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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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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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개였다
2023.06.01.
탑주가 다녀간 후, 시온은 복잡한 속내를 삼키고 이비를 기다렸다.
그러곤 여느 때처럼 무방비하게 찾아온 여자를 단숨에 넘어트렸다.
“읍……!”
이비의 목소리가 시온의 손바닥 아래서 뭉개졌다.
늘 고고하던 여자가 바닥에 깔리자 시온은 그 여자를 다리 사이에 가뒀다. 그러곤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팔목을 잡아 눌렀다.
이비가 몸을 비틀었지만 시온에게 그 몸부림은 덧없이 가벼웠다. 오히려 이대로 으스러트리지 않게 조심해야 할 정도였다.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했는지, 이비가 움직임을 멈추고 시온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시온도 제 밑에 깔린 이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나? 기껏 목줄을 채웠으면 틈을 보이지 말았어야지.”
시온의 조롱에도 여자의 눈은 고요했다. 그래서 시온은 이 여자가 좀 더 흐트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널 죽이면 저주가 풀린다던데, 시험해 볼까?”
시온이 이비의 턱을 덮은 손에 가볍게 힘을 줬다.
그러자 이비가 붙들리지 않은 손을 뻗었다. 시온은 그 손이 뭘 할 수 있나 싶어 그냥 두었다. 그래서 이비의 손은 방해 없이 시온의 뺨에 닿았다.
설마 애원이라도 하려는 건가.
시온이 눈을 가늘게 뜰 때였다. 이비가 손을 넓게 펴더니, 엄지와 검지로 그의 양 뺨을 꾹 눌러 버렸다.
일순 얼굴이 구겨진 시온이 짜증을 내며 그 손을 쳐냈다.
“이게 장난 같아?”
“아이.”
시온의 손 틈으로 뭉개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억양으로 전달된 부정은 여상히 침착했고, 조바심이 난 시온이 차갑게 윽박질렀다.
“그럼 제대로 저항해.”
직후 인정사정없는 따귀가 날아왔다.
콰앙! 따귀를 쳤는데 굉음이 터졌다. 이비가 손을 모아 정확히 고막을 내리친 탓이었다.
삐 소리가 나며 시온은 잠시 균형을 잃었다.
물론 라우렐 백작의 우월한 신체는 곧장 감각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땐 이미 시야가 뒤집힌 후였다.
어느새 시온은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반대로 이비는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움직이지 마.”
역전된 상황에서 이비가 짧게 명령했다.
그래서 시온은 꽤 기가 막혔다. 설마 이렇게 바로 제압당할 줄은 몰랐으니까.
“누가 왔었나?”
이비가 해명할 기회를 줬지만 시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비는 시온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날 죽이면 네 저주가 풀리는 건 맞아. 그래서 날 죽이고 도망치는 게 네가 원하는 건가?”
“……탑의 진흙탕 싸움에 낄 생각은 없어.”
이어진 추궁에 시온이 비로소 입을 뗐다. 그러더니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또 모르지. 나중엔 어떻게 될지.”
시온의 도발에 이비가 짧게 혀를 찼다.
그 소리가 시온의 기분을 처참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아닌 척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쯤 얘기했으면 알아들었겠지.’
로히카 세드로가 널 노린다는 걸.
시온은 이비에게 탑주에 대한 걸 일러바쳐 아첨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 미지근한 계류도 이제 끝이니까.
이비 아리아테를 죽이면 시온 라우렐의 저주가 풀린다.
로히카가 던지고 간 문장은 진위와 관계없이 시온에게 혐오감을 선사했다.
그건 그가 저주에서 깨어난 이후, 라우렐에 느낀 것과 비슷한 환멸이었다.
시온은 제 집안이 자신에게 벌인 짓이 미치도록 역겨웠다. 그런데 더 끔찍한 건 그들의 방식을 긍정하는 자신이었다.
삶을 빼앗긴 당사자임에도 시온은 그들을 이해했다. 착해서가 아니라 사고방식이 그 모양이라서.
