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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등꽃제의 두 사람 (37/129)


37화. 등꽃제의 두 사람
2022.10.06.


시온은 점성술사를 싫어했다.

점성술사는 시온의 저주를 풀어 주고 그에게 모든 비밀을 알려 준 사람이지만, 정작 시온이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불쾌함과 꺼림칙함뿐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저주에서 깨어난 직후, 겨우 혼란을 잠재운 시온이 점성술사에게 물었다.

사실 그건 물음이 아니라 추궁에 더 가까웠고, 그 사나운 태도에 점성술사는 옅게 웃었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정신을 차리자마자 사자처럼 으르렁대는 모습이 정말 시온 라우렐답다 싶어서.


“네게 부탁이 있어. 너에게도 분명 중요한 일이야.”

“부탁?”

“이비를 지켜 줘.”

처음 듣는 이름에 시온이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점성술사는 이비가 누구인지 설명했고, 시온은 이 상황이 더더욱 역겨워졌다.


“고작 그것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야?”

시온이 어처구니가 없어 되물었다.

위기에 처한 왕이 뜻밖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이유가 고양이 한 마리를 맡기기 위해서라고 하면 기분이 어떨까.

이유야 어쨌든 회생한 것에 안도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이 당한 취급에 모멸감을 느껴야 할까.

지금 시온이 인식한 상황이 딱 이랬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당연히 후자였다.


“고작 여자 하나 때문에…….”

시온이 이를 갈며 성을 내자 점성술사는 빙긋 웃었다.


“말조심해.”

순간 무형의 압박이 시온을 쿵 내리찍었다.


“고작 하나가 아니야. 그렇게 말하지 마.”

점성술사의 경고는 차분하고 온화했다.

하지만 시온은 그 짧은 순간 여실히 깨달았다.

얄팍한 웃음 뒤에 숨긴 저 인간의 본성이 미친 용 못지않게 흉포하다는 걸.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두려움을 느낀 사실도.

두려움이라니. 시온은 잠깐이나마 겁먹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점성술사의 경고를 일부러 무시했다.


“고작 하나가 아니면 뭔데, 여자가 그렇게 없냐?”

시온의 도발에 점성술사가 웃었다.

직후 시온은 개처럼 맞았다.

얌전한 로브를 입고 미지근한 샌님인 척하던 점성술사는 가감 없이 본성을 드러내며 시온을 정말 개 패듯이 팼다.

이때 시온은 소년이고 부상자였지만, 그런 점을 전혀 배려받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처맞았다.

물론 그 성격에 얌전히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열아홉 살에 불과한 시온은 자신보다 10년은 더 산 점성술사를 당해 낼 수 없었다.


“처음이지? 서열 정리당하는 거.”

점성술사가 시온을 내려다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더니 웃음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실 나도 안 당해 봤어.”

바닥에 널브러진 시온은 소름이 끼쳤다.

이 침착한 또라이는 대체 뭐란 말인가.

시온의 눈빛이 여전히 형형한 걸 보고 점성술사가 그를 걷어찼다. 그래서 시온은 다시 나가떨어지며 마른기침을 토했다.


“이 미친놈…….”

시온이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점성술사는 화내지 않았고, 그 모습이 시온을 더 환장하게 했다.

본인을 욕할 땐 그러려니 하면서 그 여자한텐 고작 하나라는 표현도 못 쓰게 한다.

마치 광신도의 신앙 같은 맹목적인 애정에 시온은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는 거기에 추호도 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시온이 역겹게 쳐다보자, 점성술사가 태연히 말했다.


“납득이 안 되면 그냥 빚이라고 생각해. 움직일 이유가 정 필요하다면.”

당연히 점성술사는 시온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빚이라는 건조한 표현에 시온의 거부감이 겨우 잦아들었다.

그 자존심 강한 소년 앞으로 점성술사가 다가가 몸을 낮췄다. 그러곤 또 한 번 시온이 알아야 할 것을 읊조렸다.


“……그러니까 이번엔 꼭 끝까지 지켜 줘.”

점성술사가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사이사이 중요한 말을 덧붙였지만, 악에 받쳐 있던 시온은 몽땅 개소리로 취급했다.

그래서 자신이 억지로 떠맡은 빚 외엔 전부 머릿속에서 깨끗이 치워 버렸다.

.
.
.

그렇게 난생처음 처맞은 지 어언 6년.

