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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689화 (689/740)

689화 문답

가짜 이준석에게 시선이 몰린다.

놈도 버림 패로 쓸 녀석이 이렇게 트롤 짓을 할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한 표정.

찰나의 순간 찡그려졌던 얼굴이 다시 펴진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블아이 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칭한 사람은 분명히 있었으니까요.”

나를 사칭한 놈을 본 건 이준석뿐만이 아니다.

다른 이들도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서 나를 목격했고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제가 생각하기에 범인은 한 명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요?”

앞에 있는 녀석은 범인이 맞다.

정확히는 등반가를 습격한 범인 중 하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놈이 변신하지 않은 이유?

“이자는 노블 나이트를 공격하였고, 변신 능력이 있는 다른 습격자는 파비오를 습격한 겁니다. 그게 합당한 추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변신한 범인은 따로 있으니까.

더불어 녀석의 몸에 문신이 없는 이유도 문제 되지 않는다.

“으음. 확실히.”

“범인이 꼭 한 명이라는 법은 없지.”

“그럼 공범이 있는 건가? 아니면 각자 움직였다던가?”

“따지고 보면 파비오는 원한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잖아.”

“문신이 없는 것도 같은 이유겠군.”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오.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 모인 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잘 빠져나가네.

뭐, 이 정도는 충분히 할 거라 생각했다.

이 녀석은 굉장히 약아빠진 녀석이니까.

오케이.

일단 이것 먼저 확인해 보자.

“거짓말 탐지 능력이 있는 분 계십니까?”

아무리 그럴싸한 변명을 내놓아도 거짓말탐지기 한 방이면 해결되는 법.

96층까지 오른 등반가와 이곳에 살고 있는 NPC들.

이 중에 한 명이라도 거짓말 탐지 능력이 있다면 일은 편해진다.

“자네, 비슷한 게 있지 않았나?”

“거짓말 탐지 능력이 아니야. 유도 심문이지.”

“으음. 아티팩트가 있긴 한데 망가져서.”

“그리 흔한 능력은 아니잖아.”

다른 이들도 이쪽이 확실하다 느꼈는지 서로를 살폈지만 나오는 이는 없었다.

아쉽게 됐군.

있으면 좋긴 하지만 없으면 어쩔 수 없지.

말마따나 거짓말 탐지 능력이나 아이템은 귀한 물건이니까.

아예 방법은 없는 건 아니다.

“계약서를 사용해 보자. 그럼 되잖앙.”

냥펀이 나선다.

그러면서 살짝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찡긋한다.

“진실만 말하는 것으로. 질문은 6개까지. 이 정도면 큰 페널티 없이 쓸 수 있을 거얌.”

“오오. 그런 방법이!”

“확실히 그거면 알 수 있겠군요.”

계약서.

시스템이 보증해 주는 계약을 사용한다면 가능하다.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불가합니다. 저자가 동의할 리가 없으니까요.”

이준석이 말에 주변이 조용해진다.

계약서의 문제 하나.

상호 간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당연히 범인으로 잡힌 녀석이 동의해 줄 리가 없다는 것.

상관없지.

이미 스스로 자백까지 한 녀석인데.

굳이 녀석이 범인임을 재검증할 필요는 없다.

내가 원하는 건 다른 녀석이었고.

“쟤 말구. 이준석이 말한 게 맞는지 확인 좀 해 보장.”

냥펀은 내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우리가 놈을 파헤치는 동안 핥짝이와 탈모맨은 진짜 이준석을 찾고 있을 터.

만약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진짜 이준석을 찾아내면 우리의 승리다.

‘충분히 가능성 있어.’

난 여전히 이준석이 살아 있을 거라고 믿는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이준석은 죽은 적이 거의 없다.

무리하게 등반하지도 않았고 준비는 철저히 했다.

거기다가.

‘내가 숭배자였다면 절대 이준석을 죽이지 않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준석으로 변장한 상태 아닌가.

죽이면 뭐 할까.

그럼 다시 96층에서 부활할 수 있다.

‘이곳은 안전지대가 5개지.’

어떤 안전지대로 떨어질지는 숭배자들도 알 수 없다.

아니.

현재는 안전지대에 있는 인원 제한이 다 차 버렸을 테니 무법지대로 떨어진다.

아무리 숭배자가 곳곳에 뿌려져 있다 해도 96층 전체를 감시할 수는 없다.

그러니 붙잡고 있을 거다.

그게 타당한 선택지였으며 안전지대 밖으로는 나가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혹여나 자살이라도 한다면 곤란해질 테니까.

회복 옵션이 달려 있는 안전지대 내부에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여기서 가짜 이준석을 붙잡고 있는 이유 중 하나.

‘최대한 시간을 끌 테니까 찾아 줘.’

