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정말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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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정말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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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정말 좋아
2022.07.18.
탑주.
로히카 세드로.
미엘 세드로의 사촌 언니.
마냐냐 탑의 소유자이자, 대귀족 세드로 가의 주인.
하나만으로도 이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자리를 둘씩이나 차지한 과잉 권력자.
동시에 그 사람은, 안 그래도 타인을 잘 믿지 못하는 이비를 완벽한 인간불신에 빠트린 당사자였다.
“으…….”
마차의 창밖으로 마냐냐 탑이 보이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며칠 전에도 똑같이 지나온 길인데 오늘따라 속이 거북했다.
이유는 뻔했다.
오늘 이비는 탑주를 만나야 한다.
저 탑의 꼭대기에 앉은, 무시무시한 로히카 세드로를.
“뱀의 거점으로 의심되는 지역은 비스 남동부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멀미에 시달리는 이비의 맞은편에서, 디에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티엔다와 연결된 바람 계곡에서 동녘의 경계까지 이어지는 길에 인접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탑주가 감시역을 붙인다 해도 적당한 핑계가 있으면 그 도시에 들를 수 있을 겁니다.”
디에스가 비스의 동선을 설명하자 이비는 신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근심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만약 비스로 내려가는 게 확정되면, 탑주가 감시를 얼마나 붙일까요?”
“꽤 많은 수가 붙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 보호를 핑계로 호위대를 편성할 수도 있겠죠.”
디에스의 어두운 전망에 이비는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탑의 소중한 자산인 이비는 다쳐서도 죽어서도, 절대 도망쳐서도 안 되는 존재다.
그러니 탑주는 이비가 비스로 내려가는 걸 허락하더라도, 결코 혼자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백작을 만나는 건 구실이고 저주를 푸는 게 진짜 목적인데, 여기에 탑주의 사람들이 덕지덕지 달라붙으면 아무래도 곤란하다.
그래서 이비는 점점 가까워지는 마냐냐 탑을 보며 결연히 말했다.
“비스로 내려가는 걸 허락받는 게 첫 번째, 동행을 최대한 줄이는 게 두 번째. 최선을 다해 볼게요.”
탑주를 만나러 가는 이비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비장했고, 그 모습에 디에스는 만감이 교차했다.
이비는 자신이 할 일을 무섭도록 잘 알았다.
라우렐 백작의 선언으로 티엔다의 공적이 되고,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져 성녀 자리마저 위태로워진 이 와중에도 말이다.
그 일을 생각하면 속이 말이 아닐 텐데, 이비는 절대 굴하지도 기죽지도 않았다.
그래서 디에스는 저 모습을 대단히 여겨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 가끔 헷갈렸다.
디에스가 복잡한 심경으로 이비를 바라보는데, 이비가 돌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집사.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지금 백작을 만나러 간다고 나서는 거 되게 괜찮은 일 같아요.”
웬 뜬금없는 소리에 디에스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이비가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엄청 가련하지 않아요? 냉혹한 백작의 마음을 풀기 위해 위험지역으로 떠난 성녀 후보. 이러면 나한테 욕을 퍼붓던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이비가 음흉하게 후후 웃기 시작했고, 디에스는 그 모습에 마음을 누르던 감정을 깨끗이 지웠다.
그래, 내가 깜빡했다. 얘 천성이 이 모양인걸.
마음이 가벼워진 디에스는 대신 이렇게 생각했다.
이비 아리아테의 잔머리, 오늘도 건재.
.
.
.
마냐냐 탑은 위대하다.
누가 지었는지, 대체 어떻게 지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 탑은 오만하리만치 치솟아 보는 이를 단숨에 압도했다.
동시에 윤곽을 타고 드러난 섬세한 곡선은 그 드높은 탑에 미려함을 더했고, 탑의 외벽에 맺힌 소금 결정은 해가 비칠 때마다 하얗게 반짝여 보는 이에게 신성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탑을 칭송하지만, 정작 이비는 마냐냐 탑이 아름답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다들 높다고만 생각하는 저 탑은 사실 깊기도 해서 하얗게 반짝이는 모습 뒤로 음습한 지하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그리고 그 지하에 아직 목줄이 걸린 이비는 이 탑을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승강기가 탑의 최상층에 도달하자 사슬 미끄러지던 소리도 멎었다.
“탑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복도에 선 시종들이 승강기의 문을 열어 주며 이비를 환대했다.
이비는 눈앞에 펼쳐진 널따란 복도를 바라보았다.
