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화 몇 명이나 클리어했을까
마그리타와 이시사르.
내가 상대할 녀석은 정해져 있었다.
“넌 나랑 마저 해야지!”
“징그러운 존재로구나!”
마그리타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이어 밤이 터지며 홍염이 솟구친다. 화력을 정면에서 받을 생각이 없는지 녀석이 튕겨 나가듯 뒤로 물러섰고, 자연스럽게 남은 이시사르는 탈모맨과 송곳 요정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크으읍! 와라! 둘 다 상대해 주마!”
짜증이 물씬 담긴 이시사르의 외침. 나 같아도 양쪽에서 맞으면 화날 만하다.
녀석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일부러 이렇게 유도했다.
“마법사는 워낙 짜증 나는 녀석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둘은 붙어야지.”
신성력을 못 쓰는 송곳 요정은 당연히 이시사르를 상대해야 한다.
온갖 마법을 부리며 발버둥 칠 테니 옆에서 탈모맨이 함께 봐 주면 좋겠지.
어차피 악마 녀석은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연달아 폭발을 일으키며 압박을 가하자 녀석 또한 피의 갑주를 단단히 하며 마기를 휘두른다.
모래를 집어 던지듯 흩뿌려지는 마기는 얼핏 보면 위험해 보이지 않았으나.
-투두두두둑!
저거 하나하나가 총알이나 다를 바 없다.
스펀지처럼 구멍이 생겨나는 벽과 바닥. 나 또한 팔로 얼굴을 가리며 전진했다.
갑옷을 때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울리는 타이밍.
-촤아아아악!
녀석이 팔을 길게 휘둘렀고, 피와 마기가 합쳐지며 생성된 대검이 어깨를 강타했다.
기묘하게 검붉은 빛을 띠는 무구.
“이제야 좀 할 마음이 들었나 보군.”
“진심을 다할 것이니, 너 또한 그리하라.”
“난 언제나 진심이지.”
마그나로크의 왕관으로 놈에 대한 정보는 이미 읽었다.
악마의 종류는 다양했고 그중에는 마법이나 스킬을 주로 쓰는 놈이 있는가 하면, 저놈처럼 무기를 즐겨 쓰는 경우가 있었다.
교단의 보고에서 받은 기록에 의하면 저 검은…….
‘혈마검. 근처에만 가도 근처에 있는 사람의 피를 빨아들이려 한다지.’
피를 탐욕스럽게 찾는 뱀파이어가 쓸 법한 무기다. 가만히 있는 사람의 피를 뽑아 가려고 하고, 게다가 피를 역류시키기까지 한다고 했다.
무기물이면 모를까 사람인 이상 나 또한 저 능력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 증거로.
[혈마검(SSS)이 요동칩니다!]
-카가가가가각!
“으읍! 웁!”
“아까의 기세는 다 어디 갔느냐! 이렇게 해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놈과 검을 주고받을 때마다 온몸이 찢어질 거 같다.
피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감각이 이상해지는 건 물론이고, 속까지 뒤집히는 기분. 입으로 피가 올라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본인이 유리하다고 생각한 건지 말이 많아지는 게 꼴 보기 싫네.
마침 입에 피도 고이는 차.
“카악, 퉤!”
“그에에, 퉷!”
“그으으윽! 이런 더러운 것들이!”
녀석의 검을 튕겨 내는 것과 동시에 침을 뱉었다.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도 마찬가지.
내 침이야 그냥 피가 섞였을 뿐이지만 덕춘이의 침은 돌도 녹여 버리는 산성과 독! 안면에 맞은 녀석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거리를 벌리려는 행동. 평소였다면 놈을 쫓아 압박을 가했겠지만.
[파이어 밤(SSS) Lv.6]
[오로라 빔(S) Lv.MAX]
-콰아아아앙!
-찌유우우웅!
나 또한 적당히 물러서며 스킬을 쏟았다.
파이어 밤으로 대미지를 가하며 시야를 차단한 채 오로라 빔.
운 좋게 오로라 빔 몇 대를 맞추기는 했지만 대미지가 살짝 아쉽다. 타격이 아예 없는 거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치명타를 입은 것도 아니었으니.
‘94층에 올랐을 수준이면 S급 스킬 정도로는 부족하겠지,’
못해도 SS급. 그 이상의 등급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 또한 대부분의 내성 스킬이 SS급을 넘은 상태라 어지간한 공격에는 꿈쩍도 안 하니까.
지금도 놈에게 마찬가지다. 검이야 중간중간 몸을 받으면서 싸울 수 있겠는데 저 망할 효과 때문에 접근이 힘들다.
‘암만 생각해도 내가 녀석을 상대하길 잘한 거 같군.’
탈모맨은 접근전을 주로 하니까 더 부담스러웠을 거다.
놈 또한 내가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는 걸 확인하더니 적극적으로 달려든다.
“하하하! 결국 네놈도 피륙으로 이루어진 인간일 뿐이었구나!”
“당연한 소릴 의미심장하게 하네.”
-우우우웅!
[혈마검(SSS)이 당신의 피를 흔듭니다.]
