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3화 용의 밤
메리뮬레.
처음에는 왠지 익숙한 이름이다 했는데 불현듯 릴카가 준 퀘스트가 기억났다.
‘94층까지 올라오면서 그런 이름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
강제 퀘스트기는 하지만 사실상 나를 도와주기 위한 퀘스트.
오랫동안 사용하여 언제 망가질지 모르는 중량 팔찌를 대신할 물건을 얻어 내기 위해 받은 퀘스트였다.
[릴카의 부탁(8)- 강제 퀘스트]
-릴카는 중량 팔찌 꿀꺽했어요!
-해당 아이템을 대체할 물건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메리뮬레! 수많은 보물을 지닌 자라면 뭐든 있겠죠!
-제작 요청이 들어온 물건을 건네고 보답을 고르세요.
-슈퍼 드래곤 수면안대 전달 (0/1)
-보상: 메리뮬레의 보물(???)
-주의) 어떤 물건을 얻는지는 개인 역량!
기존에 했던 퀘스트들이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얻어오는 거였다면 이번 퀘스트는 배송 퀘스트.
릴카라고 모든 곳을 가는 것은 아니니 언젠가 할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 대상이 드래곤일지는 몰랐지만.
그냥 드래곤도 아니다. 94층의 지배자인 동시에 에이션트 드래곤이었지.
‘확실히 뭘 가지고 있어도 가지고 있겠네.’
드래곤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무엇인가.
드래곤 브레스? 피어?
그런 것도 있지만 역시 그게 있다.
‘드래곤 레어.’
실제로 본 사람도 확실한 증거도 없다.
아직까지 드래곤을 상대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 다만 놀라울 정도로 동화나 전설 등으로 구전되는 내용들은 잘 들어맞았다.
그에 대한 가설은 여러 개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전에도 지구에 탑이 나타난 게 아닐까 싶다.
그때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이야기가 후대에 이어지면서 지금은 판타지의 주요 소재로 쓰이는 거고.
아무튼.
“릴카라… 그래, 부탁한 물건이 있지. 설마 대리인을 보낼지는 몰랐지만.”
“나도 상인이거든. 릴카랑 제법 협업하기도 했고.”
그냥 상인이 아니라 차원 상인이기도 했거니와 화조국과도 거래하는 사람이다.
릴카와 부활 사업을 하는 것도 있다. 어엿한 상인이라 볼 수 있다는 것.
“아무래도 좋다. 물건은 어디에 있지?”
메리뮬레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다.
콧김까지 느껴지는 것이 어지간히 마음이 급한 모양.
졸지에 드래곤의 뜨끈한 콧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좀 더럽긴 했으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 전에.”
난 녀석에게 손을 들어 올렸다.
놈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긴가민가 했는데 가까이 오니 확실해졌다.
기생종도 거르는 자 칭호가 움직인다.
아까까지는 워낙 미세하게 발동하고 있어서 산맥 어딘가에 감염체가 있나 했더니만.
“네놈, 언제 감염된 거지?”
“뭐라? 내가 그따위 열등한 것에 당했다고 말하고 싶은가!”
와락 구겨지는 얼굴.
감염이 뭘 뜻하는지 모를 멍청이가 아니다.
에이션트 몬스터가 드래곤 산맥으로 뿌린 감염체.
놈들의 목적은 하나다.
드래곤 산맥에 있는 드래곤들을 감염시켜 꼭두각시로 부리는 것.
아무리 고등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감염되면 그저 기생종의 숙주에 불과하다.
당장 기생종이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를 조종하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NPC까지 감염시켰다.
NPC마다 다르지만 그중에는 6성급 몬스터 따위는 맨손으로 찢어 버리는 이들도 있다.
이미 전례가 있지 않은가.
“이미 서부의 주인이자 그라지아 성채의 성주 또한 감염되었다.”
