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밤의 일족 (6/129)


6화. 밤의 일족
2022.06.20.



 


“저주를 건 자를 추적 중입니다.”

“추적 중이라고요?”

“네. 추적대도 이미 꾸렸고, 이 건은 ‘뱀 사냥’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이비의 눈이 커졌다.

사흘 전, 디에스가 떠날 때만 해도 이 저주에 대해 단서 하나 없어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뜸 추적 중이라니.

예상을 한참이나 앞선 보고에 이비는 기쁘기보다는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벌써 찾은 거예요? 어떻게요?”

“운이 좋았습니다. 조력자의 도움도 컸고요.”

“조력자……?”

“비스에 개인적으로 아는 밤의 일족이 있습니다.”

디에스의 대답에 이비의 눈은 더 동그래졌다.

이비가 놀란 얼굴을 하자 디에스가 덧붙였다.


“사흘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밤의 일족을 만나겠다고.”

말마따나 디에스는 사흘 전 이렇게 말했다.


―우선 밤의 일족을 찾아서 저주의 식(式)이 언제 어디서 열렸는지 확인하겠습니다. 이걸 알아보는 데만 사흘 정도 걸리고, 그 이후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겁니다.

물론 이비도 기억했다. 다만 그 말의 의미를 다소 오해하고 있었다.


“그게 아는 사람을 만난다는 뜻이었어요?”

“그럼 무슨 뜻으로 이해하셨죠?”

“밤의 일족 아무나 잡아서 조지겠다는 뜻이요. ……조지겠다는 표현은 심문으로 바꿀게요.”

“그럴 리가 있나요…….”

이비의 과격한 대답에 디에스가 신음했다. 그러자 이비는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개인적으로 아는 밤의 일족이라니, 그런 친분도 있었어요?”

“친분은 아니고 안면 정도인데, 꺼림칙한가 보네요.”

이비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필요에 따라 잠시 접촉하는 건 그렇다 쳐도, 성녀 후보인 이비의 집사에게 그런 수상한 인맥이 있는 건 조금 곤란했다.

게다가 비스 출신인 이비에게 밤의 일족이란 악마의 동의어나 다름없었다.

밤의 일족. 그들은 노체의 저주를 받아들인 자들이다.

인간을 미워한 노체는 온 세상에 저주를 퍼트렸고, 흩어진 저주는 그믐밤마다 재앙이 되어 인간을 찾아왔다.

이비도 비스에 있을 때 몇 번이나 본 적이 있다. 달이 뜨지 않는 삭월의 밤, 마치 유령 같은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배회하는 것을.

노체의 저주는 살아 있는 것을 찾아 밤새 스멀대다가, 인간이나 동물을 발견하면 그것을 단숨에 덮쳤다.

그렇게 저주에 사로잡힌 자의 말로는 세 가지였다.

그 자리에서 죽거나, 미쳐서 닥치는 대로 무언가를 죽이거나, 아니면 그 저주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 인간도 저주도 아닌 무언가가 되거나.

저주를 받아들인 인간, 인간의 탈을 쓴 저주. 그게 바로 밤의 일족이었다.


“비스에 있을 때 그믐밤보다 더 무서운 게 밤의 일족이었어요. 그믐밤에 나오는 저주는 숨어서 피할 수 있지만, 밤의 일족은 정말 악랄하게 사람을 해치니까요.”

어린 시절 이비는 수도 없이 전해 들었다.

사람을 학살하고 도시를 부수는 그들의 만행과, 저주라는 압도적인 힘으로 벌이는 횡포에 대해.


“그래서 집사가 밤의 일족을 때리는 건 괜찮지만 친한 건 싫은 거예요.”

“때리는 건 제가 싫습니다만…….”

이비의 근거 있는 투정에 디에스가 다시 신음했다. 그러곤 조곤조곤 설명했다.


“앞서 말했지만 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난 조력자는 사람을 해친 적도 없고 이비 님보다 나이도 어립니다. 그러니 너무 불편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사의 해명에 이비의 완고하던 눈썹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경계를 다 푼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도와줬는데요?”