또다. 다시금 피가 제멋대로 날뛴다.
몇 번을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 한쪽으로 피가 몰리는가 하면 어디는 피가 부족해 저릿해진다.
[혼돈이 혈마검의 규칙을 거부합니다.]
“후우.”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는 혼돈 수치가 높아서 일부 상쇄시킬 수 있지만, 혼돈이라는 것도 워낙 제멋대로인 녀석이라 완전히 조절할 수 없다.
정면으로 쏘듯이 찔러 온 검을 어깨로 받아 튕겨 내고 녀석의 발아래로 디그를 사용했다.
-푸욱
단번에 꺼져 버린 땅.
말 같지 않은 반사신경으로 녀석이 발을 뺐고, 손끝으로 피를 발사해 그 추진력으로 뒤로 몸을 날린다.
이어 나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혈라독수血羅毒手(SS) Lv.6]
-촤아아아악!
시커멓게 물든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피의 그물이 몸을 옭아매더니 놈 쪽으로 끌어당긴다.
녀석이 내 목을 움켜잡자 뜨거운 통증이 올라온다.
[독 내성(SSS) Lv.2]
나야 따끔하면서 기분이 더러울 뿐이었지만 다른 사람이었으면 목이 너덜너덜해질 정도의 독성.
“더 이상은 흥이 나질 않는구나, 죽어라.”
“그런 말은, 다 이긴 다음에나 할 수 있는 거다. 멍청아!”
[프로즌 브레이크(SS) Lv.3]
[일렉트릭 쇼크(SS) Lv.6]
-우드드득!
-파지지지지직!
내가 괜히 그냥 끌려온 줄 아나.
가만 생각해 보니까 나만 속 뒤집히는 게 억울하더라고. 녀석도 짜릿하게 감전되면 내 기분을 좀 알 수 있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부르르 떠는 녀석을 향해 신성력이 담긴 파이어 밤을 연달아 터트렸다.
마그나로크의 왕관과 날개 없는 천사의 날개까지 착용한 이상 내 신성력은 어지간한 대천사보다 높다.
“키햐아아아악!”
온몸이 타들어 가며 울부짖는 녀석.
질긴 녀석. 어지간한 악마면 죽어야 정상인데 피의 갑주와 혈관으로 어떻게든 대미지를 막아 냈다.
저 망할 혈마검 때문에 빠르게 끝내고 싶었는데 쉽게 가지는 않겠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질척거릴 수밖에!
“그냥 좀 죽자!”
“그으으아아아악!”
[아스트랄 레인보우(S)]
[되갚기(SSS) Lv.3]
[파이어 밤(SSS) Lv.6]
[파이어 밤(SSS) Lv.6]
[파이어 밤(SSS) Lv.6]
.
.
.
-구구구구구궁.
-쿠와아아아아아앙!
단, 10초. 내 스킬의 위력은 10배.
가뜩이나 파괴력으로는 손에 꼽는 스킬들이 더욱 강하게 터진다.
왕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날아오른 파편이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잠깐이지만 저 멀리, 악마들과 싸우고 있는 간부들과 플레이어들이 보였던 것도 같았지만 이내 땅이 뒤집히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끄윽, 끄으으윽.”
찰나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 내 앞에 남은 건 까맣게 타 버린 마그리타였다.
숯덩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몰골. 어떻게든 피의 갑주와 혈관으로 막으려 한 거 같았지만 그거로는 부족했을 거다.
[강철의 의지(SS) Lv.2]
[강체强體(SS) Lv.3]
[물리 공격 내성(SSS) Lv.1]
[화기 내성(SSS) Lv.3]
나도 온몸이 부서질 거 같은데 저렇게 말랑한 몸으로 버틸 리가 있나.
이 짓거리도 하다 보면 적응할 법도 한데 할 때마다 죽을 거 같다. 죽어도 한 번은 버티겠지만.
-파스스
녀석의 신형이 천천히 무너진다. 드디어 죽은 건가. 살짝 기대했지만 반쯤 쓰러져가던 마그리타의 몸이 공중에서 우뚝 멈춰 선다.
“아, 또 뭔데!”
“그에에!”
기묘한 감각에 본능적으로 옆으로 뛰었지만 늦었다.
아니, 어디로 피했어도 놈의 범위 안이었을 거다.
[칭호, 피의 갈구자가 번뜩입니다!]
[혈식소생血食甦生(SSS) Lv.2]
-우우우우우웅!
몸에 있는 피가 놈을 향해 쏠린다.
파악! 코피가 터지더니 핏방울이 둥실 떠올라 마그리타에게 빨려 들어간다.
강제적인 흡혈! 내 몸에 있는 혈액까지 영향을 줄 정도의 강력한 피의 지배력.
코피를 시작으로 입과 귀, 눈에서까지 핏줄이 터진다. 붉게 물드는 시약 속, 녀석의 몸이 점차 회복되는 것이 보인다.
내가 가진 구사일생과 비슷한 스킬. 지금이라도 녀석을 끝장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혈식소생(SSS) Lv.2]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을 때, 일대에 존재하는 피를 흡수해 부활합니다.
