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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704화 (704/740)

704화 유적의 거인

인간으로 의태 한 해양 몬스터라.

안개 속으로 진입 후 가장 먼저 만났던 녀석은 몸통에서 집게발이 나왔다.

그거 자체로는 괜찮았다.

온갖 해괴한 몬스터가 있는 곳이 탑이었고, 90층대에 접어든 만큼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카드드득!

-콰아아앙!

“암만 봐도 일반적인 놈들이 아니란 말이지.”

하나같이 상상을 뛰어넘는 위력을 자랑했다.

검을 쑤시고 비틀고 베어 내도 무시하고 나를 잡으러 든다.

중간에 공격을 허용하기까지 했다.

안개에 뒤덮인 마을, 그 안에 사는 주민들은 가히 괴물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다.

“죽을 때 한마디도 안 하는 게 더 짜증 나고.”

해치운 놈들의 몸을 걷어찼다.

갈라진 배로 튀어나온 갑각류의 다리.

생선 대가리가 송곳니를 자랑하며 입을 벌리기도 했고 어떤 놈은 촉수를 꿈틀거리기도 했다.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한 채 죽은 놈들은 허망한 눈으로 날 바라볼 뿐이다.

놈들에게서 올라오는 비린내와 악취.

오염된 바다 특유의 썩은 내와 가스의 느끼하면서도 역한 냄새.

그 속에서 섞여 알게 모르게 스며드는 독과 환각제까지.

지금도 머리가 울렁인다.

신경을 건드는 성질이라도 있는지 몸이 붕 뜨는 기분이기도 하고.

제멋대로 일렁이는 건물과 호롱불에 나까지 흔들리는 것 같다.

어쩌면 진짜 비틀거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에에.”

“아, 그래. 또 있네.”

지금까지 몇 마리를 해치웠더라.

잘 모르겠다.

중간부터 세지도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아도 스무 마리는 잡았을 텐데 아직 마을에는 더 많은 주민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증스럽게도 사람을 연기하며.

길을 따라 펼쳐진 좌판과 노점상.

길거리 음식을 파는 이들 사이로 돌아다니는 부모와 아이.

안개 너머에서 봤을 때는 그나마 나았다.

놈이 보여 주는 환상이라고 생각했으니.

여전히 환각 같기는 하다만 지금은 더 노골적이다.

“소꿉놀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어디서 주워 왔을 뼈와 돌멩이.

썩어 문드러진 무언가를 아이스크림처럼 건네고 씹어 대는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단란한 가정이라도 표현하고 싶었나.

그렇다면 내 평가는 빵점이다.

[오로라 빔(SSS) Lv.6]

-찌유우우웅!

오색 빛깔을 자랑하는 광선이 놈들에게 들이닥친다.

뒤집히는 땅과 머리를 잃고 자빠지는 놈.

비명을 지르듯 한껏 입을 벌리면서도 결코 목소리를 내지 않는 모습에 발을 박찼다.

마치 날 괴물로 보듯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도망친다.

“뭘 그렇게 봐? 너희도 모습 드러내야지.”

-서걱.

검을 그었다.

썩은 무언가를 팔고 있던 노점상.

놈의 팔이 잘리며 거대한 지느러미가 돋아난다.

-쿠르르륵.

사람의 덩치에서 나올 수 없는 지느러미.

얼핏 날개처럼 보였으나 그 두께와 가장자리에 돋아난 돌기는 지느러미가 맞았다.

-쿠웅!

재차 휘두른 검을 휘두르자 놈 또한 지느러미를 내밀었다.

절대적인 무게를 이용해 나를 밀어 버릴 심산이었던 것 같다만.

[만근추환(S)]

[중량이 늘어납니다!]

-끼긱. 끼이이익.

나도 무게 싸움에서는 지지 않는다.

크게 밀려나던 몸이 점차 멈춘다.

땅에 깊게 다리를 박고 버티자 놈이 부들거리며 힘을 준다.

힘 대결을 원하는 건가?

아니면 악수라도 하자고?

원한다면야.

[달라붙기(S) Lv.MAX]

[일렉트릭 쇼크(SS) Lv.10]

-파지지지직!

강렬한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감전되어 온몸을 떠는 녀석.

내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어림도 없다.

살가죽이 타오르고 체액인지 진액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피부 밖으로 흘러내릴 때까지 놈을 지졌다.

-콰아앙!

발작적으로 바닥을 내리찍는 녀석.

땅이 조각나며 파편이 튄다.

팔로 눈을 가렸다.

같잖은 수를.

인상을 쓰며 놈을 끌어당겼다.

한 손에 들어오는 얼굴을 강하게 움켜잡았고.

[파이어 밤(SSS) Lv.10]

-콰아아아아앙!

