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기다림의 끝
(112/129)
112화. 기다림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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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기다림의 끝
2023.06.26.
시온은 계곡을 가득 채운 검붉은 군대를 바라보았다.
검은 제복으로 빈틈을 지운 군인들과 타오르는 날개를 늘어트린 용들.
존재 자체가 반칙이자 위협인, 오직 시온에게만 복종하는 군대였다.
사실 동녘엔 이런 전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시온은 심혈을 기울여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다. 홀로 이비를 찾아 헤매던 시절의 무력감과 고독감이 뼈아팠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든 자신의 손과 발이 될 집단을 완성했고, 결국 필요할 때 써먹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시온은 이들의 위용이 자랑스럽기보다는 감추고 싶었다.
이비가 여기 왔을 때, 자길 잡겠다고 진을 친 군대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질린 듯, 정말 징그럽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이비의 얼굴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심지어 이비는 그를 따돌리려고 갖은 애를 썼다. 여러 대의 마차를 부르고 바옌 공작에게 마중을 부탁하면서.
하지만 시온은 그 노력을 깨끗이 무산시킬 예정이고, 심지어 이 행태는 공작의 말처럼 아녀자를 노리는 도적 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시온은 이비에게 더 미움받을 것을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했지만, 그러면서도 물러나지는 못했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만큼 원망하는 마음도 컸기 때문이다.
시온은 잘 배운 도련님답게 무엇이 성숙한 태도이고 현명한 대응인지 머리로는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 유연하게, 어른스럽게, 다정하게, 그러니까 그 남자처럼 굴려면 지금이라도 그럴 수 있었다.
심하게 군 것을 사과하고, 일방적이었던 지난 일도 반성하고, 왜 그렇게 했는지 다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성의껏 해명하고.
모쪼록 용서를 구하며 내 협소한 마음이 문제였음을 시인하고 단 하루도 너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찢어진 부분을 기워 낼 수 있는 걸 배움으로, 또 그 남자가 넘긴 기억과 경험으로 알고는 있었다.
이비가 말한 것처럼 어차피 밑바탕은 같은 인간이라서 시온도 자연스럽게 그럴 수 있었다. 애초에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끝내 그러기로 결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도 나쁘니까.
―네, 그걸로 타협할 수 있어요.
―실망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시온은 이비가 이렇게 말한 게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비답다고 생각했다. 빈정대는 게 아니라 이런 것까지 타협할 수 있는 게 진심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상처도 받았다. 제법 크게.
내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너에겐 내가 고작해야 실망스러운 타협점이라니.
실없는 웃음이 절로 나올 만큼 크게 상처받았었다.
물론 시온은 이것도 이해는 했다.
그 남자는 이비에게 한없이 다정했지만 시온은 그러지 않았다. 다정하긴커녕 고압적이고 매몰차며 이비의 앞길을 일방적으로 막아섰다.
그러니 저 취급도 당연할 뿐 아니라 관대한 것으로, 아주 너그러운 처사로 여겨야 옳았다.
하지만 시온은 이를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너 역시 나쁘니까.
사실 시온은 티엔다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비가 미웠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예쁜 모습으로 웃는 네가, 혼자 꽤 잘 지낸 것처럼 보이는 네가, 그리고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네가 정말 미웠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하는 네가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너에게 너무 쉽게 밀려난 내가 너무 초라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널 미워하기로 했다.
양보하지 않기로 했다. 먼저 구애하지 않기로 했다. 그 남자처럼 다 버리고 매달리는 개가 되는 건 죽어도 싫었다.
네가 먼저 알아보길, 네가 먼저 다가오길, 네가 먼저 나를 달래길 바랐다.
설령 불합리한 바람이라도, 그간의 헌신과 희생에 보상을 원했다.
왜냐하면 내 처지는 이미 불합리하기 짝이 없으니까.
시온은 나약하고 다정해서 미움받는 걸 두려워하는 주제에 오만하고 독선적이기도 했다.
왕자로 태어난 자의 아집과 멸망을 반복한 자의 한을 모두 가진 탓이었다.
그래서 지난 새벽 마주한 이비의 표정과 눈빛, 목소리와 체온과 숨결까지 세세히 기억하면서도 그는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걸 떠올릴 때마다 상처받고 후회하면서도 끝내 상냥해질 결심은 하지 않았다.
시온은 기꺼이 좋은 마음을 먹기엔 지독히 꼬여 있는 인간이었고, 그래서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도 기어이 굽히기보다는 견디기를 택하는 인간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나아가는 길이 어느 방향인지 알면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권리라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시온의 심경에는 차츰 변화가 생겼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는 이비 때문이었다.
.
.
.
같은 시간, 디에스는 라우렐 백작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비와 바옌 공작이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두 시.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다. 게다가 하늘에서 멀리 살펴보는 타르데스의 따님들도 아직 이비나 이쪽으로 오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너무 늦는데.’
디에스가 묵묵히 시계를 보고 있을 때였다.
“어째 아가씨가 늦으시는군.”
뒷짐을 진 바옌 공작이 디에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다행히 공작의 목소리에 노기는 없었다. 계곡을 점령한 백작을 증오하느라 이비의 지각엔 별다른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공작이 그렇게 태연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아리아테가 내게 약속한 것이 있네.”
“무엇입니까?”
