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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화가 난 백작님 (40/129)


40화. 화가 난 백작님
2022.10.17.


시온이 조용히 끓는 눈으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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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자를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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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묶어 대륙 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어요.”

거기에 대고 이비는 가감 없이 대답했다.

그런 주제에 자기 입을 손으로 잠깐 막더니, 시온이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전에 다급히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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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직은 던질 수 없어요. 몬트라 후작은 저한테 필요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이비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그래서 시온은 눈썹을 구긴 채 이비를 쳐다봤다.

시온은 뭐가 매우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 냉랭한 기색에 위축될 만도 한데, 이비는 오히려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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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 후작님의 태도가 썩 좋은 편은 아니죠. 그래도 저한텐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분이세요. 그러니 좀 과한 장난을 치셔도 그러려니 하는 거고요.”

그렇게 말하는 이비는 아무 타격 없이 말짱해 보였다. 후작의 앞선 작태도 과한 장난으로 치부하며 이미 털어 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그 초연함을 믿지 않고 이비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물론 이비가 직전의 일로 비련의 주인공처럼 슬퍼하거나 제 부사령관처럼 호전적으로 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각자의 태도가 있는 법이니 이비의 반응이 낯설어도 그 자체를 부정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시온은 꾸민 듯 명랑한 이비의 표정이 영 미심쩍었다.

그래서 그는 이비의 작고 말간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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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같은 일이 자주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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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같은 일이 후작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성희롱을 말씀하시는 거면 음, 자주는 아니고 종종 있는 편이기는 하죠. ……이 대화 예전에도 한 번 한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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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마다 대륙 밖으로 던지고 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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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처형 방식은 매번 달라요. 대신 뒤처리가 깨끗하다는 공통점이 있죠. ……저, 백작님, 저는 이렇게 험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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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그러려니…….”

그런데도 그러려니 한다고?

시온은 이렇게 되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질문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비가 고양이 앞발 얹듯 그의 입을 손으로 툭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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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 이거 반칙인 거 아시죠?”

이비가 시온의 입을 막은 채 엄하게 말했다. 이 이상 들어올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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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선 긋기에 시온도 입이 막힌 채 이비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길어지자 이비는 도로 상큼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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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차 말씀드리지만 이러다 제가 엄한 말을 해 버리면 우린 서로 부끄러워질 거예요. 앞으로 길게 봐야 하는데 그럼 피차 곤란하잖아요.”

시온도 결코 솔직한 성격은 아니지만, 이비 역시 못지않은 고집쟁이였다.

이비는 하소연하고 싶은 마음 따위 추호도 없다는 듯 시온의 참견을 도도하게 거부했다.

이비는 그렇게 시온을 밀어낸 후 그의 입에서 손을 뗐고, 시온은 더 뭐라고 하는 대신 가만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조용히 입을 다문 백작님은 심기가 영 불편해 보였다.

그래서 몰래 눈치를 보던 이비가 슬쩍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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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화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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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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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난 것 같은데요? 미간이 화난 미간이에요.”

이비가 고개를 갸웃대며 시온의 낯을 살폈다. 그러더니 팔꿈치를 테이블에 대고 두 손으로 턱을 받치며 귀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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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저 때문에 화나신 거예요?”

그 깜찍한 물음에 시온의 입에서 차가운 조소가 터져 나왔다.

시온은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이비를 쳐다봤고, 대놓고 무안을 주는 반응에 이비도 발끈해서 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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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숨만 쉬면 정말 화난 것 같잖아요. 누가 보면 백작님이 희롱당한 줄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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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말했지만 화 안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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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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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나게 만들 작정인 거면 방금 성공했네요.”

이비의 도발에 시온의 눈이 날카로워졌지만, 이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웃었다.

그러더니 여전히 두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시온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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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 의외로 신사시네요.”

놀리는 게 명백한 말투였다. 말투뿐만 아니라 얄밉게 생긋대는 얼굴에도 그럴 의도가 가득했다.

그래서 시온은 지금 웃음이 나오냐고 되묻고 싶었다.

이비에겐 계속 아니라고 했지만, 시온은 꽤 화가 난 상태였다.

다만 시온은 자신이 함부로 화를 내면 안 되는 위치인 걸 알았고, 그래서 화가 나면 과연 이 분노가 타당한지 먼저 살펴보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대로 시온은 먼지투성이 비밀통로를 지나오며 내리 생각했다. 자신의 심기가 왜 이렇게 불편한지에 대해서.

원흉은 물론 몬트라 후작이다.

후작은 시온의 부관인 부사령관을 장식품 취급했고 그 앞에서 방만하게 굴면서 애꿎은 여자애를 공연히 괴롭혔다.

이것만으로도 화가 날 이유는 충분하지만, 시온은 타인에게 솔직하지 못할지언정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시온이 앞서 나열한 것은 화낼 만한 이유일 뿐, 그가 화가 난 이유는 아니었다.

그래서 시온은 숙고 끝에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받아들였다.

자신이 이토록 화가 난 이유가 후작이 이비를 건드렸기 때문인 것을.

이건 시온에게 정말 불편한 자각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이비는 시온을 향해 ‘신사네요, 신사’라며 얄밉게 헤실댔다.

덕분에 시온은 약간 더 미칠 것 같았다.

이렇듯 이비는 요즘 시온에게 거침없다.

예전엔 백작님이 조금만 인상을 써도 하얗게 질려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그가 노려보든 이를 갈든 개의치 않고 온갖 도발을 일삼는다.