“거짓말하지 마라. 각 성주들의 힘은 내가 잘 안다. 그런 자가 기생종 따위에 감염될 일 없지.”
“이미 죽었어, 아델라의 손에.”
“그런!”
산맥에만 앉아 있더니만 소식이 늦군.
그러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야기도 듣고 그랬어야지.
당황하는 것이 눈에 보인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성주들의 무력은 에이션트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무시 못 할 수준.
당장 아델라만 해도 상극인 존재다.
괜히 중앙을 차지한 채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다.
드래곤 산맥 안이라면 몰라도 밖으로 나돌아다니기에는 부담스러운 거지.
“요새 갑작스러운 충동이 들거나 식욕이 늘지는 않았나.”
“…그런 잡스러운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
“아직 감염이 덜 됐나 보군. 아니면 용의 밤을 위해 잠자코 있는 거던가.”
굳이 미리 날뛸 필요 없는 거겠지.
어차피 용의 밤이 되면 이성을 잃어 통제하기 쉬워질 테니까.
드래곤 특유의 강인함과 지혜로 기생종을 막는 것도 이성이 남아 있을 때 가능한 거다.
슬쩍 앞으로 다가갔다.
지척에, 손이 닿을 정도까지 다가가자 녀석이 움찔한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숨어서 버틴 모양이지만 칭호를 가진 내가 가까워지니 기생종이 본능적으로 꿈틀한 것.
메리뮬레라고 그걸 못 느꼈을 리 없다.
“이, 이건!”
“대충 2마리 정도 들어가 있는 거 같은데.”
“대체 어디서 감염이 되었단 말인가!”
“지금 중요한 건 왜 감염됐냐가 아니야. 어떻게 빼낼 거냐는 거지.”
원인 파악은 그다음이다.
“네가 당했다는 건 다른 드래곤들도 당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답은 없었으나 긍정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의 수장이 당했는데 다른 놈들이라고 다를까.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
“다 데리고 와. 내가 해결해 주마.”
손가락을 까딱였다.
현재 기생종을 빼낼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칭호와 살을 가를 수 있는 칼만 있으면 어떻게든 된다.
다행히 아직 기생종이 제대로 활동하기 전이니 깔끔히 제거할 수 있을 거다.
아마 활동해도 한동안은 버틸 거고.
드래곤인 만큼 덩치가 크기도 하고, 온갖 마법적인 능력으로 저지하려 할 테니까.
더불어 재생 능력도 꽤 있을 테니.
‘대충 배를 갈라도 멀쩡하겠지?’
돌팔이, 아니. 기생종 전문 해결사가 나설 타이밍이다.
“이건, 은혜를 입었군. 부탁한다.”
오만할지언정 어리석지는 않은지 메리뮬레가 고개를 낮게 숙인다.
자존심 높은 드래곤이 보일 수 있는 최고의 예우 중 하나였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내가 또 드래곤의 친구거든. 친구끼리 잘해야 하는 거 알지?”
친근한 척 옆에 붙은 채 OK 사인을 보냈다.
친구비. 그거 말이야.
“과연, 친숙한 냄새의 정체는 그것이었나. 동족이 인정한 자라면 마땅히 존중해야 하는 법. 큰 빚을 졌다.”
내 뜻을 이해한 건지 아니면 그냥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그런 건지 순순히 빚을 인정한다.
한시가 바쁜 상황.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다.
[릴카의 부탁(8)- 강제 퀘스트]
-보상: 메리뮬레의 보물(???)
-주의) 어떤 물건을 얻는지는 개인 역량!
릴카가 준 퀘스트의 보상.
말 그대로 어떤 물건을 받는지는 내 역량이다.
빚을 지어 두면 더 괜찮은 물건을 받을 수 있을 터.
게다가 자세히 보면…….
‘수량 제한은 없잖아?’
이왕 온 거 뽕을 뽑을 생각.
그럼 밑밥은 다 깔았으니.
