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화 저쪽도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오감에 집중했다.
처음에 잡았던 계획이 모두 어그러지고 그때그때 변하는 상황에 맞춰 유동적으로 움직였다.
정공법에 가까운 방법이었으나 결과만 보자면 그리 좋지 않다.
특히나 추적하는 게 불가능한 적이라면 더욱더.
그렇기에 계속 거슬렸다.
‘무지개다리를 사용해도 뮬랑 카센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해.’
순간이동과 다를 바 없는 속도를 어떻게 낼까.
진짜 텔레포트를 사용하더라도 해결이 안 된다.
좌표를 찍어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동하는 것이니까.
예지를 통해 어디로 향할지 알아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비슷한 능력이 있는 사람은 이미 밖으로 나갔지.’
오필리아의 노블 나이트 일원 중 한 명이 예지에 가까운 예측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지금은 이 자리에 없다.
탑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80명 규모였던 노블 나이트도 지금은 고작해야 5명도 안 된다.
다른 무리도 마찬가지.
루키 그룹과 요정 클럽 모두 일원 일부를 잃었고 쁘찡연합 또한 멤버들을 제외하면 2명만 남았다.
그만큼 90층대 후반부를 등반하는 건 어려운 일.
결론을 내렸다.
“핥짝이 말이 맞아.”
“뭐가?”
“저쪽이랑 합류하지 않아도 되냐고 했었잖아.”
“그치? 아까는 같이 싸우면 서로 방해될 거라며.”
“맞아. 그 생각은 변함없지만 이걸로는 부족해.”
적어도 한 번은 주도권을 우리에게 가져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고.
그렇다고 도박에 가까운 수는 사용할 수 없다.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하면서도 승률이 높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핥짝이가 말한 협공.
탈모맨이 이야기했던 두 번째 기회.
마지막잎새가 물었던 후보자와 함께 도주하는 것까지.
한쪽만 사용할 필요 없다.
‘필요하면 다 써야지.’
그리 거창한 계획은 아니다.
물론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이곳에 있는 이들이 모두 죽는 결과를 보일 테니까.
“계획이 있어.”
난 모인 이들에게 심플한 계획을 말했다.
뮬랑 카센이 등장하면 섹시가이와 마지막잎새가 후보자를 데리고 탈출해 스마일캡에게 합류한다.
그 과정에서 후보자는 한 명으로 줄어들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그쪽에서 후보자를 보호하고 있는 동안 우리가 뮬랑 카센을 붙잡자.”
물론 녀석의 목표는 후보자니까 우리를 무시하고 그쪽으로 향하려 할 거다.
그러니 잡는다.
무슨 수를 써서든 붙잡고 결판을 내린다.
만약 우리가 실패하면 그다음은 저쪽에서 해결해 주겠지.
“그럴 거면 처음부터 힘을 합치는 게 낫지 않아?”
“중요한 건 기회를 두 번 가져간다는 거야.”
합치면 전력은 강해지겠지만 기회도 한 번으로 줄어든다.
그동안 최대한 우리 쪽에 피해가 없도록 움직였지만 이제는 다르다.
다른 이들이 아닌 우리가, 나와 멤버들이 전멸할 가능성도 열어 두고 싸워야 한다.
우리가 당하더라도 다른 쪽이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판을 짜야 한다는 이야기.
“우리가 붙잡고 싸우는 게 베스트. 혹여나 놓치더라도 합류하면 돼.”
“으음. 하긴 처음부터 합치고 있어도 후보자는 한 명이 될 테니. 기회라도 늘리겠다는 거징?”
“맞아. 더 많이 싸울 수 있어야 해. 녀석과의 전투 경험이 더 필요해.”
냥펀이 잘 정리했다.
전투는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무엇이냐.
‘결국 이겨야 끝이 나.’
확실히 잡아내는 것.
뮬랑 카센은 강하다.
98층에 있는 이들 중 녀석과 싸운 경험이 있는 자는 몇 없다.
스마일캡, 오필리아가 이끄는 노블 나이트. 나.
나머지는?
‘없어. 스마일캡이 보여 준 기록구도 있고 말로 전해 준 것도 있지만 실제로 겪어 본 적이 없어.’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게 전부다.
절대적인 경험이 부족하다.
적당한 적이면 전투를 치르며 학습하면 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규격 외.
경험과 전략을 따질 만큼 강한 적이다.
가만히 계획을 듣고 있던 핥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이해했어.”
핥짝이 또한 뮬랑 카센과 싸운 적은 없다.
나름 어떻게 상대할지 짜 두기는 했겠지만 실제로 가능한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뜻.
기회를 여러 번 가지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 형님, 저쪽에 나타나면요?”
