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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726화 (726/740)

726화 붉은 불꽃

팔라딘의 방호 아래, 모든 공격이 뮬랑 카센에게 고정되는 이적.

주어진 기회에서 낭비 없이 공격을 쏟아붓는 오필리아의 위세는 굉장했으나 난 보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빛줄기가 뮬랑 카센을 고정했던 그 순간.

“멍 때리지 말고 막아!”

유유히 빛기둥을 벗어나 클레이모어를 내지르는 녀석을.

너무나도 쉽게, 노블 나이트가 진을 만들어 짜낸 집단 스킬을 무시하고 공격에 나섰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일격 따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모습이었고.

-카아아아앙!

공기를 찢는 굉음과 함께 쏘아졌던 오필리아의 검이 꺾였다.

강한 반발력으로 치솟은 검격이 하늘로 올라가며 빛이 뿌려진다.

섬광과도 같은 짧은 찰나.

-구웅!

일대가 중압감에 눌렸다.

가뜩이나 부실했던 지반이 뭉개지며 노블 나이트가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한다.

그 짧은 순간을 노리고 다시금 들어오는 징벌.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번뜩입니다!]

뮬랑 카센의 검이 명확하게 보인다.

오감을 속이며 들어오는 검로는 정직했으나 곧았고, 그 어떠한 타협도 불허하는 완고함이 있었다.

그 느낌을 표현하자면.

‘결과를 정해 놓은 검.’

보아도 피할 수 없고, 막아도 뚫리는 그런 검.

노블 나이트가 방패를 들어 올리며 방어 태세를 갖춘다.

견고했으나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뚫린다.’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크하압!”

“진형을 무너트리지 마라!”

“몸으로라도 버텨야 한다!”

어떻게 방어가 뚫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혼돈의 파편이 부리는 이능이 합당한지를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저 녀석은 공격을 날렸고.

그것을 막는 건 무의미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는 것.

이 사실만 알면 된다.

말도 안 되는 현상이 벌어지는 원인이 혼돈 때문이라는 것도.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발휘됩니다!]

-카가가가각!

거칠게 검을 휘둘렀다.

묵직한 감각과 함께 어떻게든 내게 파고들려는 힘이 느껴졌지만 딱 그 정도다.

뚫리기에는.

부러지기에는.

-콰아앙!

내 검과 힘이 너무 단단하다.

단단할 거 말고는 딱히 옵션이랄 게 없는 혼돈검.

오히려 그렇기에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는 데 무리가 없는 검.

“쳐 낼 만하네.”

욱신거리는 손목을 돌려 풀며 허공에 떠오른 녀석을 바라봤다.

여전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일렁이는 빛의 날개가 전보다 더 거칠어진 거 같기도 하고.

하늘에 저러고 있으니 형광등 느낌도 난다.

빛이 아주 센 형광등.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오필리아.”

“이블아이,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뭐 하는 거지?”

그녀의 말을 딱 끊고 물었다.

“제대로 할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니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게 무슨 말이냐, 이블아이!”

“오필리아 님이 쌓아 온 위업이 보이지 않느냐!”

내 발언에 노블 나이트가 발끈했지만 함부로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오필리아의 안전이었고 지금은 전투를 치르는 중이었으니까.

입을 열심히 놀리면서도 진형은 제대로 갖추고 있다.

물론, 지금도 대단하기는 했다.

뮬랑 카센의 공격에 방어가 뚫렸음에도 낙오된 사람이 없다.

부상을 당한 이들은 있었으나.

-스스스스.

실시간으로 회복되고 있다.

중첩된 버프와 축복, 집단으로 이루어 내는 스킬의 효과 덕분이겠지.

이 정도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 보통 힘든 게 아니었을 거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오필리아가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지금 네 모습. 천사화 한 거 아니야?”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력.

그 농도가 다르다.

단순히 신성력이 많은 게 아니라 신성력을 담는 데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바뀌었다.

원체 가진 신성력이 많아 그냥 보면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

오필리아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나도 비슷한 걸 하거든. 좀 다르지만.”

내가 하는 악마화와는 외형도 사용하는 힘도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혼돈의 파편을 상대하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것.