그 쓰라린 과거를 양분 삼아 훌륭하게 삐뚤어진 시온 라우렐은 제 성미와 상반되는 주변 풍경을 싸늘히 노려보고 있었다.

화창한 오전, 티엔다 호수 남쪽에 있는 화원에서는 등꽃제가 한창이었다.

투하 가문이 관리하는 그 화원은 티엔다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특히 그 화원의 중앙, 투하 가의 별장 옆에는 티엔다에서 가장 큰 등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는 봄이 되면 보랏빛으로 만개했고, 궁궐의 천장처럼 넓게 펼쳐진 넝쿨 아래 흐드러진 등꽃은 마치 구름처럼 하늘을 켜켜이 덮어 경이로운 장관을 연출했다.

그 등꽃은 티엔다에서도 손에 꼽는 절경이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봄만 되면 투하 가문의 초대를 기다렸고, 드디어 오늘 모두가 고대하던 등꽃제가 열렸다.

하지만 정작 귀족들은 마음 편히 꽃놀이를 즐길 수가 없었다.

이유인즉, 이 화사한 사교장 한가운데 자리를 튼 어느 대귀족님 때문이었다.

시온은 등꽃제의 가장 상석인 등나무 줄기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꽃놀이를 하러 온 사람답게 가벼운 야외복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가 축제의 참여자로서 갖춘 것은 오직 의복뿐, 축제에 걸맞은 태도나 표정, 행실 같은 것들은 전부 어디에 내팽개쳐 둔 것이 분명했다.

우선 그는 아주 차가운 얼굴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경계의 부사령관과 감시자들이 제복 차림으로 그를 보좌했다.

이런 꼴이니 귀족들은 여기가 꽃놀이 장소인지, 타르데스 전당의 살벌한 알현실인지 살짝 헷갈렸다.

이것만으로도 축제 분위기를 이미 절반쯤 말아먹었는데, 시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홀로 상석을 차지한 그는 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대신 이곳엔 꽃보다 더 그의 주의를 끄는 존재가 있었으니, 그 사실을 증명하듯 시온의 시선 끝에는 항상 비취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걸려 있었다.

티엔다의 소중한 성녀 후보님, 이비 아리아테가 말이다.

논란의 중심에서 있던 이비가 드디어 사교계로 복귀했다.

오랜만에 나타난 이비는 자신에게 쏠릴 이목을 의식한 듯, 평소보다 더 사랑스럽고 청초한 모습이었다.

친구인 아르코 영식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나타난 이비는 가벼운 야외용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이비가 입은 비취색 드레스는 장식을 최소화한 채 부드럽게 주름 잡아 스커트만 풍성했다.

그래서 자수와 레이스로 촘촘히 치장한 숙녀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초라했지만, 화려한 등꽃 사이에 서는 순간 그 수수함은 오히려 배경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흐드러진 꽃과 세밀한 자수는 보는 이를 피로하게 했지만, 부드럽게 흐르는 이비의 스커트는 지친 눈을 편안하게 이끌었다. 더욱이 그 산뜻한 비취색은 등꽃의 연보랏빛과 맞닿자 세상에서 가장 돋보이는 색이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혼자 빛을 독점한 것처럼 이목을 끄는데, 이비는 머리를 틀어 올려 하얀 목덜미를 드러내고 종아리 중간까지 내려오는 스커트 밑으로 한 줌짜리 발목과 한 뼘 남짓한 구두까지 내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귀족들은 이비의 단아한 듯 단아하지 않은 모습을 보며 모종의 불안을 느꼈다.

아, 저 순진한 파랑새는 과연 알까? 꽃그늘 아래 앉은 사자가 여전히 자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도 이비는 귀족들이 만족할 만큼 검소하게 어여뻤고, 그래서 귀족들은 이비와 이비를 노려보는 백작님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즐기느라 등꽃은 뒷전이었다.

그리고 시온은 솔직히 기분이 더러웠다.

구경거리가 된 것도, 애욕에 빠진 남자 취급당하는 것도, 그리고 이비 아리아테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그래서 시온은 좀 더 날카롭게 이비를 쏘아봤다.

하지만 이비는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다 힐끗대며 눈치를 보는데도 말이다.

아주 놀아나는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약속은 약속이었다.

***

이비와 시온이 등꽃제에 나란히 출몰하기 사흘 전.

서로 한 번씩 돕기로 합의한 이비와 시온은 그 평화로운 이층집에서 더 본격적인 작당을 나누고 있었다.