그대로 터트렸다.

시커먼 연기와 함께 머리가 사라진 녀석이 고꾸라진다.

어차피 소리도 못 지르는 놈들이니 머리는 필요 없겠지.

놈이 발악에 날아온 파편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곱게 죽지, 귀찮게 하고 있어.”

아직 남은 놈들도 많은…….

우뚝.

검을 쥐고 있던 난 몸을 굳혔다.

없다.

나를 물어뜯고 공격해야 할 것들이 나를 피해 도망치고 있다.

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던 놈을 품에 안고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이 아니다.

아이의 얼굴은 생선으로 변해 파편이 박힌 이마에서 피를 흘려 대고 있었으니까.

설마.

“시간을 끈 건가.”

머리를 잃은 놈을 내려다봤다.

허.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의도한 것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하나는 확실했다.

기분이 몹시 더럽다.

들끓는 살의에 검을 고쳐 쥐는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감정 기복이 커졌다.’

충분히 화가 날 상황인 건 맞지만 평소 나답지 않다.

특히나 전투에 앞서 분노에 휩싸인다?

그동안 상대해 왔던 이들을 도발해 왔던 만큼 잘 알고 있다.

실수 한 번에 죽을 수 있는 전투에서 감정적인 동요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그런데 내가 이렇게 행동한다?

“안개에 감정을 부추기는 효과도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환경 탓일지도 모르겠다.

이곳은 아무리 포장해도 좋은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보다.

“다른 녀석들도 안으로 들어왔을 텐데.”

신호탄을 쐈다.

나뿐만이 아니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안개 속으로 들어간 이들도 있다.

나 역시 다른 이들이 쏜 신호탄을 확인하고 온 거였으니까.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곳.

시간 개념이 사라지기 충분하다.

어쩐지 스마일캡이 시계를 차고 있더라니.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안개도 안개지만.

‘에렘바트가 직접 나서면 그때는 시계도 의미 없어.’

한번 마주치지 않았던가.

찰나의 순간이라 생각했지만 실제로 흐른 시간은 몇 시간이었다.

여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땅을 밟고 있지만 어쩌면 지금도 물이 차오르고 있을지 몰랐다.

목까지 차오른 걸 수도 있겠지.

왠지 모르게 답답하고 몸이 무거운 느낌이 드는 원인일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이곳은 중앙섬에 붙어 있는 곳이라 물이 차오르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만.

-피유우웅.

저 멀리 초록빛 연기가 보였다.

신호탄?

안개에 섞여 금세 빛을 잃었지만 신호탄이 분명하다.

에렘바트가 만들어 버린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면 바다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겠지.

어떻게 할 것인가.

“가자.”

“그에에.”

고민은 짧았다.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만 진짜 신호를 보낸 걸 수도 있으니.

진짜 바다로 불러오는 거라도 상관없다.

물속에 잠겨 수중 호흡 스킬이 발동되는 순간 빠져나가면 되니까.

이 망할 안개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건지는 나중에 생각하자.

정 아니다 싶으면 한 번 죽지 뭐.

“이럴 때 쓰라고 코인이 있는 건데.”

뭐든 해 봐라.

나 또한 그럴 테니.

-파악!

신호탄이 보인 곳으로 몸을 날렸다.

중간에 마주치는 놈들을 무시하며 현실보다 월등히 넓어진 마을을 가로질렀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양식의 조각품이 널린, 넓은 광장과 신전을 지났고.

“저게 뭐야.”

그 위에서 날뛰는 거인을 볼 수 있었다.

거인.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지금까지 봤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들.

보다 정교하게 꾸민 인간의 형상이 날뛰고 있었으며.

“크으으읍! 쿨럭!”

놈에게 맞은 화무선이 벼락처럼 땅에 꽂히는 것이 보였다.

신호탄을 쏜 게 화무선인가?

화무선 혼자 저놈들을 상대하고 있던 걸까.

저 정도의 덩치가 싸우는 거라면 멀리서도 보여야 정상이다.

건물을 부숴 대는 만큼 소음이 퍼져야 하는데.

‘나도 모르고 있었어.’

나 또한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개가 눈을 가리고 소리를 먹었다.

이곳의 주인은.

“침묵과 시선의 에렘바트.”

그 녀석이니까.

-쿠웅. 쿵.

거인들이 걸어 나온다.

놈들을 묶기 위함인가.

수십 미터를 자랑하는 이들의 몸을 타며 움직이는 누군가가 보였다.

그녀가 움직이는 곳을 따라 커다란 구멍이 생기며 썩은 피가 뿜어져 나온다.

“송곳 요정!”

그녀의 눈길이 내 쪽으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대답은 없었다.

그럴 여유 자체가 없었으니까.