-흡수한 피만큼 회복합니다.
-스킬 시전 중에는 사망 판정. 공격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공격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다.
어쩌지 스킬 등급이 높더라니 안개 질주처럼 무적 판정이 있던 건가.
이렇게 된 이상 나도 한 번 죽어 주고 구사일생으로 재대결을…….
[피의 주인- 히든 퀘스트 클리어!]
[보상이 지급됩니다!]
[칭호, 뱀파이어의 친구를 획득합니다!]
계속되는 출혈로 흐려지는 의식 속, 알림이 떠올랐다.
-파아아아아앗!
정신을 깨우듯 번쩍이는 섬광.
짜릿하게 전신을 퍼져 나가는 뜨거운 피.
[혈문개방血門開放(SSS) Lv.10]
-최고위 뱀파이어만이 가능하다는 절기.
-혈문을 개방해 피의 소유권과 신체 능력, 회복력을 강화시킵니다!
-혈술이 강화됩니다.
-해당 스킬은 레벨이 고정되어 있습니다.
놈에게 빨려 들어가던 피가 공중에서 멈춘다.
이내 줄다리기하듯 허공에서 요동치던 피가 다시금 내게 돌아온다.
온몸을 타고 흐르던 피가 되감기를 한 것처럼 상처 안으로 들어가고 이내 상처마저도 아문다.
파직!
깊은 곳 어딘가가 터지는 느낌과 함께 격렬한 힘이 온몸을 타고 질주한다.
떨어졌던 체력이 돌아오는 것을 넘어 전신에 힘이 넘쳤으니, 마치 처음 각성할 때와 같은 기분. 정체되었던 신체 능력이 한 계단 올라서는 감각이 들었고.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었습니다!]
[칭호, 종의 초월을 획득합니다!]
[육체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더욱 단단해집니다!]
[영혼의 격이 상승합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산뜻함과 함께 정신이 되돌아왔다.
어느덧 또렷해진 머리.
탐욕스럽게 피를 흡수하던 마그리타가 바닥에 엎어졌고, 녀석의 스킬이 멈추었다.
[혈식소생(SSS) Lv.2가 종료됩니다.]
[마그리타가 부활합니다.]
[회복률: 12퍼센트]
“끄으으읍. 어째서 이것밖에.”
여전히 다 죽어 가는 송장 같은 모습으로 마그리타가 일어선다. 다리를 떨고 있는 것이 서 있는 게 고작인 모양.
그에 반해 나는.
“이게 혈문개방. 최고위급 뱀파이어들은 이런 느낌으로 살고 있던 건가.”
몸을 흐르는 혈류가 그대로 느껴진다. 마력이나 신성력 같은 것을 운용할 때와 비슷하면서도 좀 다른 감각.
레벨이 고정되어 있는 게 아쉽기는 한데 별수 없다. 말 그대로 혈문을 개방하는 것으로 용도를 다한 스킬이니까.
그건 그거고.
“남은 것도 살펴야지.”
놀랍게도 보상은 이게 끝이 아니다.
[92층, 반트 성의 지배자 자격을 획득합니다.]
[파무다라의 혈술血術 중 하나를 습득합니다.]
지배자 자격에 혈술까지.
혈술이면 어떤 거려나. 피의 갑옷도 나쁘지 않아 보이고 혈술인지는 모르겠지만 박쥐 떼 같은 거로 모습을 바꾸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파무다라는 어떤 기술을 썼더라. 그런 고민을 하는 것도 잠시.
[혈술, 혈각장血角場(SSS) Lv.1]
-자신의 피를 이용해 피의 창을 내지릅니다.
-출혈량이 많을수록 더욱 넓고 강해집니다.
녀석이 가지고 있던 혈술을 익혔다는 알림이 떴고 난 망설임 없이 스킬을 사용했다.
혈문개방을 통해 상처는 다 나은 상태. 바닥에 떨어졌던 핏방울까지 내 몸을 스며든 지금, 몸 밖에 남아 있는 내 피는…….
-콰직! 콰드드득!
“크하아아아아악!”
마그리타가 마신 것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녀석의 몸을 뚫고 솟아오른 피의 창. 어떻게든 회복하려 했지만 놈은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 부릅뜬 눈으로 날 노려보던 녀석이 천천히 기울었다.
“…네놈 세계라고 멸망을 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93층의 마왕 중 하나, 마그리타를 처치했습니다!]
“죽을 거면 곱게 죽을 것이지. 어디서 악담을.”
작게 혀를 차는 타이밍 또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또 다른 마왕, 이시사스가 사망했습니다.]
[새로운 엔딩에 도달합니다!]
“저쪽도 끝났나.”
대폭발로 무너진 왕성, 저 너머 머리가 사라진 이시사르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는 송곳 요정과 주먹을 치켜드는 탈모맨.
다행히 누구 한 명 죽는 일 없이 일을 마쳤다.
그럼 이제.
[차원을 넘어 결탁한 두 마왕- 엔딩(New!)]
[공적치에 따라 클리어 대상이 지정됩니다.]
몇 명이나 93층을 클리어했는지 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