악마화를 하면 혼돈을 보다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마기라는 에너지가 혼돈과 가장 유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반명 신성력은?

‘굳이 따지자면 혼돈과 가장 안 맞지.’

마기랑 상극인 에너지니까.

그 성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만약 거기에 혼돈까지 섞어 사용한다면?

혼돈을 거부하는 능력치가 대폭 상승한다.

즉.

“혼돈을 부리려 하지 마. 네가 쓰는 거랑은 방향성이 달라. 차라리 네 영역을 넓혀.”

혼돈의 파편의 힘을 억누르는 능력이 생긴다는 거다.

혼돈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혼돈의 파편에게 유효한 대미지를 입히지 못하는 것처럼.

오필리아는 혼돈을 기반으로 사용하는 힘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오필리아는 모든 천사들의 사랑을 받는 자.

나와 달리 천사화를 한다고 리바운드가 큰 것도 아니다.

-꾸욱.

주먹을 쥐었다 폈다.

마치 손안에 쥐고 있던 풍선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내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눈치챈 오필리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까지 온 그녀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차렸겠지.

“집중해. 대충 하면 다 죽는 거야.”

검 끝을 뮬랑 카센에게 향하며 집중했다.

오필리아 또한 뭔가 할 말이 있는 거 같았지만 이 정도에 흐트러질 녀석은 아니었다.

“여기서 잡도록 하죠. 그 편이 가장 좋을 거예요.”

-우우우우웅!

그 말과 함께 오필리아의 신성력이 무거워진다.

밀도가 올라가며 마치 물에 잠긴 듯한 기분이 든다.

확장된 영역이 삽시간에 공간을 집어삼켰고.

-츠즈즈즈즈!

스파크가 튀며 뮬랑 카센에게 변화가 이루어졌다.

돔 형태로 깔린 오필리아의 영역.

역시. 방향성만 잡아 줘도 빠르게 알아듣는다.

【으음.】

처음으로 뮬랑 카센이 불쾌한 기색을 보인다.

오필리아의 영역에서는 혼돈의 파편도 자유로울 수 없다.

증거로 허공에서 부유하고 있던 뮬랑 카센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더니 지상 2m 부근에 멈춰 선다.

등 뒤로 뻗은 빛의 날개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익숙해지면 더 강해지겠군.’

시간이 흐르면 오필리아의 능력도 완숙해질 거다.

아직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걸로 도주하지는 못할 거예요.”

혼돈이 일부 제한된 상황에서는 녀석도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거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신경 쓰지 말고 퍼부어. 알아서 몸을 뺄 테니까.”

“마음껏 날뛰세요.”

“그래.”

-콰앙!

그 말을 끝으로 허공으로 치솟았다.

지상은 오필리아에게 맡긴다.

위아래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구구구궁!

노블 나이트의 진격.

단단한 방어선을 기반으로 오필리아가 마음껏 공격을 넣었고.

그들이 불러낸 여섯 천사 또한 후방에서 각자의 무기를 들고 내리찍었다.

-콰앙!

숫자부터 밀리건만 뮬랑 카센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침착하게 클레이모어를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담담하지만 정확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처럼 완벽히 움직이는 검격은 경이로울 수준.

혼돈의 힘이 옅어진 지금, 뮬랑 카센과의 전투는 개인 기량이 중요한 법.

흔들어야 한다.

-쐐애애애액!

하늘 높이 치솟다가 우뚝.

정점에서 추락하듯 떨어졌다.

중력에 힘을 맡기며 어떠한 감속도 없이 검을 찔러 들었다.

하나의 선이 되어 이어진 일격.

빙글.

-쿠우우웅!

몸을 반 바퀴 회전한 뮬랑 카센이 클레이모어를 올려 친다.

부드러운 반월을 그리며 혼돈검을 밀어낸다.

엄청난 완력.

그리고 대담함.

내 공격을 막아 내느라 생기는 빈틈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고.

“지금이다!”

“찔러!”

빈틈을 놓치지 않고 노블 나이트가 타워 실드 밖으로 창을 찔러 넣었다.

“우오오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여섯 천사도 마찬가지.

