만.
“여긴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없네요. 지도도 없고. 필요도 없지만.”
몰랐는데 이곳에는 지도를 따로 팔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미니맵이 있기 때문.
플레이어들은 미니맵을 통해 원하는 목적지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지도가 필요 없었다.
이후 내가 침공해야 할 수도 있었기에 직접 지도를 만들어 냈다. 이미 이전에 지도를 만든 적이 있어서 어렵지는 않았으나 다듬을 필요는 있었다.
‘직접 발로 뛰면서 침공을 준비하는 마왕이라니.’
얼마나 노력형 마왕인가. 다들 이걸 알아 줘야 한다.
몬스터 밥 벌어 줘, 침입자 막아 줘, 미개척지 개간하고, 단신으로 적 진영에 들어가 염탐도 해.
악당들은 부지런하다는 말이 어떤 건지 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그렇지 뭡니까. 이게 또 쉽지 않거든요. 경험이 있어도 스펙이 낮으니까 어색하면 고꾸라지고.”
“아, 그렇군요.”
내가 딴생각을 하는 이유.
파티 플레이를 하자는 녀석이 말이 너무 많다. 탑에 오래 있으면 말이 많아지는 병이이라도 있는 걸까.
한 명만 그러면 어지간히 무시하겠는데 어째 이 파티는 수다 떠는 이들만 모여 있었다.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활이 있는데. 재료를 모아 오라더라고.”
“이번에는 생활 관련 기술을 배우려 했지. 계속 사냥만 했는데 이런 방향성이 아닌가 싶어서.”
“저번 원정대는 어떻게 됐을까, 다시 뭉칠까. 어쨌든 전 시즌에서는 마왕까지 잡았잖아.”
심지어 서로 티키타카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해 대서 더 골이 아플 지경이었는데.
“잠깐, 방금 뭐라고?”
“어떤 거요? 생활 기술? 이게 사람들이 얕보는데 꽤나…….”
“아니, 그쪽 말고 전 시즌 원정대 이야기요.”
한 가지 솔깃한 주제가 나왔다.
원정대. 전 시즌 마왕을 잡은 이들에 대한 이야기.
“아, 원정대요. 유명하잖아요. 혹시 몰라요?”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진다.
이들 모두 게임을 여러 차례 해 본 이들이다. 당연히 마왕이 염탐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는 것에서 의심을 하는 거였으나.
“저번 시즌에는 특수 지역에서 시작해서 초반에 죽었거든요.”
“오, 특수 지역이라. 흔치 않은 기회인데.”
“초반이면 그럴 수 있죠. 아무래도 원정대가 꾸려진 건 중반 이후라서.”
당황하지 않고 적당한 변명을 내놓았다.
다들 몇 번씩 죽어 봤을 테니 의심하지는 않겠지. 애초에 한 명씩 다 의심할 필요도 없다.
‘외출 중에는 전투를 할 수 없으니까.’
경계는 하되, 필요 이상으로 난리를 피우진 않을 거라는 말.
원체 말이 많은 녀석들이라 이내 의심을 지우고 원정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으니.
“엔딩까지 간 이들이 몇 있잖아요. 다음에는 새로운 엔딩을 볼지도 모른다는 이들도 있고.”
“저번 시즌에는 그거였어요. 내통자 엔딩. 뭐, 결국에는 새로운 엔딩은 아닌 거 같지만요.”
대충 정리하자면 마왕성에 있는 내통자와 짜고 마왕을 공격했다는 뜻.
달리 말하면…….
‘내부에 배신자가 있을 수도 있다.’
이건 생각해 볼 문제다. 뒤통수가 가려운 건 질색이라.
한 번 내통한 자가 다시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지금까지 없었던 엔딩을 보고 싶은 건 나뿐만이 아니다. 마왕성에 있는 NPC들도 마찬가지겠지.
누굴까.
‘히메룬은 아닐 거야.’
배신을 때릴 거였으면 진작에 수작을 부렸을 거다.
왜, 그런 엔딩을 노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새로운 마왕 엔딩.
이제 막 부활한 마왕을 재끼고 본인이 직접 마왕이 되는 것.
설사 속으로 딴마음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계속 의심만 하다가는 끝도 없어.’
정말 수상한 낌새가 느껴지거나 눈에 보이는 뭔가를 한 게 아니라면 섣불리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불신지옥을 만드는 건 많이 겪어 봐서 안다. 놀아나면 안 된다.
내가 속으로 마음을 다잡는 사이에도 대화는 이어졌다.
“원정대에 네임드도 몇 있었던 거 같은데.”
“아, 무슨 요정?”
“그 사람이랑 좀 온 지 된 사람 중에도 한 명.”
“화 어쩌구? 그 사람은 원정대 아니야. 따로 잡으러 갔다고 들었거든. 이상한 사람 말하는 거 맞지?”
“이상한 사람이면 맞을 거야.”
요정?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
“요정이라고 했습니까?”
“예, 있어요. 특이한 닉네임이라 기억하고 있었죠.”
등반가에 요정이라는 닉네임을 쓴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요정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는 녀석은 두 명뿐이다.
마그마 요정과 근육 요정.
둘이 속해 있는 상위 헌터 집단은 요정 클럽.
그리고 요정 클럽은…….
‘대격변이 일어나기 전 게임 길드 멤버들이 만든 곳이야.’
탑에 들어가기도 전에 닉네임을 맞춘 이들이었으며,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 때문인지 죄다 높은 곳까지 올라가고 있는 이들.
“어디에 있었나 했더니만 이곳에 있었군.”
확신이 들었다.
이곳의 지배자. 요정 클럽 멤버 중 하나다.
어째서 이곳이 게임의 형태를 띠고 있는지도 설명이 된다. 그야 이게 익숙하고 잘할 자신이 있으니까.
