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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이비 아리아테의 유능 (80/129)


80화. 이비 아리아테의 유능
2023.03.06.


브릭 남작은 이 투기장의 주인이자 설계자이며 유일한 승리자였다.

여기서 그의 뜻을 거스르고 멀쩡히 살아나간 자는 없었다.

여기 발을 들인 자의 운명은 둘 중 하나다. 절대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망가지거나, 절대자의 손을 잡고 적당한 대접에 순응하거나.

그런데 가면 쓴 남자는 겁도 없이 절대자의 손길을 거부했다.


“백 배를 요구했단 말이지.”

브릭 남작은 비서가 전한 말에 신경질적으로 웃었다.


“그래, 지금쯤이면 콧대가 하늘을 찌를 만도 하지. 실수하기 전에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려 줘야겠군.”

브릭 남작은 제 앞마당에서 뛰노는 가면을 비웃으며 아끼는 투사들을 내보냈다.

맨 처음 나선 건 맨손으로 살을 찢는 서부의 악명 높은 학살자.

하지만 그는 가면에게 졌다.


“……우선 병사 봉급의 스무 배로 시작해서 사례비를 차츰 높여 드리겠습니다.”

“싫은데?”

그다음 나선 것은 칼날에 맺힌 피를 먹고 산다는 단두대의 종복.

하지만 그도 가면에게 졌다.


“마흔 배까지 가능합니다. 이 정도 대우받는 투사는 손에 꼽힐 겁니다.”

“됐다니까 그러네.”

살아오며 죽인 사람의 수가 죽인 벌레의 수보다 많다는 대죄인.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죽지 않는 잉걸불.

살벌한 앞치마가 매력적인 푸줏간의 왕.

살육에 미쳐 파문당한 사제라는 설정이 좀 과하다고 평가받는 오열하는 자.

그 밖에 개성적인 별명을 가진 투사들이 나섰지만, 전원 가면에게 패했다.

그래서 틈틈이 협상을 시도하던 남작의 비서는 궁지에 몰려 애걸했다.


“어제 말씀하신 백 배, 드리겠습니다!”

원래 남작은 가면의 콧대를 꺾은 후 제 밑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가면의 콧대는 꺾이기는커녕 깎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그 비정상적인 활약에 남작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말았다.


“호화 저택과 서부의 명마도 준비해 뒀습니다. 그리고 브릭 자작님과 연을 맺을 수 있는 특별한 자리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그 다급함은 이 파격적인 조건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면의 남녀가 투기장에 등장한 지 오늘로 사흘.

그사이 가면의 남자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이곳의 수문장 역할을 하던 투사들까지 가볍게 제압했다.

그리고 남자에겐 ‘얼굴 없는 유모님’이라는 미묘한 별명도 붙었다. 적을 순식간에 쓰러트리는 게 아기를 재우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이유였다.

그래서 이곳의 주인이자 설계자이며 승리자인 브릭 남작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우선 저 유모 자식이 따낸 포상금이 어마어마했다.

하루 단위로 정산되는 포상금은 승리할 때마다 갑절로 늘어난다. 다만 한 번이라도 패하면 앞서 쌓은 상금도 날아가기에, 노련한 투사들도 두세 번 연승하면 안전하게 물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 상냥하고 탐욕스러운 가면은 매일 수십 회가 넘는 연승 기록을 세워 포상금을 미친 듯이 불렸다. 대충만 계산해도 이 투기장의 기둥을 뽑아 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 허풍 같은 이변으로 투기장의 분위기도 엉망이 되었다.

이곳에서 벌이는 싸움도 일종의 서커스다. 그래서 관객의 흥미를 돋우는 게 최우선인데, 생사가 오가는 장소인 만큼 그에 어울리는 비장함과 천박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용병이든 관객이든 미쳐서 목을 맨다.

그런데 얼굴 없는 유모님께서 어린애 손대중하듯 투사들을 눕혀 주시니, 이 폐허에 팽배하던 살벌함도 온 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곳의 명성을 높이던 투사들의 위엄은 진창에 처박혔다.

용병들은 도전을 멈췄고 관객들은 낄낄대며 유모한테만 돈을 걸었다.

달구경을 기다리며 기분을 내던 비스의 귀족들도 흥이 식은 듯 피식대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정말 망하게 생겨서, 브릭 남작은 체면이고 뭐고 단 사흘 만에 납작 엎드렸다.


“수고비 백 배에 저택에 명마라…….”