거대한 병장기가 모든 퇴로를 틀어막으며 들어온다.

여기에 파이어 밤.

-콰아아앙!

폭발을 일으켜 몸을 빼내는 동시에 시야를 가렸다.

강렬한 열기에 바닥마저 흐물거렸으나.

-움찔.

어째선지 그녀가 웃고 있다고 느꼈다.

지금까지 보여 준 것과 달리 온화하게.

그 시선은 내게 향해 있었다.

【백염은 꺼지지 않았다.】

뇌리에 박히는 목소리.

“…뭐?”

-지이이이잉!

내가 반문하기도 전에 귀를 때리는 굉음이 울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높고도 강한 소음!

그와 함께 섬광탄처럼 터지는 백색 광채까지.

-퍼석!

-파사사삭!

거대한 천사의 몸에 금이 가더니 터지듯 깨져 나갔다.

빛으로 산화되어 흩어지는 천사 사이로 보이는 노블 나이트.

밀도 있게 쌓인 방패가 깨지며 피가 튀어 오른다.

찰나의 순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

중요한 건 뚫렸다는 것이고.

“오필리아 님을 지켜라!”

“방어해!”

음속을 넘어 그어진 클레이모어를 막기 위해 노블 나이트가 몸을 던진다.

그의 몸이 반으로 갈라진다.

껴안듯 오필리아를 붙잡고 대피하는 노블 나이트와 그의 죽음에 분노한 오필리아의 검격.

선명한 살의가 빛이 되어 뮬랑 카센을 베어 낸다.

-푸화아악!

처음으로 상처를 입은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번뜩입니다!]

[검강]

[절삭(SSS) Lv.6]

[영혼찢기(SSS) Lv.7]

십여 미터로 늘어난 검.

푸르게 타오르는 마나의 칼날이 떨어지는 순간.

-지이이잉!

뮬랑 카센의 등에 돋아난 빛의 날개가 진동했다.

거대한 파장과 함께 퍼지는 빛무리.

공간이 일그러지며 검이 막힌다.

기껏해야 날개 하나를 반쯤 도려냈을까.

이어지는 힘겨루기.

팔이 떨린다.

강력한 진동은 그 자체로도 무기였으니.

-까드드득!

여파만으로 펠라인 세트의 건틀릿과 완갑이 부서진다.

혼돈검이 아니었다면 저 진동에 노출되는 순간 무기가 가루가 됐을 거다.

【…너는 아니다. 구원자를 자청하는 자여.】

나직이 들리는 목소리.

뮬랑 카센이 아주 조금.

등을 돌렸다.

그녀는 뭔가를 끌어안고 있었다.

오필리아의 공격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챙긴 후보자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뮬랑 카센의 피인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

-화아아.

후보자가 붉은 불꽃이 되어 흩날린다.

피처럼 붉게.

흔적처럼 연기를 날리며.

여전히 대치 중이었으나 뮬랑 카센의 시선을 허공 어딘가에 향해 있었으며.

-지이이잉!

날개의 진동이 더욱 강해지는 순간.

-콰아아앙!

뮬랑 카센이 사라졌다.

엄청난 속도.

따라잡을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저 정도면 순간이동이라 말할 수준이다.

‘그동안 갑자기 등장하고 사라졌던 것 모두 고속 이동이었던 건가.’

오필리아의 영역에서 벗어나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을 보며 혼돈검을 납검했다.

말도 안 되는 괴물.

눈을 찌푸렸다.

제한은 있을 거다.

아무런 조건 없이 저런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면 상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불리하면 도망가고 자신이 날뛸 수 있는 공간에서만 등장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주변을 잠식하는 에렘바트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까다로운 적이었다.

“놓쳤군요.”

팔라딘의 부축을 받으며 오필리아가 걸어왔다.

팔이 축 처진 게 부상을 입은 모양.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놓쳤어.”

놓쳤다는 말이 옳은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미련도 없이 떠났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자꾸만 뮬랑 카센이 했던 말이 뇌리에 감돈다.

‘붉은 불꽃과 백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꾸드득.

지저분한 감정에 손에 힘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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