견제도 통제도 불가능한 힘을 두려워하는 건 당연하다.
차라리 인형으로 만들어 용에게 던져준 건 현명한 처사였다.
시온은 이걸 어쩔 수 없이 인정했고, 그건 가장 지독한 자학이었다.
그런데 로히카가 던진 말 때문에 또 비슷한 일을 겪게 생겼다.
시온이 목줄 푸는 방법을 알게 됐으니, 이비 아리아테는 대책을 세울 것이다. 아마 그를 내쫓는 방식으로.
그래서 시온은 먼저 구색을 갖추기로 했다.
그럼 적어도 억울하진 않을 테니까.
자신이 내쳐진 이유를 알아서 납득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다분히 건성으로 덤볐다가 도로 제압된 시온은 얌전히 판결을 기다렸다.
이윽고 이비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정말 귀여운 구석이 하나도 없구나.”
시온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내가 말했지. 넌 전혀 특별하지 않다고.”
시온은 저도 모르게 이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때 이비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마치 모든 게 지루하다는 얼굴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용의 가호를 받았으니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특별 취급이 당연하기야 하겠지. 네가 아마네세르 만큼 강하고 위험한 건 사실이니까.”
이비는 그렇게 무심한 얼굴로, 제 밑에 깔린 남자를 내려다보며 주장했다.
“하지만 내가 훨씬 더 강해. 너 하나쯤은 목줄 없이 기를 수 있을 만큼.”
그 말에 시온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다 들킨 기분에 그는 멍청히 있다가 이내 이를 악물었다.
정말 짜증 나는 여자.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여자.
비참함을 숨기고 싶은데 그걸 굳이 헤집어 대는 여자.
시온이 날 선 눈으로 쏘아봤지만, 이비는 개의치 않고 채근했다.
“알아들었으면 대답해.”
“……허세를 부리려면 주변 정리부터 제대로 하든가.”
“로히카 세드로 말이지?”
다행히 이비는 누가 일을 꾸몄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비는 혼자 잠깐 생각하더니 시온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여전히 표정은 없지만, 묘하게 그를 동정하는 기색이었다.
시온은 그 한숨의 결이 이상한 걸 눈치챘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은 후였다.
.
.
.
“개였네.”
로히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심지어 충견.”
그러곤 놀리는 투로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덕분에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심각했던 시온은 깊고 깊은 혼란에 빠졌다.
로히카가 다시 찾아왔다. 이비와 함께, 무려 이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로.
시온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돌처럼 굳어 있자 로히카가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사과했다.
“시험해서 미안해요, 백작. 그치만 이해해 줘요. 내가 이비를 워낙 아껴서.”
이게 무슨 개소리야. 아니야, 닥쳐.
시온은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로히카는 이 가혹한 현실을 그에게 굳이 굳이 직면시켰다.
“물론 나는 이비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해요. 하지만 백작이 너무 위험한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노파심에 확인해 본 거예요. 틈이 생기면 반항할지 순종할지. 근데 설마 내 이름을 고대로 일러바칠 줄은, 아, 섭섭해!”
로히카는 섭섭하다면서 배를 잡고 웃었고, 시온은 그대로 영혼이 분리되는 기분에 시달렸다.
“다행이야, 못된 이리 새끼면 당장 쫓아내려고 했는데 착한 멍멍이였어.”
“그만 놀려.”
로히카가 계속 깔깔대자 이비가 제 어깨에 걸쳐진 팔을 쳐내며 핀잔했다. 하지만 로히카는 쉽게 굴하지 않았다.
“왜, 괴롭혀 주는 걸 좋아한다며.”
다른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던 시온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시온이 모함당한 사람처럼 로히카를 매섭게 쳐다봤다. 그러자 로히카가 다분히 연극적으로 고개를 갸웃댔다.
“응? 아니에요? 이비가 그러던데.”
“무슨 헛소릴…….”