어림잡아도 서른 명이 넘는 시종들이 복도 좌우로 간격을 맞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이 많은 인원이 무색하게 단 하나의 문이 있었다.
탑주, 로히카 세드로의 집무실과 연결되는 문이었다.
이비는 심호흡하며 복도를 가로질렀다. 문 앞에 서자 문가의 시종이 이비를 대신해 기별을 넣었다.
“탑주님, 이비 아리아테의 방문입니다.”
이때까지 그 복도의 모든 것은 근엄했다.
“네, 들어와요!”
그런데 정작 문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이 모든 긴장을 비웃듯 나긋하고 경쾌했다.
이비는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
‘읍……!’
집무실로 발을 들이자마자 현기증이 느껴질 만큼 강한 향기가 쏟아졌다.
게다가 무척 넓은 탑주의 집무실은 색색의 꽃이 빽빽하게 들어차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꽃에 이비가 당황하자, 그 꽃 무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서 와, 좀 지저분하지? 일단 거기 아무 데나 치우고 앉아요!”
아무 데나 치우라고 해 봤자 아무 데도 치울 데가 없다.
그래서 이비가 떨떠름하게 서 있자, 수북한 꽃을 헤치고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원추리 빛 머리카락을 단아하게 틀어 올리고 정장을 깨끗이 차려입은, 그럼에도 특유의 화려함을 숨길 수 없는 여자였다.
저 여자가 바로 로히카 세드로. 이비의 목줄을 쥔 탑주님이었다.
“세상에, 이비가 날 먼저 찾아 준 게 얼마 만이지?”
“처음인데요.”
“그랬구나……. 항상 나만 이비를 찾았구나…….”
로히카는 발랄한 목소리로 이비를 반기더니, 이비의 솔직한 대답에 서운한 척 눈썹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이비는 그걸 본 척도 안 하고 곧장 말을 돌렸다.
“많이 바쁘신가 봐요.”
“아, 요즘 꽃꽂이에 취미가 생겼거든. 이거 은근히 재미있더라.”
취미라기엔 규모가 너무 지독한데.
이비는 속으로 중얼대다가, 탑주의 지난 괴벽들을 떠올렸다.
로히카는 다양한 취미를 매우 거창하고 짧게 해대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한번은 사육에 꽂혀서 탑에 가축을 풀어놓더니 금방 질려서 기르던 걸 죄다 요리해 버리고, 그 후엔 정으로 대리석을 쪼며 조각을 한다더니 자기 손가락 두 개를 부러트리고 중단했다.
가장 최근에 한 건 그나마 건전한 케이크 굽기. 그러다 탑에 불을 내고 그만둔 게 불과 지난달 같은데 이번엔 또 꽃꽂이다.
“참, 전에 내가 보낸 케이크는 먹었니?”
“네, 다 먹었어요.”
“어머, 내가 만든 걸 이비가 정말 먹어 준 거야?”
“아뇨, 정원사의 개가 먹었어요.”
이비의 솔직한 대답에 로히카가 관악기처럼 맑은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우리 이비, 농담이 좀 잔인해졌네.”
로히카가 애교 가득한 목소리로 핀잔하자 이비도 억지로 웃었다.
농담이 아니라 사실인 걸 이미 알면서 저런 너스레라니.
이비는 발톱을 숨기고 나긋하게 구는 로히카를 보며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이비가 로히카의 본성을 알듯, 로히카도 이비의 본성을 안다. 덕분에 이비는 저주 때문에 버릇없는 본심이 튀어나오는 걸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나 들었어. 라우렐 가의 도련님 때문에 이비가 많이 곤란하다며?”
“그렇긴 한데 저한테 제일 곤란은 탑주님이에요.”
그래도 이렇게까지 솔직한 건 좀.
이비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저주는 걱정거리를 안겨 주었다.
그래서 이비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우자, 로히카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여유가 꽤 있네. 내가 보기엔 상황이 영 안 좋던데. 몬트라는 당연히 저울이 기우는 쪽으로 갈 테고, 힘없는 투하도 귀족들이 하자는 대로 할 텐데. 이렇게 둘이나 빠지면, 어머.”
로히카가 말하다 말고 놀란 척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더니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이비, 성녀가 못 될지도 모르겠네.”
로히카가 이비의 실패를 점치며 요란하게 웃자, 이비는 웃는 입술 안에서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런 이비를 향해 로히카가 초승달처럼 휜 눈으로 말했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예전처럼 잘 지내면 되잖니, 지하에서.”