그래서 시온은 뒤늦게 자신의 불찰을 깨달았다.

계속 으르렁댄 줄만 알았는데 그는 어느새 이비에게 곁을 내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비가 요령 좋게 제멋대로 파고든 걸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시온에겐 그다지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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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그것도 백작님이 하신 거죠? 몬트라 후작을 기절시킨 거요.”

그렇게 한껏 까불던 이비가 돌연 목소리를 바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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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할 때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하마터면 크게 실수할 뻔했는데 백작님 덕분에 잘 넘겼어요.”

이비는 턱을 괸 손을 치우며 감사를 표했다. 그때 이비의 말투는 발랄하기보다는 능숙했다.

그 모습은 아까 등꽃 아래를 거닐 때와 비슷했고, 그래서 시온은 이비가 다시 선을 긋는다고 느꼈다.

이비는 이걸로 후작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싶은 눈치였다.

시온은 이렇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비의 눈빛이 침착한 듯 간절해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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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내 부관의 실책이었습니다. 그러니 인사하지 않아도 됩니다.”

결국 시온은 갈 곳을 잃은 분노를 삼키고 마지못해 장단을 맞췄다.

나름 맞춰 준 건데 이비는 그 사무적인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지 또 눈을 곱게 흘겼다.

그래서 시온의 기분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시온은 이비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난 사실이 꽤 비참했다. 하지만 그게 이상하거나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예정된 사고를 당한 기분이었다.

애당초 시온은 이비가 자신에게 특별한 존재인 걸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너무 잘 알아서 얽히기를 꺼린 쪽에 가까웠다.

이비는 까맣게 모르겠지만, 시온 외엔 누구도 모르지만 이미 7년 전부터 시온의 시간 속에는 늘 이비가 있었다.

이비의 행방을 알 수 없을 땐 그의 시간 대부분이 이비를 찾기 위해 쓰였다.

티엔다에 있는 걸 알았을 땐 애써 외면하면서도 이비의 소식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수년간 찾아다닌 사람이다.

그러니 특별하지 않을 리 없지만, 시온은 이걸 부단히 외면했다.

점성술사에게 놀아나고 싶지 않아서. 그의 소모적인 감정을 답습하고 싶지 않아서. 목줄은 이제 사양이라서.

그런데 카셀 몬트라라는 자가 자각도 없이 시온을 도발했고, 시온은 속절없이 분노하며 이비의 무게를 직면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비참하게도.

복잡한 심경 탓에 이비를 향한 시온의 시선이 길어졌다.

그러자 이비가 영문을 묻듯 갸웃댔고, 시온은 태연히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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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바쁘게 다니던데 할 일은 다 하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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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백작님이 예전처럼 째려봐 주셔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어요.”

이비가 냉큼 대답했다. 몬트라 후작 때문에 끝이 좀 더러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만족한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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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 나온 김에, 처음 봤을 때 왜 그렇게 째려보셨어요? 대공 성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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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르장머리 없다는 소릴 들어서 그랬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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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뇨, 그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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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에?”

이비의 물음에 시온은 그게 뭔 소리냐는 듯 이비를 쳐다봤다. 시치미를 떼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미심쩍어하던 이비의 두 눈이 차츰 경악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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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님, 혹시 눈이 많이 나쁘신가요?”

이비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묻자, 시온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 가진 백작님이지만 시력은 나쁜 편이다. 그래서 안경이 없으면 먼 곳이 잘 안 보인다.

그리고 난시를 가진 사람들은 멀리 있는 것을 잘 보기 위해 으레 인상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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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안경을 안 쓰고 다니세요, 사람들 오해하게.”

근 한 달 만에 그날의 진실을 깨달은 이비가 이를 악물고 시온을 탓했다.

하지만 시온은 뻔뻔한 얼굴로 이비의 비난을 외면했다. 남들의 오해 따위 내가 알 바냐 하는 표정이었다.

그 고집스러운 모습에 이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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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탓은 아니지만 백작님의 버르장머리를 다소 오해한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백작님은 첫인상이나 지금 인상이나 별로 다르지 않으세요.”

이비는 시온이 정말 나쁘다는 듯 말했고, 그 모습에 시온은 자칫 웃을 뻔했다.

그리고 이비가 재잘대는 동안 바닥을 치던 시온의 기분은 꽤 나아졌다.

시온은 이마저도 찜찜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위안거리가 있었다.

그건 이비를 볼 때 느끼는 감정이 제 학생들을 볼 때와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건방지고 귀엽고 귀찮고 마음 쓰이고 엄하게 건드는 놈은 죽여버리고 싶고.

시온은 그의 성격과 어울리는 이 적당한 호감에 안심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정신 나간 점성술사와는 다르다는 사실에도 재차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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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여태 도움을 받았으니까, 이제 제가 백작님을 도울 차례예요.”

긴 잡담을 끝내고 이비가 본론을 짚었다.

애당초 두 사람이 비밀통로까지 이용해서 만난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협력을 약속한 이비와 시온은 서로 번갈아 가며 상대를 돕기로 했다. 그리고 이비는 앞서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말마따나 시온의 차례였다.

이제부터 이비가 할 일은 시온이 스스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알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도울 차례라고 해 놓고 이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비는 마주 앉은 시온이 아니라 먼 곳을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무언가 헤아리는 듯한 모습에 시온은 이비의 까만 눈동자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길 한참, 이비가 다시 시온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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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점성술사 아저씨가 라우렐 백작님인가요?”

그리고 시온의 심장을 천 갈래로 찢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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