이건 명백한 항복 선언이지만, 이비는 머리카락을 꼬며 뜸을 들였다. 그러더니 아주 우쭐한 목소리로 거들먹댔다.


“진작 그럴 것이지.”

“그, 그럼 계약하시는 겁니까?”

“아니, 안 해.”

비서가 반색하며 되묻자 이비는 냉큼 거절했다. 그러곤 얄밉게 재잘댔다.


“너무 늦었어. 우린 충분히 벌었거든. 내일 떠날 거니까, 포상금이나 준비해 놔.”

“내, 내일 떠나…….”

“응, 그믐 전에 떠날 거야. 요즘 이 근방 흉흉하잖아. 기껏 부자가 됐으니 이제 몸 사려야지.”

이비는 비서가 질문을 완성하기 전에 그 말을 냉큼 가로챘다. 그러곤 오만방자하게 비서를 채근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을 상금은 내일까지 준비해. 황금으로 줄 거지? 무게가 얼마나 되려나? 마차 몇 대 빌려야겠다, 그치?”

이비가 디에스를 돌아보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물론 다 공갈이지만, 비서는 마음이 급해졌다.


“저, 그 황금을 한 번에 옮기시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근방에 용병들이 모여 있는데 그들이 언제 강도로 돌변할지 모르고…….”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너흰 약속이나 제대로 지켜. 전부 깨끗한 황금으로, 외상은 없어.”

이비의 고압적인 요구에 비서는 결국 사색이 되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브릭 남작은 심장마비의 전초 증상에 시달렸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유모 놈한테 지급할 포상금을 급히 계산했다.

그의 비현실적인 승리는 비현실적인 숫자로 이어졌고, 결국 브릭 남작은 절망과 우울과 공포와 그 밖의 모든 괴로움에 시달리게 되었다.

투기장의 재화를 다 긁어모아도 유모에게 지급할 포상금엔 턱없이 모자랐다.

이대로 가다간 파산이다. 그건 절대로 안 될 일.

브릭 남작은 다급히 대안을 찾았다.

당장 떠오르는 건 곧 있을 그믐뿐이었다.


 

***



“가면은 벗고 쉬세요.”

막 씻고 나온 디에스가 침대에 누운 이비를 보고 말했다.

피비린내 나는 투사들에게 빈혈을 선물하느라 지쳤는지 이비는 여전히 가면을 쓴 채, 관짝에 들어간 사람마냥 두 손을 가슴에 포개고 누워 있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집사가 잔소리를 했지만 이비는 꼼짝하지 않았다.

디에스는 혹시 잠들었나 싶어 침대 옆으로 다가갔다. 그제야 이비가 가면 속에서 웅얼댔다.


“집사, 내가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요.”

“봤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천재가 맞는 것 같아요.”

귀 기울이던 디에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침묵에 이비는 곧장 항의했다.


“봐 봐요, 객관적으로 그렇잖아요. 나는 어쩜 이렇게 똑똑할까요?”

심지어 장난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


“똑똑하기만 한 게 아니라 능력도 엄청나. 유능해. 천재야.”

“……자기 입으로 그러는 거 안 창피해요?”

“전혀요. 사실인걸요.”

이 뻔뻔한 태도에 디에스는 대리 수치를 느꼈다. 그래서 반박할 말을 찾았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디에스도 일이 쉽게 풀려서 내심 놀라고 있었다.

브릭 자작가는 비스 남부를 장악한 권세가고 이 투기장은 그 가문을 등에 업은 무법지다.

더욱이 이곳의 주인은 폐허에 황금성을 지은 야심가. 그가 사업 밑천으로 애지중지하는 밤의 일족을 빼내는 건 전직 사냥개에게도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래저래 방법을 고민했는데, 이비는 투기장의 정보를 듣자마자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계획은 마치 정해진 미래인 양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못 하겠네요.”

결국 디에스는 이비의 자랑과 자부에 동의했다.

비단 이번만이 아니라 이비는 언제나 대단했다.

지하에 갇혀 있던 무렵, 디에스에게 이비는 어린애와 야생동물 그사이의 존재였다.

그런데 성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돌변했다. 아니, 본색을 드러냈다.

오만한 탑주를 협상장으로 끌어내고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고 티엔다의 귀족들을 사로잡아 유력한 성녀 후보로 자리를 굳혔다.

하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더 이상 이비를 전처럼 여기지 않았다. 단지 여동생처럼 바라보기에 이비는 너무 위대했다.