91층에서 마그마 요정과 함께했을 때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요정 클럽의 멤버는 4명.
마그마 요정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고, 근육 요정은 90층대에 있지 않다.
남은 2명 모두 이곳에 있는 건가. 최소한 한 명은 여기 있는 게 분명한데 누군지는 알 수 없다.
“본 적 있습니까?”
“아뇨. 전 본 적 없어요. 이번에는 어디서 시작할지도 모르고.”
“스타팅 위치는 랜덤이잖아요, 용사님. 큽! 아, 죄송. 무지개 용사도 저번에 특수 지역에 갔다 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죠.”
웃어?
너 내가 얼굴 기억했어.
슬쩍 째려보고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예상외의 소득이 있었다. 요정 클럽은 쁘찡 연합에 우호적이다. 대놓고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커뮤니티에서 소란이 있을 때면 우리 편을 들어 주고는 했으니까.
마그마 요정과 근육 요정과 인연이 있기도 하고. 적어도 대화할 수 있는 여지는 있다는 거다.
내가 인류 측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마왕 역할을 하게 됐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
그건 그거고.
“다 왔습니다.”
“다들 긴장하라고. 아직 이곳에 진입한 사람이 없을 거야. 우리가 처음이라는 뜻이지.”
“성공만 하면 남들보다 앞설 수 있다고요.”
-우우우우웅
드디어 마왕성으로 진입하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숨길 생각이 없는지 반파된 신전에 열려 있는 포탈.
[마왕성 포탈]
-마왕의 영역으로 진입합니다.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마왕에게 도전하세요!
상큼한 설명까지 있는 것이 오긴 제대로 온 모양.
누구는 골드 주고 외출권을 사야 올 수 있는데 얘네는 그냥 들어가네.
억울하다 억울해! 너희도 골드 내고 들어가란 말이야. 내가 먹여 키운 몬스터 머리 쪼개러 가는 거면서.
마왕성 기능 중에 입장료 받는 게 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진입했다.
이미 오면서 진형은 짜 둔 상태.
[마왕의 영역에 진입합니다.]
[스테이지1-꾸물거리는 늪]
-우우우우웅
익숙한 부유감과 함께 느껴지는 습한 공기.
철퍽이는 진흙 바닥과 물 냄새.
“아니 뭔, 처음부터 늪지대가.”
“다들 집중합시다. 늪지대고 뭐고 우리 레벨이면 충분히 가능해요.”
리더 격인 도끼 남이 말을 높인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지시를 따라달라는 뜻이었고.
-척. 처적.
다들 익숙한 동작으로 자세를 잡는다.
난 중간에 낀 상황이라 적당히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검을 차고 있는 나를 보며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 이건 그냥 호신용. 저 마법사입니다.”
“오오오오! 마법사!”
“그쪽 클래스를 고르셨군요?”
“진작 말씀을 하시지. 어쩐지 레벨이 높으시더라.”
손 위로 파이어를 사용하자 다들 좋아 죽는다.
이제 좀 있으면 진짜 죽을 텐데.
“크르르륵.”
“키륵.”
우리를 향해 모습을 드러내는 리자드맨.
그 소란에 다들 인상을 굳히며 무기에 힘을 준다.
반면 리자드맨들은 눈을 깜빡이며 멈칫했으니.
“키륵?”
“쉿.”
난 가볍게 입에 손가락을 댔다. 눈치껏 아는 체하지 말자.
리자드맨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린다. 1성급 파충류의 머리였지만 그래도 지능은 조금 있는 편.
고개를 끄덕이더니 괴성과 함께 덤벼들었다.
“캬하아아악!”
“방패 세우세요! 막아요!”
“뒤로 물러서세요!”
탱커가 앞으로 나머지는 공격과 방어.
숙련된 움직임이었나 살짝 느리다. 이런 환경에서 싸우게 될 줄은 몰랐다는 거겠지.
-쾅! 콰아앙!
“크읍!”
“다들 움직여요! 늪지대라 힘든 건 알지만 힘내야 합니다!”
“으아아압!”
다들 기를 쓰며 전투를 한다.
뭔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이들.
난 걱정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기부터는 저한테 맡기시죠.”
“고맙습니다!”
“어서 마법을!”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외출 중이라 이들을 직접 공격할 수는 없지만.
[워터(S) Lv.MAX]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있겠지.
폭우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가뜩이나 습했던 환경이 더욱 짙어지고, 질척였던 늪이 더욱 빠르게 사람들의 발을 빨아들인다.
“어? 어어?”
“뭐, 뭡니까!”
“으아앗! 잠깐만 잡아 줘요!”
무릎까지 쑥 빠져 엎어지는 사람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덩굴을 움켜잡는 사람까지.
한순간에 진형이 무너졌으나 난 괜찮았다.
[칭호, 늪지대의 지배자가 반짝입니다!]
늪지대에서는 익숙한 몸이라.
옴짝달싹도 못한 채 다가오는 리자드맨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좋은 이야기 많이 듣고 갑니다. 다들 수고하세요.”
그걸 끝으로 포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플레이어는 스테이지 종료 시까지 나갈 수 없습니다.]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스테이지 탈출 가능]
-우우우우우웅
뒤에서 뭐라 욕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이내 멀어졌다.
언제 늪지대에 있었냐는 듯 날 반기는 공터.
발에 묻은 진흙을 털어 내며 홀로그램을 바라봤다.
[외출]
-남은 시간: 08:45
아직 외출이 끝나기에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히메룬에게 선물도 전해 줬으니 남은 시간도 알차게 써 보실까.
첫 외출로 얻어야 할 정보는 얼추 다 모았으니.
“다른 스타팅 지점을 가 보실까.”
서두르면 한 곳 정도는 가 볼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