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69화 (669/740)

669화 찌리리 요정

시계탑의 종이 울리고 찾아온 적막.

노동자들이 대부분인 산업 지대와 달리 세금 납부 시기가 찾아왔다고 소란스러워지지는 않았다.

빈민촌이나 그런 곳이었다면 무사히 지나갔다면서 조촐하게나마 파티를 했을 텐데.

이쪽 사람들이야 세금을 못 낼 일이 없으니 별 감흥 없는 거겠지.

물론 내 앞에 있는 거지들은 예외다.

“사, 살았다!”

“이번에는 진짜 위험했는데 형님도 명이 꽤 깁니다?”

“내가 네놈보단 오래 살아야지, 자식아.”

[세금 납부가 완료되었습니다.]

시스템의 선언과 함께 나오는 빛무리.

나야 미리 모아 둔 돈이 있으니 상관없고.

주변에 있는 거지들 또한 내게 받은 돈이 있으니 문제없다.

밖에 있을 거지들?

“휴우! 다행히 잘 전달했습니다!”

파히루의 눈짓을 보고 보따리를 들고 빠져나갔던 녀석이 돌아오는 걸 보니, 이번 세금 납부는 어떻게 잘 끝난 모양.

나도 파히루에게 볼일이 있는 거지, 녀석들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라서 놔뒀다.

억지로 압박을 해 봐야 놈이 돌발 행동을 할 가능성만 높아지니까.

이 정도 배려를 해 줬으면 놈도 슬슬 답을 할 때가 됐다.

“대답은?”

“그게, 저는.”

눈치를 보며 입을 여는 녀석.

경비대를 비롯한 부촌의 주민들이 녀석에게 집중한다.

이내 결정을 내렸는지 녀석이 넙죽 엎드리더니 외쳤다.

“아이고. 공자님! 어찌 그러십니까!”

무릎으로 기어 온 녀석이 내 다리에 매달린다.

혹시 기습인가 싶었으나 그런 건 아니었고.

“이미 이만한 은혜를 베푸셨는데 어찌 또 받겠습니까! 저희도 염치라는 게 있습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겠다는 몸부림이었다.

때 묻고 비쩍 마른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외치는 게 프로 거지 그 자체였다.

물론 그런 것에 넘어갈 내가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말해 봐라.”

“거지라도 은혜는 갚는 법. 귀공에게 보답을 하고 싶습니다!”

허.

작게 헛웃음 쳤다.

내가 놈에게 준 선택지는 2개.

제안을 거절하거나 받아들이거나.

선택지를 제안한다는 건 얼핏 보면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 같지만.

‘할 수 있는 선택을 2개로 좁혀 버리는 거와 같지.’

나도 그 사실을 잘 안다.

그렇기에 등반하면서 주어진 수많은 선택지를 무시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행동했었고.

그 결과 40층대, 선택 구간에서는 ‘새로운 길의 선구자’라는 유형을 받지 않았던가.

놈은 그걸 노린 거다.

내 제안을 듣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의 눈총을 받지 않는 방법.

‘은혜를 받았으니 갚는다.’

여기다 대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일자리를 받는 것?

그런 것까지 바랄 만큼 염치없지 않다고 호소.

동시에 은혜를 갚을 줄 아는 거지니 사람들의 비난을 받을 일도 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나의 물음과는 관계없는 대답이다.

내가 물어본 건 앞으로 먹고살 방법이 있으면 그 일을 하겠냐였으니까.

은혜를 갚는다는 거랑은 결이 다른 이야기였으나.

“그래도 양심이란 게 있는 거지로군.”

“일이 꼬여 길거리에 나앉기는 했지만 은혜도 모르는 짐승은 아니라는 거 아닙니까.”

“살다 살다 저런 말을 하는 거지를 다 보는군.”

어디 세상이 논리로만 흘러가던가.

내 의도가 뭐였든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흐뭇하기만 하면 그만.

이것 참.

평소 내가 하던 짓을 똑같이 당하니, 기분이 묘하네.

여기서 뭐라 해 봤자 이상하게 보일 게 뻔하다.

오케이.

여기서는 한 방 먹었다는 걸 인정하마.

그렇다고 당하기만 할 생각은 없으니 반격의 기회는 잡아야지.

“어떻게 은혜를 갚는다는 거지?”

내 물음은 당연했다.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냐는 거지.

“거지들은 거지 나름대로의 정보통이 있습니다요. 은인께 도움이 될 만한 것도 있죠. 크흠!”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렇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녀석.

정보로 딜을 해 올지는 몰랐는데.

어쩔까.

그냥 상황 모면을 위한 거라면 입 싹 닦고 말 수도 있다.

그럼 뭐. 이 자리에서 바로 들으면 되는 거 아닌가?

“말해 봐라, 어떤 건지.”

“보는 눈이 좀 많은뎁쇼?”

“그건 알아서 해결해야지? 필요하면 적든가.”

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줬다.

놈도 글을 모른다고 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은지 뭔가를 끄덕였고.

“바, 받으시죠.”