“나한테 저 백작을 놀릴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는데, 혹시 그게 이건가 싶군.”
“이비 님이 의도한 일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저 사람을 놀릴 일은 맞는 것 같습니다.”
디에스의 침착한 듯 무엄한 대답에 공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이 간 큰 집사가 마음에 든 듯 다시 한 마디 덧붙였다.
“백작이 저러는 이유가 아리아테에게 잔혹하게 차였기 때문이라면 영원히 놀릴 수 있을 것 같다만.”
“죄송합니다, 제가 확인해 드릴 수 없는 내용입니다.”
디에스가 모른다고 하자 공작이 시치미 떼지 말라는 듯 쳐다봤다.
하지만 디에스도 이 사태에 대해선 정말 아는 게 없었다. 그나마 그가 아는 건 이 상황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전후 사정뿐이었다.
그러니까 이틀 전, 이비가 드디어 백작에 대한 것을 실토했다.
이비는 백작이 사실 이 집에서 자길 키워 준 아저씨와 동일 인물이며, 그래서 오늘 그와 담판을 지을 예정이라고 했다.
디에스는 이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 그게 사실이라도, 유비아의 설명대로 그 백작이 정말 이비의 옛 은인이라 해도, 백작과 소위 담판을 짓겠다는 이비의 결정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디에스는 그 백작이 격렬히 싫었다.
대뜸 나타나 이비를 괴롭히고 울린 자식이다. 고압적이고 폭력적이며 사사건건 거만하게 굴면서 이비를 고생시킨 놈이다.
그래서 여러모로 감정이 좋지 않은 인물이고, 그래서 이비가 놈에게 희한한 관심을 보일 때는 눈앞이 캄캄할 정도였다.
저 좋다던 멀쩡한 남자를 다 쳐내고 고른 게 이런 독특한 쓰레기라니, 디에스도 이번만은 이비의 판단을 지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자가 이비의 아저씨라고 하니 성에 안 차도 뜯어말릴 도리가 없었다. 이비의 세상이 그 남자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이비가 이런저런 조리법을 알려 달라고 할 때는 심란하지만 협조했다.
이비와 백작이 밤새 돌아오지 않을 땐 억장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꾹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 혼자 비를 맞으며 돌아온 이비가 대뜸 도망치자고 했다.
그 후엔 저 폭군이 득달같이 쫓아와서 지형까지 바꿔 가며 디에스를 붙잡았다.
이게 디에스가 알고 겪은 현 상황의 전부였다.
요양 중 이런 일에 휘말린 처지가 조금 슬프지만, 대체 둘이 뭘 하다가 이 사달을 냈는지도 모르겠지만, 디에스는 차라리 잘된 셈 치기로 했다.
자길 뿌리친 여자앨 잡겠다고 사방에 벼락을 떨어트리고 군대를 끌고 나온 인간이다.
저런 몹쓸 놈에게 이비를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디에스는 이비가 나중에라도 백작을 만나겠다고 하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아니 되노라 선언키로 결심했다.
물론 그전에 이 고비부터 무사히 넘겨야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자네, 탑에 보고해야 하지 않나?”
공작이 불현듯 말했다. 디에스는 짐짓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추후 필요하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추후?”
공작이 디에스의 표현을 따라 하며 그를 묘하게 쳐다봤다. 그래서 디에스는 잠자코 시선을 피했다.
이엘 바옌은 노련한 인물이다. 그러니 이미 이상한 점을 발견했을 것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이비가 현 상황을 예측하고도 탑주 대신 공작을 부른 것도, 상황이 이 지경인데 그의 집사가 보고를 미루는 것도 모로 보나 부자연스럽다.
“탑주가 이 사실을 알면 뭐라고 할지 궁금하군.”
아니나 다를까 공작이 미심쩍다는 듯 중얼댔다.
그래서 디에스는 탑 이야기가 나왔을 때 깍지를 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손이 떨리는 걸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디에스 역시 탑에 알려야 하나 고민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 탑주와 만나는 것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그게 이비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없어서 판단을 보류하는 중이었다.
디에스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이비를 되찾기 위해 백작을 짓뭉개는 탑주도, 내기에서 이기려고 이비를 방치하는 탑주도.
디에스가 아는 로히카 세드로는 자신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동시에 모든 일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섣불리 탑으로 가는 대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는 이비를 믿고 있었다. 이비는 무슨 일이든 어떻게든 해내는 녀석이니까.
그래서 늘 그랬던 것처럼 기다렸다. 그 조용한 기다림은 디에스가 자신을 위해 발버둥 치는 이비에게 보낼 수 있는 최선의 신뢰였다.
디에스는 그렇게 담담히 이비를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났다. 새파랗던 하늘도 차츰 바래졌다. 그럼에도 이비는 오지 않고 하루해가 지려는 듯 서쪽으로 기울었다.
하늘이 알록달록 물들기 시작하자, 망부석처럼 앉아 있던 디에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계곡 저편에 앉은 시온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바옌 공작과 모렌은 이비의 집사가 백작에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 집사의 걸음은 무척 조용하고 차분해서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디에스는 그렇게 시온 앞에 섰다. 앉아 있던 시온도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디에스는 마침 적당한 위치와 각도로 놓인 시온의 얼굴을 있는 힘껏 갈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