잠시라도 멈추면 당한다.

[무지개다리(S)]

-촤아아아악!

송곳 요정이 상대하는 놈을 향해 무지개다리를 사용했다.

최고 속도로 뻗어 나가는 다리.

-뻐어어억!

이동 중 파괴 불가 옵션을 가진 무지개다리가 송곳 요정에게 휘둘러진 주먹을 막았다.

거세게 진동하는 무지개다리.

그 파편이 튀었다.

완전히 부서진 건 아니다.

하지만 금이 가고 깨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껏 없던 상황이 놀라웠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놈들에게서 느껴지는 혼돈.

혼돈이 규칙을 깨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으니까.

파괴 불가 옵션 일부를 무시한 거겠지.

[날개 없는 천사의 왼쪽 날개(SSS)를 착용합니다!]

[마왕의 오른쪽 날개(SSS)를 착용합니다!]

날개를 활짝 펼치며 검강을 발현했다.

마력을 머금고 몸집을 불리는 검.

“저리 꺼져!”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검강]

[영혼 찢기(SSS) Lv.5]

-촤아아악!

-찌직. 찌지직!

놈의 팔을 베는 것과 동시에 영혼이 찢기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 힘이 풀린 놈의 팔이 축 처진다.

“나이스, 이블아이!”

땀에 전 머리를 넘긴 송곳 요정이 주먹을 뻗는다.

그 환한 미소에 반응하고 싶었지만, 난 이상을 감지했다.

“피해!”

반쯤은 본능적인.

그동안 쌓아 온 위기 감지 능력에 소리 질렀다.

“어?”

힘없이 떨어졌던 거인의 팔이 다시 솟더니 그대로 송곳 요정을 움켜잡았다.

파이어 밤을 터트려 놈의 팔을 멈추려 했지만 놈은 굳건했고.

[달라붙기(S) Lv.MAX]

[되갚기(SSS) Lv.5]

-쿠구구궁.

-콰아아아아앙!

온몸으로 놈의 팔에 달라붙어 되갚기를 사용했다.

단일 화력으로는 가장 강력한 일격.

일순간 안개가 물러설 정도의 파동이 퍼져 나간다.

검강과 영혼 찢기에도 움직이던 녀석의 팔이 그대로 터져 떨어진다.

-쿠우우웅.

바닥에 처박힌 팔뚝.

그것만으로도 고속버스 몇 개는 합쳐야 할 사이즈다.

그때까지도 쥐고 있던 주먹 사이로 송곳 요정이 몸을 비틀었으나 그것도 잠시.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었다.

“덕춘아!”

“그에엑!”

직접 가서 살피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팔 한짝을 잃고도 거인은 멈추지 않았으니.

회복이라면 나보다 덕춘이가 훨씬 낫다.

-찌직. 찌지직.

하늘을 날며 놈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빈틈이 보일 때마다 검을 꽂아 넣는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검을 휘두를 때마다 영혼 찢기를 사용했다.

놈의 팔을 베었을 때의 미묘한 감각.

‘이 녀석, 영혼이 하나가 아니다.’

단번에 찢어지는 느낌이 아니었다.

여러 개의 영혼 조각을 같이 찢는 느낌이었지.

놈이 팔을 곧장 움직일 수 있던 것 역시 같은 이유일 터.

도대체 어떤 괴물을 만든 거냐.

[만근추환]

-쿠우우웅!

놈의 어깨를 짓눌렀다.

예상치 못한 무게에 놈의 다리가 휘청거린다.

타이밍에 맞춰 오로라 빔.

-쿠구구궁!

오금이 꿰뚫린 녀석이 한쪽 무릎을 꿇는다.

후웅.

날파리를 잡듯 팔을 내뻗는 녀석의 손을 피해 몸을 뒤집었다.

내가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가자 바람이 불어온다.

그것만으로도 균형이 흔들릴 지경이었으나.

[프로즌 브레이크(SS) Lv.5]

[달라붙기(S) Lv.MAX]

놈의 몸 일부를 얼리며 몸을 고정.

달라붙기로 내가 만든 얼음길을 달렸다.

-콰아앙!

등 뒤로 터트린 파이어 밤.

그 반발력에 몸을 맡기며 회전했다.

온몸의 근육을 쥐어짜 내며 휘두른 검.

마력을 쏟아 만든 십여 미터의 검강이 번뜩였고.

-콰드드드드득!

섬광과 함께 놈의 목이 잘렸다.

썩은 피가 뿜어지며 비처럼 내린다.

허물어지는 거체를 박차고 다시 날아올랐다.

바닥을 구르는 놈의 머리.

낯이 익다.

“유적지의 영웅.”

유적지 심부에 있던 수많은 조각상.

그곳에 있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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