“알려 줬죠. 이비 님의 저주를 만든 자가 어디에 있는지.”

“설마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

“엥…….”

아무개를 범인으로 지목했는데 그 아무개와 아는 사이는 아니라니.

이비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디에스는 다시 착실히 설명했다.


“밤의 일족은 노체의 저주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서로 알아볼 수 있다는 거예요?”

“단지 알아보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일부처럼 느낀다고 합니다. 사람이 자기 손발을 인식하는 것처럼요. 그래서 만난 적이 없고 얼굴조차 몰라도 밤의 일족이면 서로의 존재를 안다고 하네요.”

“……그거 사생활 침해 아닌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우리에겐 잘된 일이죠. 덕분에 근래 수상한 짓을 벌인 밤의 일족을 곧장 찾았으니까요.”

이비의 허튼소리에도 디에스는 착실히 설명을 이어갔고, 이비는 감명 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일족은 인간이자 저주이고 동시에 죽은 용의 일부다. 그러니 저런 기이한 감지력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래서 그 감지력으로 범인을 찾았다는 거예요?”

“네, 현존하는 밤의 일족 중 지난 그믐에 저주의 식을 연 자는 한 명뿐이라고 합니다.”

“그 한 명이…….”

“이비 님께 저주를 건 뱀이죠.”

뱀이라는 지칭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어깨를 꼭 움켜쥐었다.

그 별명이 밤의 일족과 너무 잘 어울려 오싹했던 탓이다.


“그렇게 위치를 알아내서 추적대까지 꾸린 겁니다. 그리고 그 조력자도 한동안 추적에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뱀이 이동할 수 있으니까요.”

“상당히 협조적이네요. 혹시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없나요?”

뱀 사냥에 대한 디에스의 설명은 대체로 타당했다. 다만 문제는 모든 게 그 조력자의 말에만 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비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자, 디에스가 답지 않게 빙긋 웃었다.


“……그 표정 무슨 짓이에요.”

집사의 우중충한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자 이비는 삽시간에 불안해졌다.

하지만 디에스는 달리 해명하는 대신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뭐가 부스럭대더니 웬 서류 뭉치가 딸려 나왔다.

디에스가 그걸 잘 펼쳐 이비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계약서와 차용증입니다.”

“꺄악……!”

이비는 무심코 서류를 받아 봤다가 비명을 질렀다.

디에스가 내민 것은 추적대와 작성한 계약서와 정체불명의 차용증이었다.


“잠깐만요, 계약서는 둘째치고 이 차용증은…….”

“조력자가 요구한 금액입니다.”

“이 금액이면 조력자가 아니라 강도인데요!”

이비는 경악하며 차용증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 서류에는 디에스가 뱀 사냥에 성공하면 ‘유비아’라는 인물에게 이비의 연 수입에 달하는 금액을 지급하도록 적혀 있었다.

이비의 연 수입이라니, 그 돈이면 비스의 괜찮은 도시에서 집을 몇 채나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

이비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자 디에스가 점잖게 쐐기를 박았다.


“믿음의 형태라고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편하실 겁니다.”

“윽, 그런…….”

이비는 흐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곤 한참 후에 덧붙였다.


“그러네요, 이 금액이면 거짓말은 안 하겠네요…….”

믿음의 형태라니, 집사라는 사람이 가계를 탕진해 놓고 말은 잘한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비는 없던 신뢰가 쑥쑥 자라나는 것을 느끼며 이 가슴 아픈 서류를 고이 접었다.

그러곤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처음 저주에 걸렸을 땐 모든 게 막막했는데 어떻게든 버티니 점점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이비는 진척에 만족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겨우 한숨 돌릴 것 같아요.”

“티엔다 쪽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가 보죠?”

디에스가 은쟁반 위의 잿더미를 눈짓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비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우렐 대공이 조용하거든요. 그래서 다른 귀족들도 눈치를 보는 중인 것 같아요.”

