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734화 (734/740)

734화 대화

다가오는 나를 보며 발칸이 고개를 갸웃한다.

섹시가이와 싸우며 방어구도 무기도 전부 떨어졌지만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

오히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는 혼돈의 파편인가?”

“아니.”

“으음. 내가 잘못 말했군. 그대는 이번 세대의 씨앗인가?”

씨앗이라.

단어가 의미심장하다.

내 귀에 들리기로는.

“마치 내가 혼돈의 파편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듯한데.”

“이미 느껴지는 것만 봐서는 혼돈의 파편이 맞다네.”

그것참.

혼돈의 파편이 직접 그리 말해 주다니.

나도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탑에 들어와 가장 먼저 얻은 기연.

별을 주시하는 눈.

그 권능을 얻는 것을 시작으로 생겨난 퀘스트.

퀘스트의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은 그것.

[???-히든 퀘스트]

-탑을 오르세요.

내게 무한 코인을 줬지만 그 안에는 미약한 악의와 의도가 담겨 있었다.

강제적으로 탑을 오르도록 구성되어 있으니까.

조금씩 내게 제약을 가해 가며 숨겨진 의도를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히든 퀘스트]

-???퀘스트는 탑 생성 후 한 번만 생성됩니다.

-히든 퀘스트 수행자에게는 제약이 걸립니다.

-숨겨진 등반가. (무한 코인 정보 누설 금지.)

-욕심 금물. (최대 세 명의 NPC의 계승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알 수 없는 비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정보를 알릴 수도 없고 계승자 수에도 제한이 생겼다.

심지어 무한 코인에 대한 정보를 발설할 시 듣는 대상에게 막대한 페널티를 줬으며.

-초월자!

-당신은 한계를 초월한 무언가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초월 조건】

-1) 100층 진입 (미완료)

-2) 혼돈 수치 1,000점 이상 (완료)

-3) 격의 상승 (완료)

-4) 두 개 이상의 개념 (1/2)

-5) 탑의 선택 (완료)

-6) 혼돈의 파편의 인정 (완료)

-7) 선택 (미완료)

이제는 초월자랍시고 조건을 내밀고 있다.

시스템이 말하는 초월자가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혼돈의 파편.’

두 개 이상의 개념.

이거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는 거였으니까.

무려 일곱 개나 되는 조건이 있었지만 어느덧 세 개의 조건만 달성하면 완성된다.

심지어 100층에 올라가는 건 이미 확정된 것과 마찬가지.

100층에 들어가지 않으면 난 영원히 탑에 갇히니 올라갈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으나.

‘시스템치고 너무 간섭하는 거 같단 말이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탑은 싸우고 사투를 벌이고 생존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수련과 커뮤니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다.

“탑의 부름. 탑의 의지. 그걸 말하는 거겠지.”

난 현자도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저 탑을 열심히 올랐고 이곳의 생태와 시스템에 대해 체득했을 뿐이다.

탑의 초대를 받는다.

그렇게 사람들은 헌터가 되고 세상을 구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계승자를 통해 NPC들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주니까.

그러나 한 가지 숨겨진 의도가 더 있었으니.

“탑은 혼돈의 파편이 될 자도 찾고 있으니까.”

그건 바로 새로운 혼돈의 파편을 만들어 내는 것.

시스템의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

멸망을 이룰 수 있는 초월자.

탑의 의지하에 만들어질 수 있는 그 무언가.

현자, 존 트레일러가 말했다.

탑은 혼돈과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빌어먹을 탑을 오르며 그게 뭔지 알 수밖에 없었다.

‘단계적으로 난이도가 올라가는 탑의 구조와 시스템이 질서.’

혼돈의 파편과 멸망한 세계에 탑이 나타나는 원리가 혼돈.

그 과정에서 충돌이 나면 발생하는 게 버그 메시지다.

난 등반가 누구보다도 많은 버그를 발생시킨 장본인이고.

피식 웃으며 발칸을 바라봤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너도 퀘스트를 받았나? 이건 어느 쪽이지?”

내가 받은 정체불명의 퀘스트는 어느 쪽이 주관하는 것인가.

형식만 보면 질서가 맞다.

원하는 걸 봐서는 혼돈이 맞다.

그럼 도대체 이 퀘스트는 어느 쪽이 만들었는가.