“아, 선후 관계가 잘못됐구나. 괴롭혀 주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이 괴롭혀 줘야 하는 건가?”
그 말에 신화적 위험성을 가진 남자는 다시 고장 났다.
“아니라고 못 하네? 응, 진짜구나. 백작은 우리 이비를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나를 홀랑 팔아넘겼구나. 네, 그런 거라면 내가 이해해야죠. 근데 언제부터예요? 이제 겨우 한 달 알고 지냈는데, 대체 언제부터야? 응?”
로히카의 학대가 이어졌지만 돌이 된 시온은 저항도 반격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탑주의 집요하고 요란한 성미를 아는 이비가 대신 답했다.
“대공 성에 다녀와서 나한테 덤빈 날이었나.”
‘그걸 왜 아는데!’
정곡을 찔린 시온의 영혼이 결국 피를 토했다.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왜지? 티 낸 적 없는데 왜 들킨 거지? 심지어 그냥 들킨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그 얘길 했어? 저 둘이서?
시온은 오싹대는 수치심에 졸도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그 여자들은 끝까지 무자비했다.
“얼굴이 빨개졌네요, 백작.”
“그만 놀려, 겉보긴 저래도 속은 아직 열일곱 살이야.”
“한창 솔직할 열일곱?”
“저쪽 열일곱은 아닐걸.”
“좋아도 싫은 척하는 열일곱이라는 거야? 어머, 성가셔. 난 열일곱 살 때 하얗고 귀여운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만해, 이 마녀들아…….
결국 시온의 얼굴은 터지기 직전까지 달아올랐다.
그 불쌍한 열일곱이 불을 토할 것처럼 부들댈 때가 되어서야 로히카가 장난을 멈췄다.
“알겠어요, 진정해요, 그만할 테니까.”
로히카는 얄미울 만큼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키더니, 기분 좋은 얼굴로 시온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돌연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어쨌든 탑주님은 백작이 착한 아이라서 무척 안심했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이비는 백작의 구원자이기 전에, 티엔다비스에 꼭 필요한 아이거든요.”
로히카는 그 말을 끝으로 해맑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의 시온은 그 말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겨를조차 없었다. 로히카 세드로라는 고문에서 해방된 그는 이제 이비와 단둘이 남은 상황을 타파해야 했다.
계속되는 위기에 시온은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어디서부터 수치스러워해야 할까.
로히카의 함정에 넘어간 거?
그래서 비장하게 이비를 덮친 거?
그러다 본전도 못 찾고 놀림당한 거?
전부 치사량에 가까운 굴욕이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비에게 반한 걸 시점부터 들켰다는 거.
궁지에 몰린 시온이 눈을 질끈 감는데, 이비가 그를 불렀다.
“시온.”
어느새 소파에 앉은 이비는 여전히 냉랭했다.
그렇게 한결같은 분위기로 이비가 물었다.
“창피해?”
죽을 것 같다.
“시간이 해결할 거야.”
네가 더 나빠…….
시온이 부득 이를 갈자 이비가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시온은 윽 신음했지만, 이내 터덜터덜 그 옆에 가서 앉았다.
이미 다 들켰으니 마지못해 솔직해지자면 시온은 이비의 곁에 앉는 걸 좋아했다.
부단히 아닌 척했지만, 정말 최선을 다해 시치미를 뗐지만, 이비 아리아테는 너무 예쁘고 미묘하게나마 친절하며 그의 세계를 다시 주워 담아 준 사람이니까.
그치만 이걸 들키는 건 또 별개의 문제라, 시온은 어지러울 만큼 창피해졌다.
결국 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고, 이비는 적당한 위치까지 내려온 그의 머리를 건성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명백한 개 취급인데 시온은 이마저도 좋았다.
그래서 아집으로 똘똘 뭉친 가면을 벗고 힘 없이 인정했다.
자신이 이리는 못 된다는 걸.
시온 라우렐은 개였다.
심지어 한 번 좋아하면 꼬리가 멈추지 않는 바보 같은 충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