핥짝이와 탈모맨이 진짜 이준석을 구할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스읍.

숨을 고르며 가짜 이준석을 바라봤다.

냥펀이 나섰다.

계약과 관련해서는 냥펀이 나보다 한 수 위.

나 또한 할 수는 있었지만.

혹시라도 녀석이 나보고 ‘쁘띠공듀지요?’ 이딴 질문을 할지도 몰라서.

그냥 내가 쪽팔려서 그러는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내 쪽으로 몰아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덕춘이가 나를 노려보길래 슬쩍 눈을 가려 줬다.

눈 예쁘게 떠야지, 덕춘아.

“저 녀석이라면 몰라도 너는 거절할 이유가 없잖앙.”

냥펀이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간다.

녀석이 스스로 이준석을 자처했으니 거절할 명분이 없다.

놈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계약까지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이야기해 드릴 수 있습니다.”

가증스럽게도 서운한 티를 팍팍 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긴 한데.”

“으음. 회장님도 도우려는 거잖아?”

연합 사람들 내부에서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긴 했으나.

“다른 분도 아니고 냥펀인데 이유가 있겠지.”

“이블아이도 순순히 용의자로 있으니까.”

“깔끔하면 좋지.”

적어도 연합 내부에서 인지도가 높은 건 냥펀과 나다.

떨떠름할지언정 지지해 준다는 것.

분위기를 읽었는지 작게 숨을 내뱉은 이준석이 앞으로 나온다.

“저 또한 용의자가 될 수 있다는 걸 부인하지 않습니다. 계약. 하겠습니다.”

놈이 말하는 동안 숭배자를 살폈다.

뭔가 반응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으며.

‘동요하고 있군.’

놈은 가짜 이준석의 정체를 알고 있다.

적어도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언질이라도 받았겠지.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저는 새벽 3시에 이블아이 님을 봤고 그 이후 파비오 씨가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질문은 계약하고 나서 할겡.”

이준석이 선수를 쳤지만 냥펀은 가볍게 흘려 냈다.

자연스럽게 질문의 흐름을 목격담으로 끌고 가려던 수작질이 실패한 것.

녀석의 말을 끊은 냥펀이 계약서을 발동시켰다.

화조국을 통해 구매한 검증된 계약서였고.

“질문은 6개. 오가며 질문을 하고 침묵할 수 있당. 단, 침묵은 단 두 번. 이하 내용은 표준 문답 계약서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당.”

이런 식으로 문답을 주고받는 건 드물지 않다.

서로에게 얻어 내고 싶은 정보가 있을 때 종종 쓰이는 형식이니까.

당연히 표준 계약 내용이 있다.

단,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으니.

“특약으로 거짓을 고한 자는 무력화에 빠지는 것으로. 동의하냥?”

“…동의합니다.”

만약 이곳에서 놈의 정체가 까발려진다면 붙잡아야 한다.

그것을 우려해 무력화 조항을 삽입한 것.

[계약이 성립됩니다!]

-파스스스.

빛과 함께 사라지는 계약서.

시스템의 공증이 있는 계약이 시작되었다.

마주 보는 둘.

지금부터는 냥펀이 집중해야 한다.

-꾸우욱.

난 검집을 움켜잡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

조용해진 공간, 긴장감이 맴돈다.

“질문은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등반가를 습격한 범인을 잡고 싶으니까요.”

그의 발언에 등반가, NPC 할 거 없이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물론 난 그렇지 않았다.

저런 말에 의미를 넣을 필요는 없다.

문답은.

‘상대방의 질문에만 진실을 말하면 되니까.’

그 전에는 거짓말을 하든 가식을 떨든 상관없다.

“냥펀 님은 저를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유력한 후보로 보고 있징.”

[상대방의 답변은 진실입니다.]

“그거 서운한 이야기네요.”

대놓고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 녀석.

“그동안 연합을 위해 열심히 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저라도 마음이 아픕니다.”

자연스럽게 여론 몰이까지.

숭배자답다고 해야 하나.

등반가와 NPC의 갈등을 만들기 힘들 것 같으니 연합을 갈라 놓으려 한다.

“제가 다른 등반가들을 건들 리가…….”

“내 차례얌.”

바로 녀석의 말을 끊는 냥펀.

저 작은 머릿속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떠오르고 사라지고 있을 거다.

질문은 6개.

침묵은 최대 2개.

작정한다면 얻어 낼 수 있는 답변은 4개가 고작이다.

질문마다 깔끔하게 가야 한다.

“노블 나이트와 파비오를 공격한 범인은 누구지?”

“침묵하겠습니다.”

칼처럼 빠르게 이준석이 답한다.

[상대방이 침묵권을 사용했습니다.]

싸해지는 분위기.

냥펀이 노리는 건 분명했다.