“으하하하하! 재미있는 질문을 던지는구나!”

뭐가 그리 웃긴지 녀석이 크게 웃는다.

본인은 이미 혼돈의 파편이라 이건가.

“퀘스트라. 자네는 아직 등반가이니 모를 수도 있겠군.”

그가 손가락을 든다.

“탑에 속해 있는 혼돈의 파편이 몇이나 될까. 그 수는 많다네. 그중에는 잊힌 자도 존재하지.”

“잊힌 자라.”

“자신의 개념을 버린 자들. 혹은 뺏긴 자. 그저 더는 외세에 관심이 없어 은신하는 이들도 있지.”

애초에 제멋대로 움직이는 이들이니 이해할 수 있다.

당장 내가 마주친 이들만 해도 다양하지 않았던가.

뮬랑 카센은 자신의 과거를 바꾸기 위해.

에렘바트는 자신의 친구를 기리기 위해 움직였다.

델버튼은 드워프와의 내기를 지키기 위해 프램버그를 탑으로 옮겼다.

무슨 짓을 할지, 어디까지 일을 벌일지 알 수 없는 게 그들이다.

“우리도 공통점이 있다네.”

“혼돈이 많다는 거?”

“물론 그런 것도 있다만.”

번뜩.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모든 혼돈의 파편은 반드시 자신의 세계로 향한다네. 이건 탑 자체의 의지야.”

알고 싶지 않았으나 그럴 거라고 예상했다.

결국 그들 또한 자신의 세계를 구하기 위해 정상에 향했던 이들이니.

갈 길을 잃은 자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바뀌어 버린 인격이든, 스스로의 인격이든.

그는 말하고 있는 거다.

‘내가 받은 히든 퀘스트. 그건 어느 한쪽이 아니라 탑 전체가 원하고 있다.’

그렇기에 혼돈과 질서, 양쪽이 협력하고 있는 거고.

웃기는 놈들이다.

할 거면 한쪽만 하든가.

어떤 메커니즘인지는 모르겠다.

“퀘스트를 받았나 물어봤는가.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 텐데. 이미 보지 않았나.”

“에렘바트 이야기로군.”

녀석은 영물로 시작해서 재앙을 거쳐 혼돈의 파편이 되었다.

에렘바트가 퀘스트를 받았을까?

과거, 녀석이 탑을 오르는 시야를 공유받은 적이 있다.

결과만 말하자면.

‘나와 같은 퀘스트는 받지 않았어.’

애초에 자연 생성된 재앙을 탑에 귀속시키기 위해 초대를 했던 거니까.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그대가 이미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쪽은 말이 많군.”

“인격을 유지한 사람과 대화할 일이 많지 않아서 말이야. 대부분 괴팍해진다네.”

이 녀석도 인격을 유지하고 있는 건가.

그 부분만 보더라도 뮬랑 카센과 호적수가 아닐까 예상됐으나.

‘모르지. 도전이라는 개념 덕분에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걸지도.’

나야 비교적 말이 통하는 녀석인 만큼 잠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있는 거지만.

덕분에 이런저런 정보를 얻었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의문도 일부 해소됐다.

겸사겸사 시간도 끌 수 있었다.

다른 생존자들이 도망치고 오필리아가 합류할 시간을.

발칸 또한 내 노림수가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아 보였다.

오히려 나와 만나 반가운 느낌.

아마도 그 이유는.

[뮬랑 카센이 계약서에 서명합니다.]

[자신의 친구를 향해 눈을 깜빡입니다.]

[수많은 혼돈의 파편이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유독 끈끈한 시선을 던지는 존재가 있습니다.]

-우우우웅!

밀도 높은 기운이 느껴진다.

다름 아닌 혼돈의 파편이 보내는 관심.

고작 그것만으로도 이런 현상을 만들 수 있는 건가.

[칭호, 혼돈의 파편의 친구가 생성됩니다!]

새롭게 생긴 칭호 때문이 아닐까.

엘리니를 NPC화 하는 데 성공한 모양.

이후에는 뮬랑 카센이 잘해 주겠지.

그거야 잘된 일이지만.

‘나한테 관심이 많은 녀석이 한 명 있는 거 같은데.’

저거는 좀 조심해야겠다.