“그때도 똑같이. 저곳에 있는 후보자를 데리고 와.”
“넵! 괜찮을 거 같은데요? 후보자 뺏어 오면 녀석도 신경 쓰일 테니 빈틈이 생기겠죠.”
그렇다면 최고지.
결과는 까 봐야 알겠지만.
긴급히 작전을 재구성한 뒤 집중했다.
-지이이이잉.
아주 미약하지만 소음이 들리고 있다.
고속으로 진동하는 빛의 날개가 내는 특유의 고주파음.
일반인의 청각으로는 들을 수 없는 영역대의 주파수였지만 우리는 초인이었고.
“온다.”
“이쪽이 당첨이네.”
“나 같아도 이쪽으로 올 듯? 저기 사람이 워낙 많아야지.”
일정하게 울리는 소음이 급속도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점. 그 크기가 빠르게 커진다.
“타이밍 봐서 바로 출발해.”
“알겠습니다!”
“맡겨 주세요!”
-콰앙!
묵직하게 내리찍는 풍압.
등장만으로 일대를 파괴하는 위력에 균형조차 잡기 힘들었지만.
“우오오오!”
“냥펀!”
“가자아앙!”
그 정도에 흔들릴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가장 먼저 뛰어든 건 탈모맨.
뮬랑 카센이 멈추기도 전에 뛰어올랐다.
두 다리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각력.
단번에 십여 미터를 뛰어오른 녀석이 뮬랑 카센을 끌어안기 위해 양팔을 벌렸고.
【…네놈, 아니. 너구나.】
뮬랑 카센은 망설임 없이 검을 그었다.
클레이모어가 가지는 중량.
아래로 하강하는 속도가 더해진 만큼 그 위력은 더욱 강해졌으나.
-카가가가가각!
탈모맨은 그것을 몸으로 받아 냈다.
맨몸이나 다를 바 없는 쫄쫄이를 입었음에도 들리지 말아야 할 소음이 들린다.
마치 거대한 바위를 갉는 듯한 소리.
“우오오!”
갈라진 피부에서 피가 새어 나왔으나 아랑곳 않는다.
실제로도 생채기 정도의 상처뿐.
‘몸이 얼마나 단단한 거야.’
그럼에도 충격에 의한 반발력은 어쩔 수 없었는지 뒤로 밀려났으나.
“하이 파이브!”
-타압!
가까스로 뮬랑 카센의 발바닥을 잡을 수 있었다.
투구에 가려져 온전히 볼 수 없었음에도 질색하는 표정이 보인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인간적인 반응.
-콰아앙!
뮬랑 카센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발을 휘둘렀다.
그저 걷어차는 것만으로 생기는 소닉붐.
음속을 넘어 휘둘러진 다리에 어정쩡하게 발을 붙잡고 있던 탈모맨이 땅에 처박혔으나 그걸로 충분했다.
-촤자자자작!
찰나의 순간, 위로 도약한 냥펀이 저주받은 아티팩트를 던졌다.
주먹만 한 구체가 급격히 불어나며 뮬랑 카센을 감싼다.
다음은 핥짝이.
[압축(SSS) Lv.10+]
-콰드드드득!
뭔가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아티팩트가 줄어든다.
거인조차 당하면 몸이 분해되는 압축력.
거기에 더불어.
-촤르르륵.
냥펀이 아티팩트와 연결된 사슬을 풀었으니.
“잡았다!”
바닥에 처박혀 있던 탈모맨이 강하게 사슬을 잡아당겼다.
지이이잉!
빛의 날개가 힘을 발휘했으나 탈모맨 역시 힘으로 밀리지 않는다.
쫄쫄이를 입었음에도 도드라지는 힘줄.
“으랏차아아!”
기합과 함께 사슬을 잡아끌었으니.
쿠우웅!
망치를 내려치듯 뮬랑 카센을 바닥에 꽂았다.
오필리아와 달리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효과는 충분했으며.
“나도 간다!”
나 역시 땅으로 추락한 녀석에게 뛰어들었다.
반쯤 누워 있는 자세로도 위협적인 검을 날려 댔지만 괜찮다.
-콰드드득!
맞을 건 맞아 줄 생각이었으니.
대신.
[만근추환(S)]
-쩌엉!
녀석도 도망칠 수 없다.
마력을 쏟아부어 늘린 중량.
무게만으로 땅에 균열이 생긴다.
【좋은 시도다.】
불리한 자세임에도 여전히 담담한 모습.
그 모습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다만.
“언제까지 그렇게 말하는지 보자고. 섹시가이!”
“뒤는 맡기겠습니다, 형님!”
“아앗?”
내 외침과 함께 후보자를 업은 섹시가이가 질주한다.