“받아.”
[드래곤의 수면안대(SSS)]
-드래곤의 사이즈에 맞춰 제작한 수면안대.
-쓰고 있기만 하더라도 마음의 평화.
-나른하면서도 평온해집니다.
-앞이 안 보이지만, 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잖아요!
수면안대 주제에 SSS급이라니.
도대체 어떤 괴상한 걸 만든 걸까 했는데 이제 보니 이거였다.
이성을 잃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아티팩트.
이거면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오오, 그래. 이게 필요했지. 그럼 보상을…….”
“아니, 그건 나중에.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
“그렇지. 동족들을 불러오겠다. 부디 기생종을 제거해 주게.”
“물론이야. 아, 그리고 별거 아닌데 기생종들을 다 없애 주면 너희가 해줄 게 하나 있어.”
“무엇인가?”
“그건 일 끝나고 말하도록 하지.”
“좋을 대로. 그대가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필시 이유가 있을 테니.”
메리뮤레가 움직이고 나 또한 개인 상점창을 열었다.
검을 쓰는 것도 좋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덩치 큰 드래곤 여러 마리를 상대하려면 적당한 도구가 있는 편이 좋겠지.
프램버그와 열려 있는 개인 상점창.
[자이언트 전기톱(SS)]
-지이이이이잉!
-우우우우웅!
-거인도 동강!
-나무도 동강!
-세계수도 동… 강 내면 큰일 납니다!
이거면 적당하겠군.
그럼.
“부지런히 해 보실까.”
슬쩍 하늘을 살폈다.
앞으로 며칠 남지 않았다.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마쳐야 한다.
* * *
숨만 쉬어도 시간은 지나가는 법.
밤이 되며 달이 떠올랐다.
그믐달이 되어 빛을 잃은 중앙의 달과 달리 만월이 된 새끼 달이 붉게 빛난다.
기어코 찾아온 용의 밤.
-그그그그극!
-끼우우우우우!
드래곤 나이트가 길들인 용종들이 우리에 갇힌 채 울부짖는다.
야성에 눈을 떠 날뛰는 소리가 선명하다.
용을 다룰 수 없는 드래곤 나이트는 사실상 좀 더 강한 전사에 불과한 법.
이때를 대비하여 용종이 아닌 다른 몬스터를 예비용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용종과 비교할 바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비스트 라이더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와이번 대신 그리폰을 탄 미르바가 소리쳤다.
“전방에 키메라 드래곤! 공중을 틀어막아라!”
“아래로 떨어트려! 어떻게든 안쪽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용종을 상대할 때 가장 위험한 건 공중으로 넘어오는 객체.
지리적의 유리함을 뺏기는 건 물론이거니와 본대를 지나쳐 성채로 돌진해 버리면 피해가 어마어마하다.
“쿠화아아아악!”
용종 특유의 패기.
붉은 달의 영향을 받아 더욱 강력해진 존재감에 그리폰을 포함한 공중 몬스터들이 겁을 먹었지만 드래곤 나이트들은 어떻게든 달래 움직였다.
공중이 뚫리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나므로.
“제기랄!”
“이걸 막을 수 있는 건가.”
“닥치고 무기 들어! 우리가 물러서면 끝이다!”
미르바뿐만이 아니다.
상식을 뛰어넘은 물량 공세에 모두가 질겁했다.
아무리 용의 밤이라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다만 이번에는 달랐다.
“특수 게이트가 터질 줄이야!”
“빌어먹을 동부 놈들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다 죽자는 거 아니냐고!”
에이션트 몬스터가 용의 밤을 이용해 몬스터를 한 번에 쏟아냈다.
다른 몬스터라면 몰라도 용종을 뱉어 내던 특수 게이트다.
그곳 안에 있는 놈들 또한 영향을 받아 버린 것.
원래도 막대한 몬스터를 뱉어 내는 게이트다.