제정신인 녀석들이 별로 없어서.

-터벅.

발칸이 앞으로 다가온다.

기세가 달라졌다.

“그래. 이야기 좀 하자길래 들어줬다네. 이제 되었는가?”

“…쓸데없이 친절하군.”

“미리 환영식을 하는 거라 치지. 동류가 될 사이니.”

-구구구구국!

폭발적으로 놈의 기세가 터져 나온다.

“그럼 시작하세.”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양팔을 벌리는 녀석.

눈깔이 돌았다.

광기와 함께 느껴지는 잔혹한 기운.

저게 놈이 다루는 힘인가.

이제는 기운만 봐도 성향을 파악할 지경이다.

“도전이 아니라 했지. 맞네. 이건 그러니까.”

-슈욱!

점멸하듯 자리에서 사라진 녀석이 코앞에서 나타난다.

동시에 안면으로 다가오는 주먹.

-빠아아악!

“일종의 교육. 후배가 될 녀석에게 하는 지도지!”

충격에 날아가 바닥을 구르다 자세를 잡았다.

주먹이 맵다.

코피가 터졌는지 찝찔한 맛이 났지만 놔두면 금방 멎는다.

‘할 만해.’

녀석이 어느 정도 힘을 빼고 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나야 좋지.

그리고 나도.

-콰아아아앙!

“아무 생각 없이 나선 게 아니거든.”

정면으로 뻗은 검.

발칸의 발이 움직인다.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보법.

아래에서 위로.

녀석의 주먹이 올라오는 타이밍에.

-뻐걱!

“크하! 좋구나!”

니킥으로 턱을 쳐올렸다.

탁구공처럼 머리가 뒤로 젖혀졌음에도 여전히 웃고 있다.

분명 인격을 유지하고 있는 놈이었는데 이렇다는 건.

“원래도 미친놈이었군.”

“한 분야에 미치지 않고 어찌 경지에 다다를까!”

목 근육이 얼마나 질긴 건지 머리통을 날릴 생각으로 찼는데도 멀쩡하다.

노친네가 미칠 거면 곱게 미치지, 성질까지 더럽냐.

시커멓게 물들어 있는 그의 눈이 나를 응시한다.

-후아아악!

순간적으로 암전하는 세상.

그와 함께 사방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음껏 날뛰어라. 내, 무대를 마련해 줄 터이니.”

스르르륵.

안개처럼 깔리던 어둠이 놈의 모습으로 동시에 온갖 괴상하고 사악한 형상으로 빚어진다.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딘가에 들어갈 수 있는 최악의 가능성과 상상력이 가미된 공포.

가장 무방비할 때 찾아오는 악몽처럼 무의식의 영역을 파고드는 공격이었으나.

[정신 보호(SSS) Lv.MAX]

적어도 내게는 의미가 없다.

정신 계열에서만큼은 면역과 가까운 게 나다.

혼돈이 부족했을 때라면 모를까 동급 수준이라면 통하지 않는다.

내가 녀석에게 덤빌 수 있는 이유.

더불어.

“넌 지도를 하고 난 줘 패고. 좋네.”

놈 스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후배를 지도하는 것이라고.

나 역시 도전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도전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말장난. 반쯤은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나.

-덥석.

-콰아아앙!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겠다는데 어떻게 할 건가.

이놈의 혼돈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기 마련인데.

냅다 멱살을 잡아 땅에 박았다.

그대로 목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고.

-꽈드드득.

발칸이 맨손으로 검을 붙잡았다.

피로 붉게 변한 이를 보이며 웃는 녀석.

“과연. 이게 네놈의 개념인가.”

“…그게 무슨 소리지?”

“그래. 이 정도라면 지도할 수준은 넘었군.”

내가 가진 개념?

퀘스트 정보를 통해 이미 하나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런데 저 반응은.

‘내가 그걸 쓰고 있기라도 하다는 건가.’

아니면 개념만 눈치채고 끝난 건가.

더더욱 검에 힘을 줬지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검을 움켜잡을 뿐이었고.

“대답해!”

“흐흐. 흐하하!”

크게 웃던 녀석이 우뚝.

웃음을 멈추었다.

“내, 후배한테 도전하지.”

빌어먹을 녀석이 내게 도전장을 내미는 것으로 도전을 성립시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