놈이 적은 정보를 본 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을 당장 함정에 빠트리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이건.”

이런 정보라면 손해가 아니다.

이 녀석이 아니라면 말해 줄 수 없는 내용이니까.

녀석 슬쩍 옆으로 다가와 중얼거린다.

“이번에는 이 정도로 만족하지?”

만족이라.

“내가 이걸 어떻게 믿고?”

“그분의 이름을 걸겠다.”

“그분이라면.”

“모든 숭배자의 왕.”

그럼 말이 달라지지.

자그마치 플래티넘 등급인 녀석이 멋대로 그놈을 팔지는 않을 테니까.

이것만 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데 말이야.

“하나만 더 묻자.”

진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왜 저 녀석들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거지들을 위해 피의 제단으로 팔려 가는 것.

세금을 대신 벌기 위해 맞아 가며 구걸을 하는 것.

가르티가 내게 준 정보에 의하면 녀석은 정이 많다.

다른 놈들도 아니고 굳이 거지한테?

이 부분이 정말 이해가 안 됐다.

어떻게 보면 순수한 호기심.

녀석이 잠시 입을 다물더니 이내 빠르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자가 가질 수 있는 건 별로 없지.”

뭔 개소리야.

이해가 되지는 않았으나 일단 넘어갔다.

되묻는다고 제대로 된 답변이 올 것 같지는 않았으니.

툭툭. 녀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은혜를 아는 거지로구나. 보답을 바라고 한 선행은 아니지만 특별히 그쪽 체면을 생각해 받아들이지.”

“벼, 별말씀을.”

꾸깃.

얼굴을 구긴 녀석이 이를 간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 자꾸 구기면 주름살만 늘 텐데.

내 얼굴 아니니까 마음대로 쓰라 하자.

‘냥펀과 만나서 이야기할 거리가 늘었군.’

안 그래도 안전한 곳에서 이야기할 게 있었는데 잘됐다.

이왕 이야기하는 김에 이것도 열어 볼까.

인벤토리에 있는 물건을 떠올렸다.

95층으로 넘어가기 전 오필리아에게 받은 상자가 있다.

100층으로 향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거라고 했던가.

잠시 고민했지만 이건 다음으로 미뤘다.

오필리아가 96층에서 열어 보라 한 데는 이유가 있을 터.

다음 층에서 열면 되는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파히루에게 말을 건넸다.

녀석과의 만남은 이쯤에서 마무리할 생각.

“다음에 또 보지.”

“예, 예히. 아무렴요.”

파히루 또한 알고 있을 거다.

나와 다시 마주칠 수밖에 없다는걸.

놈이 찾아오든 내가 찾아가든 누군가는 찾으려 들 테니까.

-타박.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거 보기 드문 훈훈한 광경이구려.”

“오호호. 마음이 따뜻해지네요.”

“신분은 달라도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모습이라. 귀하군요.”

구경하던 놈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하하호호 웃고 휘파람을 불어 댄다.

놈들은 알까.

방금 전, 이 부촌을 밀어 버릴 수 있는 인물 2명이서 서로 한 방씩 찔러 넣었다는 것을.

때에 따라서는 모든 게 박살 날 수도 있던 순간에서 살아남았다는걸.

그건 그거고.

‘저 자식, 혼돈이 지나치게 많은데?’

난 저릿한 어깨를 슬쩍 돌렸다.

잠깐 근처에 있었을 뿐인데 온몸에 끈적한 뭔가가 달라붙은 기분이다.

잡히지 않는 찝찝함에 목을 긁으며 냥펀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 * *

“95층 지배자, 진짜 거지더라. 잠깐 보고 왔어.”

“우웅. 그렇구, 냥?”

냥펀을 만나자마자 있었던 일을 전해 줬다.

가벼운 마음으로 나왔던 녀석이 화들짝 놀란 건 덤.

“사고 친 거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이 녀석아앙!”

“아, 왜 내가 사고 칠 거라고만 생각하는데!”

“전적이 한두 개냐고오옹!”

냅다 멱살을 잡고 흔드는 녀석.

내가 그렇게 사고를 많이 쳤나?

잠시 자기 객관화의 시간을 가졌지만.

“오버하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크게 일을 벌인 적은 있었지만 다 필요한 일들이었다.

결과도 다 좋았고 지금까지 해 왔던 것을 다시 한다 하더라도 비슷한 행보를 걷지 않을까 싶다.

그 모습에 냥펀은 답답한지 손톱을 세웠지만 별수 있나.

‘자고로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하는 법.’

이미 나랑 한 배를 탔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냥 받아들여야지.

“하앙. 그래도 이번에는 큰 사고 안 친 거 같으니 다행이구.”

줄에 걸린 빨래처럼 소파에 엎어진 녀석이 새초롬한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냥? 파히루라는 숭배자 놔둘 건 아니잖앙.”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숭배자는 등반가의 적이니까.

동시에 이번에 마주친 녀석은 보통 놈이 아니다.

시스템과 거래하는 놈이자 숭배자 조직 내에서도 신분이 상당히 높은 존재.

거기에 더불어.