사실 지난 연회 때 이비가 저지른 일로 가장 분개할 사람은 라우렐 백작이 아니라 그의 형인 라우렐 대공이다.

이비는 라우렐 대공의 성에서 라우렐 대공의 동생을 모욕하는 방법으로 라우렐 대공이 주최한 연회를 아작 냈다.

그러니 대공이야말로 이비 아리아테에게 격분해야 하는데, 정작 그는 지난 나흘간 아무 말 없이 잠잠했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도 저들끼리 쑥덕대기만 할 뿐 알아서 입단속을 하는 모양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행이죠, 이대로 관심이 줄어들 때까지 최대한 얌전히 지내려고요. 사교모임은 이미 전부 취소했어요.”

“사교모임을 취소한 건 잘하셨습니다만, 내일이 정화식입니다.”

“그죠, 내일이죠…….”

정화식이라는 말에 이비의 안색이 흐려졌다.

이비가 속한 신성한 마냐냐 탑에서는 40일마다 정화의 식이 열린다.

그리고 정화자이자 성녀 후보인 이비는 반드시 그 식에 참석해야 했다.


“내일 다른 성녀 후보들을 만나겠군요.”

디에스가 굳이 짚어 준 요점에 이비는 속절없이 한숨을 토해 냈다.

마냐냐 탑에는 이비를 포함해 일곱 명의 정화자가 있다.

모두 이비와 비슷한 연령대의 숙녀들인데, 그들 역시 성녀 후보였다.

그러니까 이비가 정화식에 참여한다는 건 평민 주제에 자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비를 질투하고, 정화식 때 혼자 다 해 먹는 이비를 증오하며, 유력한 차기 성녀로 거론되는 이비 아리아테를 누구보다 미워하는 집단과 만난다는 뜻이었다.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러워 이비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더니 신음하듯 덧붙였다.


“라우렐 백작도 만나야 하고요…….”

백작이 대답을 듣겠다고 한 날도 마침 내일이다.

이비가 백작을 떠올리며 한숨을 폭 내쉬자, 디에스도 함께 염려했다.


“아무래도 다사다난한 하루가 될 것 같은데, 대책은 있으신지……”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이비의 대답이 의외로 빨랐다.

짚 더미를 이고 불구덩이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인데 걱정하지 말라니.

디에스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이비는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


“대책은 이미 마련해 놨거든요.”

이비의 짧고도 긴 인생엔 언제나 역경이 가득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깨닫고 말았다. 아무도 신경 안 쓰는 내 인생은 내가 직접 구해야 한다는 걸.

그래서 이비는 이번에도 어떻게든 헤쳐나갈 작정이었다.

***

다음 날, 정화식이 시작되는 정오를 앞두고 마냐냐 탑으로 많은 귀족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미 몇 시간 전에 도착한 정화자들은 새하얀 예복 차림으로 마냐냐 탑의 성소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결한 예복을 입은 정화자들은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운 숙녀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여느 사교모임의 영애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모두 지체 높은 귀족이었고, 동시에 마냐냐의 가호를 받아 대륙의 물을 정화하는 중책을 맡은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더 미워했다.

비스 출신이면서 자신들을 제치고 성녀로 거론되는, 심지어 아직 나타나지도 않은 이비 아리아테를.


“우리 중에 제일 늦다니, 대체 얼마나 거만해지려는 걸까요?”

“수치를 아는 거겠죠. 그런 짓을 했는데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어요.”

두 정화자가 가벼운 목소리로 이비를 험담했다. 그러더니 한 소녀를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안 그래요, 세드로 양?”

세드로 양이라 불린, 다른 정화자들 보다 유독 어려 보이는 그 소녀는 원추리 빛 긴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있었다.

하지만 귀여운 꾸밈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서늘한 인상은 다 가려지지 않았다.

그 묘하게 살벌한 소녀, 미엘 세드로는 동료들의 물음에 빙그레 미소 지었다.

마침 그때였다.

성소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시게 흰 예복을 입고, 푸른색 리본으로 긴 머리를 땋아 묶은 이비 아리아테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