나와 멤버들은 저 녀석이 진짜 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근본을 찌른 거다.

그 상황에서 침묵을 한다?

누가 봐도 수상한 행동이다.

“범인이 아닐까 싶은 이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입니다. 진실이 아니죠. 아시다시피 거짓말을 하면 페널티가 들어옵니다. 더 많은 답변을 위해서라도 침묵해야 했습니다.”

연습이라도 한 건지 말이 매끄럽다.

틀린 말도 아니었고.

혹여나 무력화가 되면 문답은 종료다.

스스로의 실수로 페널티를 받을 생각은 없다는 의지에 표현이기도 했다.

“맞는 말이군.”

“가끔 엉뚱한 짓 하다가 처벌받는 멍청이도 있지.”

“우리 회장님은 아니지만 말이야!”

아니다.

놈은 교묘하게 피해 냈다.

굳이 이런 질문에 침묵권까지 쓸 필요가 없다.

‘나는 범인을 모른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으니까.

냥펀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제 차례군요. 냥펀 님은 저를 싫어하시나요? 저는 냥펀 님을 좋아합니다. 다른 멤버분들과 마찬가지로요.”

“나도 이준석이 좋앙. 고맙기도 하궁. 그래서 이러는 거얌.”

“…다행이군요.”

[상대방의 답변은 진실입니다.]

이 녀석.

일부러 감정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냥펀이 아니었다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넘기지 못했을 거다.

‘이준석이 좋다.’가 아니라 ‘네가 좋다.’라고 답했다면 거짓이 됐을 테니.

눈앞에 있는 녀석은 가짜니까.

“내 차례넹. 넌 탑 숭배자냥?”

“저는 탑 따위를 숭배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답변은 진실입니다.]

“쁘띠공듀 님은 숭배하고 찬양하지만요!”

“오오오! 그렇지!”

“외쳐 봅시다! 공듀!”

“사랑!”

“평화!”

“쁘-멘.”

놈의 발언에 연합 사람들이 환호한다.

영악한 새끼.

탑 숭배자가 아니라고 하는 게 아니라 탑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말하다니.

굳이 탑을 숭배하지 않아도 숭배자에 가담하는 건 문제없다.

“제 차례. 공듀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침묵권 쓸겡.”

“아쉽군요. 꼭 뵙고 싶었는데요.”

“저기, 잡혀 있는 녀석은 거짓말을 했나?”

“침묵하겠습니다. 아까 전 질문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내용이니까요.”

.

.

.

서로가 함정을 품고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 사담.

칼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문장 하나하나마다 날카로움을 품고 있다.

마주 웃으며 대중의 분위기와 여론은 만들어 내고 허점을 파헤친다.

상대가 한 말의 논리와 감정을 분해하고 조립하며 단서를 찾는다.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려는 건지 중간중간 깊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리고.

“이블아이 님은 쁘띠공듀인가요?”

“침묵권 쓸 거얌. 논지 흐리면 안 됑. 우린 지금 살인자를 찾고 있는 거라구.”

“그렇죠. 제가 개인적인 욕심을 부렸습니다.”

녀석이 은근슬쩍 날 암살하려 했지만 냥펀이 잘 막아 줬다.

그럼에도 내 쪽으로 시선이 오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오히려 가슴을 펴고 당당히 섰다.

자랑은 아니지만 뻔뻔함은 지지 않는다.

‘냥펀이 나서서 다행이야.’

내가 문답했다면 저런 질문만 던졌을 놈이다.

침묵권은 2개가 끝이었고, 내 정체를 밝히는 것으로 논점을 흐릴 수 있으니까.

진짜 이준석만 찾아봐라. 넌 진짜 뒈졌다.

“흐으음.”

작게 콧소리를 낸 냥펀이 고개를 까딱였다.

방금 것으로 선공을 가한 이준석의 질문권은 모두 사용됐다.

남은 건 냥펀의 질문 하나.

냥펀이 녀석을 응시한다.

“지금 이준석은 어디에 있징?”

강수다.

녀석에게 우리가 놈을 가짜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동시에 마지막까지 아껴 둔 질문이기도 했다.

놈이 가지고 있는 침묵권을 모두 쓸 때까지 함정 질문을 뱉어 낸 이유.

밝혀라.

네가 가지고 있는 진실을.

놀랐는지 녀석이 눈을 크게 뜬다.

“하하하하! 무슨 질문입니까. 이준석이 어디에 있냐니.”

폭소하는 가짜가 눈가를 훔치며 스스로를 가리킨다.

“이준석, 여기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그의 진실을 기다렸다.

[상대방의 답변은 진실입니다.]

“…으엥?”

시스템의 선언에 냥펀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순간, 냥펀의 눈이 흔들렸고.

“비켜!”

동시에 난 앞으로 치고 나갔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검을 쥔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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