이비도 그걸 스스로 느낀 모양인지, 다소곳이 누운 채 감탄을 이어 갔다.


“게다가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아. 나 너무 반칙 같아.”

“성격……?”

“왜요, 이 정도면 착하죠. 로히카 세드로도 카셀 몬트라도 아직 돌연사하지 않았잖아요. 나 엄청 착해.”

디에스는 이비의 헛소리를 받아 주다가 잠시 멈칫했다.

여전히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는 이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나직이 말했다.


“첫날 본 가면이 정말 후작이면 좋은 기회긴 하지.”

이비는 폭넓게 생각한다. 그러니 이런 생각도 안 했을 리 없다.

가면을 쓰고 비스로 내려온 카셀 몬트라. 제 앞을 가로막은 그가 여기서 급사하면 어떨까.

말마따나 좋은 기회다. 타지에서 변을 당했으니 이비가 의심받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물을 정화하는 고귀한 능력은 사용하기에 따라 살아 있는 걸 몰래 재울 수도, 죽일 수도 있다.

만약 찝찝하다면 디에스가 나서도 된다. 사냥개가 하는 일이 원래 그런 것이니까.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지만, 디에스는 이비를 잡아 세웠다.


“그런데 하지 마.”

“후회할까?”

“후회하면 다행이고.”

“그럼?”

“못 멈춰.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턴 쉬우니까.”

“가르치려 들지 마, 흥!”

“……그래, 너 그런 성격이야.”

조심히 묻던 이비는 디에스의 경고에 버럭 불만을 터트렸다.


“불공평하잖아, 저 집돼지는 내 사정 전혀 안 봐주는데 나만 봐주는 건 억울해!”

“후작이 널 죽이려고 한 적은 없잖아.”

“네 찻잔을 죽였잖아! 너야말로 아내들의 원수를 갚아, 이 비겁자!”

그뿐이었다. 이비는 꽤 삐뚤어진 녀석이지만, 다행히 선을 지킬 줄 알았다.


“그래, 이것도 다 내가 착하기 때문이겠지. 이렇게 한 사람한테 다 몰아주다니, 역시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다만 착함의 정의를 크게 착각하는 건 집사의 걱정거리였다.

똑똑.

이비의 불평과 푸념이 이어지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이비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디에스는 가면을 다시 썼다.


“들어와.”

이비의 허락에 문이 열렸다.

이비는 슬슬 남작의 비서가 찾아올 때라고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방으로 들어온 건 조금 이른 저녁 식사였다.

커다란 트롤리를 끌고 들어온 건 첫날부터 이비와 디에스의 시중을 들던 하녀였다.

여전히 가면을 쓴 그 하녀는 기름진 요리를 테이블에 차근차근 내려놓았다.

이비는 그 만찬을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했다.


‘아직 고민 중인가?’

브릭 남작은 약속한 포상금을 내주지 않을 거다. 줄 수도 없고 주고 싶지도 않을 거다.

그런데 당장 내일 떠난다며 돈을 요구했으니 어떻게든 손을 쓸 것이다.

회유는 모조리 실패했고 이 강력한 유모를 쓰러트릴 투사도 없으니, 궁지에 몰린 남작이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기껏해야 두 가지.


‘밤의 일족의 손에 죽게 판을 짜거나, 독을 쓰거나.’

마침 가면도 썼겠다, 이렇게 제거한 다음 대역을 세우면 되니까.


‘이제 그만 비밀 경기로 초대해 주면 좋겠는데…….’

이비는 음식을 내려놓는 하녀를 바라보다 한숨을 삼켰다. 그 하녀는 어제와 달리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역시 독을 먼저 쓰는구나.’

마냐냐의 가호를 받은 정화자에게 독이라니, 이게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 남작은 까맣게 모를 거다.

이비는 그의 같잖은 시도를 비웃다가 웃음을 뚝 그쳤다.

후작이 이비를 죽이려고 한 적은 없다. 그런데 이 남작은 이비의 목숨을 아주 노골적으로 노리고 있다.

그럼 나도 봐줄 필요 없는 거 아닌가?

이비는 가만히 생각하며 가면 쓴 하녀를 바라보았다.

하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그리고 떨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저렇게 동요하는 건 여기 독이 든 걸 안다는 뜻. 어쩌면 직접 독을 탄 장본인일 수도 있다.

불쾌해진 이비는 그 하녀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러곤 그의 손목을 낚아채며 표독하게 물었다.


“왜 그렇게 긴장해? 거기 독이라도 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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