그렇게 속삭이는 로히카의 눈이 짙은 소유욕으로 번들댔다. 가짜 웃음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저 흉포한 욕망에 이비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비의 불편을 느꼈는지, 로히카가 도로 밝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이비는 오늘 왜 온 거야?”
“탑주님께 허락을 받으러 왔어요.”
“허락?”
“라우렐 백작을 만나서 설득할 수 있게, 비스에 내려가는 걸 허락해 주세요.”
이비가 단도입적으로 밝힌 용무에 로히카의 눈이 동그래졌다.
로히카는 조금 놀란 듯 이비를 쳐다보더니, 이내 짙게 웃으며 중얼댔다.
“핑계 좋네.”
로히카는 그렇게 말하며 이비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이비와 얼굴을 마주 대고,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녀가 되긴 글렀으니, 도망치려는 건 아니고?”
로히카의 추궁에 이비의 생각보다 저주가 먼저 나서서 부정했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야?”
“아니에요.”
“어떡하지, 내가 또 속아 줘야 하나?”
로히카가 곤란한 척 미간을 좁혔다. 그러곤 이미 충분히 가까운 거리를 더 좁히며 말했다.
“우리 이비는 이미 날 많이 속였잖아. 그렇지?”
“아뇨, 세 번밖에 안 그랬어요.”
“세 번이 많은 거예요, 아가씨. 원래는 한 번도 안 봐주는 거 알잖니.”
로히카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이비를 더 압박했다.
이비는 뒤로 물러나고 싶은 걸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탑주님, 저는…….”
“쉿. 내가 말하잖아.”
하지만 로히카는 이비에게 변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예쁘게 길러 줘도 도망치고, 말 잘 듣기로 해 놓고 사고치고, 게다가 겁도 없이 내기까지 걸고.”
로히카가 이비의 지난 만행을 열거하며 이비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 바람에 로히카와 눈을 맞추게 된 이비는 이 상황이 고역스러웠다.
본디 연두색은 무척 싱그러운 색인데, 로히카의 연둣빛 눈동자는 마치 닿아선 안 되는 독처럼 위험하고 섬뜩하기만 했다.
그런 눈으로 이비를 빤히 바라보며 로히카가 말을 이었다.
“이비야, 난 있잖니. 날 그렇게 기만한 네가…….”
어느새 이비의 귓가로 접근한 로히카의 입술이 숨결과 함께 속삭였다.
“정말 좋아.”
뭐?
긴장하던 이비는 뜻밖의 고백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러자 로히카가 다시 해맑아진 얼굴로 물러나며 말했다.
“재미있거든. 적당히 포기할 줄 모르고 끝까지 매달리는 너 같은 애들. 넌 나를 굉장히 많이 닮았어.”
“……제가요.”
“어머, 싫은 티 너무 내잖아!”
이비가 저도 모르게 정색하자 로히카는 다시 까르르 웃어 댔다.
그렇게 실컷 웃고서, 로히카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비스에 가는 건 허락할게. 뭐든 해 봐.”
허락이 덜컥 떨어졌다. 그래서 로히카를 띠꺼워하던 이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조, 조건은요?”
“무슨 조건?”
“감시를 붙이겠다거나 하는 조건이요.”
“그럼 좋겠어?”
“아니요.”
“그럼 안 할게. 마음껏 놀다 와.”
로히카는 수상할정도로 관대했다.
그 모습에 이비가 오히려 머뭇대자, 로히카가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알잖니, 도망친 널 내가 얼마 만에 찾아냈는지.”
네까짓 게 도망쳐 봤자 손바닥 안이라는 뜻이었다.
이비는 로히카의 자신만만함이 꽤 짜증 났지만, 그래도 원하는 바를 다 얻어 낸 터라 적당한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문득 로히카가 돌아가려는 이비에게 물었다.
“참, 디에스는 잘 있니?”
“네, 매일 찻잔과 사랑하고 있어요.”
아무리 저주 때문이라지만 표현이 너무 이상하다. 그래서 이비는 디에스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하지만 로히카는 적당히 잘 지낸다는 얘기로 알아들었는지, 상냥하게 웃으며 끄덕였다.
“그래, 모처럼 넘겨 준 거니까 잘 길러야지.”
그 말에 이비는 저도 모르게 울컥하고 말았다.
그래서 몸을 돌린 채 로히카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화사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걱정 마세요, 매일 산책도 시키고 간식도 주면서 잘 키우고 있어요.”
이비의 도발적인 대답에 로히카의 미소가 짙어졌고, 이비는 그 진저리나는 여자를 외면한 채 탑주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