“널브러져 있지 말고 일로 와 봐.”

“왜애애앵. 나 오늘 휴일이란 말이야. 너 때문에 쭉 쉴 수도 없는뎅.”

유연한 몸을 이용해 소파와 한 몸이 된 녀석이 귀찮다며 손을 까딱인다.

꼬리가 달렸다면 소파를 탁탁 치지 않았을까.

나 보고 콘셉트에 잡아먹혔다고 하지만 본인도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자기가 고양이야 뭐야.

조만간 하악질도 하지 않을까 싶다.

“시스템에 의해 세계 멸망이 정해지면 생존자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거 알지?”

“아. 그 NPC가 될 건지 망한 세계에 남을 건지 고르라는 거?”

냥펀도 알고 있을 거다.

상위층에 오르고서 겪었던 비틀린 숲.

그곳에서도 봤었으니까.

멸망한 세계에서 주어지는 단 한 번의 기회.

이대로 멸망한 세계에서 살 것인지 아니면 탑에서나마 목숨을 이어 나갈 것인지.

그중 NPC가 되기로 한 자 중 일부는 숭배자가 된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있었는데.

“처음에는 NPC가 된 이후에 숭배자가 되는 줄 알았거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었고.”

“멸망하기도 전에 숭배자들이 작업 친 적도 있지 않았냥.”

“그것도 있었지.”

숭배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 사이에 섞인 숭배자가 지속적으로 꼬드기거나 NPC로 살다 보니 숭배자에 물들어서 그쪽에 붙는 경우도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플래티넘 등급인 녀석이 준 메시지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멸망한 세계의 생존자를 부르는 건 숭배자들의 왕, 베드록 바알루제 님이다.

숭배자들의 왕.

이게 뜻하는 게 뭔지는 분명했다.

다이아 등급.

90층대 어딘가에 있을 모든 숭배자의 정점.

보통 놈이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거 진짜냥?”

“아마도.”

이건 예상을 뛰어넘는 내용이다.

NPC가 되고자 하는 생존자들을 불러들이는 일.

숭배자들의 왕에게 주어진 역할이 그거라는 건.

‘시스템이 해야 할 일 일부를 담당하는 거야.’

95층에 있는 녀석은 탑의 생산 공장을 관리하고 우두머리는 NPC 영입을 관리한다.

그 과정에서 숭배자들을 골라내는 걸지도 모르지.

“이거대로면 숭배자라는 놈들이랑 시스템이랑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거 같은뎅.”

잠시 인상을 쓰며 고민하는 냥펀.

녀석한테도 충격적인 이야기였을까.

나도 생각이 많아진다.

‘아무리 그래도 시스템이 그만한 권한을 줬을 거 같지는 않단 말이지.’

NPC에게 맡기기에는 지나치게 큰 역할이다.

따로 시스템에게 대가를 지불했다 하더라도 마찬가지.

그나마 99층을 오른 자들이라면 시스템도 대우해 준다.

프램버그만 봐도 해당 세계의 도시를 그대로 가지고 왔으니.

뭐, 그거야 혼돈의 파편이 개입되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도대체 숭배자의 왕은 뭐 하는 놈일까.

상념이 이어지는 타이밍, 냥펀이 입을 열었다.

“흥미롭기는 했지만 대단히 중요한 정보는 아니지 않냥?”

“음?”

“뭔지도 모를 걸 잡고 늘어지는 것보단 확실한 걸 봐야징.”

냥펀이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그 파히루라는 녀석이 숭배자의 왕에 대해 잘 안다는 것.”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놈을 탈탈 털어먹으면 놈에 대해서도 더 알 수 있을 거얌.”

“어차피 싸우게 될 녀석, 미리 정보를 캐 놓으면 좋다는 거군.”

“맞앙.”

고민해 봐야 답도 안 나오는 것보다는 실리를 챙길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라는 거다.

상인다운 사고방식이었고.

“정답이네. 이득이 되는 걸 먼저 챙겨야지.”

나 역시 상인이었다.

아무래도 파히루를 잡으며 뽑아낼 게 더 있을 거 같다.

그건 그거고.

-똑똑.

“냥펀, 안으로 들어가도 될까요?”

“엇. 왔당.”

“빠르군.”

노크 소리에 쪽지를 집어넣었다.

냥펀 역시 언제 엎어져 있었냐는 듯 몸을 일으켜 세운다.

“들어와랏!”

“후후. 그러죠. 기다리게 만들진 않았나요?”

“별로. 만나서 반갑다, 찌리리 요정.”

안으로 들어온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찌리리 요정.

요정 클럽의 리더 격인 여인.

동시에.

‘요정 클럽 내부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괴물.’

어쩌면 내가 만나 본 등반가 중 가장 강할지도 모를 녀석이었다.

찌리리 요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호선을 그리고 있는 찌리리 요정의 눈.

내 손을 맞잡은 그녀의 눈이 천천히 뜨였고.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SSS급 권능, 징벌자의 눈이 당신을 마주합니다.]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반갑게 윙크합니다.]

그녀와 나의 권능이 서로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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