그것을 막기 위해 아델라와 갈리아스가 움직였으나.
“갈리아스! 제대로 해라!”
“젠장, 하고 있다고!”
한발 늦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게이트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얼마 안 가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동부 놈들의 공격을 받았으니까.
정면으로 붙는다면 모조리 휩쓸려 나갈 놈들이었지만 철저하게 견제만 해 왔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겠다는 의도가 눈에 보였고,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미르바를 비롯한 이들이 나왔지만 이미 일은 터졌다.
예상보다 빠른 게이트 브레이크.
작정하고 이동을 방해한 동부.
필시 오래전부터 이때를 위해 담합했으리라.
이블아이의 조언을 통해 빠르게 움직였지만 처음부터 준비하고 있던 이들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우우우우우우웅!
그나마 형태라도 유지하고 있던 게이트가 진동하더니 이내 부서지기 시작한다.
특수 게이트가 완전히 열렸다는 징조.
-푸화아아아악!
안에서 기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에너지가 피어오른다.
에이션트 몬스터.
이를 악물면서도 아델라는 클레이모어에 힘을 더했다.
용종을 부리던 녀석이다.
그렇다는 건 필시 놈 또한 용종이라는 뜻.
충분히 승산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흩날리는 흙먼지 속에서도 눈을 가늘게 떴다.
도망치듯 흩어지는 용종 사이, 황금빛 갑주를 입은 존재가 걸어 나왔다.
자기 몸만큼이나 커다란 검을 진 기사.
투구로 가려진 눈동자에서 안광이 번뜩였고.
‘세로로 찢어진 눈?’
아델라는 볼 수 있었다.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파충류의 눈동자.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고.
[최초의 드래고니안, 카트란 할리우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아아, 드디어 밖인가.”
용의 피를 이은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되 드래곤인 자.
용의 밤에도 이성을 잃지 않고 본연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존재.
그가 여유롭게 검을 어깨에 올리며 아델라를 바라본다.
“생김새를 보아하니 그쪽이 북부의 성주로군. 옆에는 남부의 성주일 테고.”
이미 바깥소식을 알고 있는지 손끝으로 아델라와 갈라이스를 가리킨 카트란이 어깨를 들썩인다.
명백한 비웃음.
“나를 막기 위해 왔구나. 서부로는 다른 놈들이 갔겠지.”
“말이 많구나. 도마뱀의 피를 이은 자여.”
“큭!”
아델라의 도발에 피식 웃은 그가 땅에 검을 끌며 다가온다.
“기개는 좋다. 그런데 성주라는 자가 남부에 있어도 되는가?”
꾸깃. 아델라의 미간이 좁혀진다.
저놈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지금쯤이면 비어 버린 북부를 향해 동부의 머저리들이 돌진하고 있겠지.”
“뭐라!”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자신이 내려오면 북부가 빈다는 것을.
이블아이는 서부에 있는 에이션트 몬스터를 잡으러 갈 것이라는 것도.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적어도 인간 된 도리로서 동부가 이날 밤만큼은 힘을 합치리라 믿었는데.
‘아무리 숭배자라 한들 이런 멍청이들이!’
아득, 이를 악무는 아델라를 향해 전령이 달려온다.
급하게 달려오는 것이 중요한 소식을 가져온 것이 분명했고.
“전령을 받아라. 내 그 정도는 지켜봐 주마.”
이 상황을 즐기는지 카트란이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분하지만 소식을 확인해야 한다.
빠르게 아델라가 턱짓하자 전령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품에서 편지를 꺼내 외쳤다.
“동부가 북부로 진격했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말.
아델라를 포함한 모든 북부 병력들이 얼굴을 구겼고.
“하하하하! 그것참 좋은 소식이군!”
카트란은 큰 목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전령의 보고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부의 병력들이 드래곤에 의해 전멸했다고 합니다!”
뚝. 카트란의 웃음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