“투기장?”

“응, 그 투기장에 밤의 일족이 갇혀 있어. 그래서 이 마을에 큰 저주가 생긴 거야.”

시온이 미간을 좁히고 중얼대자 유비아가 냉큼 대답했다.

유비아의 반말에 이비가 깜짝 놀랐지만 정작 시온은 개의치 않았다. 대신 그는 애꿎은 이비를 노려봤다.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한가 했더니…….”

이걸 알고서 지켜 주느니 마느니 했던 거였군.

시온이 연이어 농락당한 걸 깨닫고 쳐다보자 이비는 해맑게 방긋 웃었다. 물론 그 모습은 시온을 또 한 번 울컥하게 만들었다.

사실 시온은 자신을 안경이라 부른 조사단장이 띠꺼웠을 뿐, 그의 이주 명령 자체엔 큰 이견이 없었다.

그는 이 마을을 찾아오는 그믐의 저주가 점점 심해지는 걸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지난 그믐엔 여럿이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래서 시온은 오히려 이주에 찬성했고, 이주 자금을 적당히 지원하는 걸로 부채감을 지우고 이 마을에서 손을 털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변의 원인이 따로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밤의 일족을 가둬 두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소금값 말이죠.”

시온의 혼잣말에 이비가 끼어들자, 시온은 묵묵히 끄덕였다.

밤의 일족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가두려면 대량의 소금이 필요하다. 그리고 비스에서 정화의 소금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


“투기장을 통해 버는 돈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겠죠?”

“그 정도면 영주가 모를 리도 없고.”

시온은 낮게 읊조리며 어젯밤 조사단장의 책상에서 발견한 보고서를 떠올렸다.

뭐라고 썼나 궁금해 조사단장을 발걸이 삼고 앉아 잠시 훑어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보고서엔 날조만 가득했고, 그래서 시온은 이놈이 과연 나태한 놈일까, 꿍꿍이를 감춘 놈일까 잠시 고민했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둘 다인 모양이다. 꿍꿍이속이 가득한데 그걸 잘 감추지도 못하는 나태한 놈.

티엔다든 비스든 꼴이 잘 돌아간다 싶어 시온은 혀를 찼다.


“그래서 디에스와 유비아가 투기장을 조사하기로 했어요.”

표정이 썩 좋지 않은 백작님께, 이비가 자신의 집사와 토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투기장엔 시온의 마을에 영향을 끼치는 밤의 일족들이 있고 그중 하나는 이비에게 저주를 건 놈이다.

이것만으로도 두 사람이 손을 잡을 이유는 충분해서 시온은 이견 없이 끄덕였다.


“그리고 저는 그사이 티엔다로 가서 제게 저주를 건 사람을 찾으려고 해요.”

“그 상태로 찾으려면 고생깨나 하겠네요.”

시온이 남 얘기하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번엔 이비가 울컥했고, 그래서 이비는 일부러 시온을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백작님이 같이 가 주실 거니까요.”

이번엔 시온의 표정이 어김없이 굳었다.

백작이 질색할 걸 알았는지 이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약속했잖아요? 필요한 일을 번갈아 하기로.”

“번갈아 하기로 했지 먼저 하기로 한 적은 없습니다만.”

“치사하게 순서를 따지시겠다?”

“공정하게 순서를 따지는 거겠죠.”

동맹을 맺었는데도 시온은 여전히 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이 고집쟁이를 노려보다가 화를 꾹 눌러 담고 웃었다.


“백작님, 저는 오늘 아침에 이미 바옌 깃발을 치웠어요. 백작님이 원하시는 대로요. 그러니 이제 제가 원하는 일을 해야 공정할 것 같은데…….”

이비의 말에 시온이 아차 싶은 얼굴로 이비를 쳐다봤다.

아침의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비가 말해서 뒤늦게 떠올린 모양이었다.

이 논리로 요구하면 시온도 곧장 수긍할 분위기였지만, 이비는 이 백작님이 영 괘씸해 일부러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백작님은 자기가 한 말도 안 지키고 빠져나갈 구멍만 찾는 비열한 사람인가요?”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백작의 당당함이 대폭 하락하며 하늘 같은 자존심에 금이 갔고, 백작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건 진짜 저밖에 모르는 놈이네…….

이비는 정말 다루기 성가신 백작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비가 시온을 움직이는 법을 차츰 알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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