평소 까불거리면서도 맞을 때는 냉큼 피하더니 순발력이 보통이 아니다.
마지막잎새가 전방으로 달려 길을 뚫고, 그 길을 따라 달리는 섹시가이가 삽시간에 멀어진다.
【허어.】
설마 도주할 줄은 몰랐는지 뮬랑 카센이 어이없는 음색을 내뱉는다.
착각일까.
녀석의 입꼬리가 올라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뭐, 알 바는 아니지.”
-콰직!
혼돈검을 찔러 넣었다.
정확히 투구와 흉갑 사이.
꼼꼼히 몸을 감싼 갑옷의 틈새로 검을 찔러 넣었고.
[검강]
[절삭(SSS) Lv.6]
[스킬 레벨 업!]
[절삭(SSS) Lv.7]
[영혼찢기(SSS) Lv.7]
쥐어짜듯 안으로 쑤셨다.
혼돈의 파편이라 한들 몸에 구멍이 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대는 나를 죽이고 싶은가.】
주륵.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올라오는 핏물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럼에도 뮬랑 카센의 말투는 평온했다.
두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는다.
죽이고 싶느냐?
“어. 혼돈의 파편은 죽어야지.”
당연한 말을.
멸망을 확정 짓기 위해 나타나는 이들은 종말의 파발과 같다.
이들을 지우지 못하는 이상 늦든 빠르든 멸망은 진행된다.
막을 수 있느냐가 아니다.
막아야 한다.
【훌륭하다.】
-콰아아아아앙!
그 말을 끝으로 강력한 반동이 느껴졌다.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자체로 몸이 붕 뜰 지경.
지반이 흔들릴 정도로 무게를 늘렸는데 이 정도다.
지금까지 힘을 아끼고 있던 건가?
아니면 발악하는 건가.
그러다 흠칫.
‘…왜 멀쩡하지?’
이질감을 느꼈다.
녀석을 감싸고 있는 저주받은 아티팩트.
여전히 압축으로 녀석의 몸을 조이고 있었지만.
-꾸득. 꾸드득.
몸은 고사하고 뮬랑 카센의 갑옷조차 구기지 못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가 찔러 넣은 검.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적다.
동맥이든 정맥이든 꿰뚫렸다면 출혈이 훨씬 많아야 정상인데.
그렇다는 건.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무식한 내구력으로 맨몸에 검이 닿았음에도 버티고 있는 거다.
탈모맨도 그런 모습을 보여 줬으니 이 녀석이라고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만.
영혼찢기까지 막아 내는 건 이해할 수 없었으나.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됩니다!]
권능을 통해 답을 알아냈다.
이 녀석.
“영혼의 크기를 키워?”
영혼의 밀집도와 크기가 증가하고 있다.
육체를 벗어나 스스로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힘이었으며 그 바탕에 있는 것은.
[뮬랑 카센은 기사의 맹약을 지킬 것입니다!]
[뮬랑 카센의 신념이 몸집을 불립니다!]
[선업이 뮬랑 카센의 의지를 더합니다!]
신념.
결코 굴하지 않는 기사의 의지였다.
강해지는 빛.
신성력과는 다르다.
이건 스스로 쌓아 온 선업의 발현이다.
-파지지지직!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머릿속으로 수많은 이미지와 심상이 떠오른다.
느껴졌다.
혼돈 수치가 올라간 탓인지 아니면 특별한 뭔가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녀석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등 뒤에 뻗은 빛의 날개.
그것 또한 그녀의 선업이 형상화한 것이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갈 수 있도록.
자신이 원했던, 자신을 원했던 이들에게 달려갔던 그동안의 삶과 업을 증명하는 힘.
그 의지를 실현해 주는 이적.
-쿠구구구궁!
“크으읍!”
“으앗!”
거대해진 업과 영혼이 그녀만의 영역이 되어 모든 것을 밀어낸다.
이쪽으로 달려오던 냥펀까지 튕겨 나간다.
탈모맨이 양손으로 그녀의 영역을 찢으며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으나 시간이 필요하다.
-푸욱!
혼돈검을 녀석의 목에 꽂아 넣은 채 단검을 뽑아 어깨와 팔의 이음새를 찔렀다.
어떻게든 대미지를 더 넣어야 한다.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녀석은 더 강해지고 있다.
열심히 손을 쓰는 지금도 의문이 가득하다.
‘어째서 지금 이런 반응이?’
조금 전만 해도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이러냐는 것이다.
그런 내게 답을 해 주는 걸까.
-띠링!
커뮤니티 알림이 들렸고.
“공블아이! 저쪽도 공격당하고 있어!”
핥짝이가 궁금증을 해결해 줬다.
뮬랑 카센이 아닌 다른 녀석에게, 후보자가 공격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