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여섯 번째 툴을 가진 투수(2)
월요일은 야구가 없는 날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야구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어제 있었던 경기를 곱씹는 것뿐이었다.
누군가는 우리팀 어떤 타자가 겨울 시즌에 제대로 준비를 한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으며 또 누군가는 벌써 우리 팀은 올해 조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런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듣는 이는 없었다.
누군가가 제대로 준비한 것 같다고 말하는 저 사람은 내일 경기 혹은 그다음 경기 정도까지 그 타자가 무안타라도 하면 얼른 2군 내려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할 것이 뻔했고 올해는 조진 것 같다는 사람은 1경기만 이겨도 올해 우승은 우리 팀이라고 떠들 것이 뻔했으니까.
무슨 집단 조울증 환자들 같아 보이는 일희일비였지만 그것이야말로 야구 커뮤니티가 즐거운 이유 아닐까?
그리고 월요일 밤에서 화요일 새벽으로 넘어가는 이 시간.
아직까지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집중된 이슈는 당연히 최수원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발군은 일요일에 있었던 선발 경기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금요일에 있었던 데뷔전 2연타석 홈런도 커다란 이슈이긴 했지만,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원래 연기 대상은 하반기 임팩트라고.
최신 이슈에 더 집중하게 되는 건 대부분 사람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
무려 댓글 숫자만 800개가 넘어가게 불타오르는 글이 있었다.
[최수원 160km/h 거품설에 관하여.]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구속을 측정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어.
전통적으로 구단들이 사용해온 도플러 효과를 이용한 측정 방식이랑 보통 방송국의 카메라를 사용해서 프레임 단위로 구속을 측정하는 방식.
물론 후자가 훨씬 세련된 방식인데 이게 문제가 그게 보통 구속이 2, 3km/h 빠르게 나온다는 거임. 실제로 미국에서 2017년에 pitch f/x에서 트랙맨으로 구속 기준 변경하면서 같은 투수들이 1마일씩 구속이 올랐음.
(2016년과 2017년 MLB 구속 사진 자료)
심지어 도플러 효과 쓰는 구식 스피드건은 pitch f/x보다도 더 느리게 찍힘.
(1990년대와 2000년대를 모두 뛰었던 선수들의 구속 사진 자료)
보면 중계화면에서 155 찍혀서 ‘우와’ 하는데 전광판에 152 찍혀 있던 게 그런 이유임.
(TV 중계 화면과 전광판 구속 사진 자료)
아, 물론 최수원은 포수가 병신짓 한 직후에 전광판에도 160.1km/h 찍혔지. 근데 그거 암? 사직구장 이제 도플러 효과 이용한 스피드건 아예 안 씀. 전광판도 트랙맨 데이터로 쓰고 있음. 물론 KBO에서 구속은 공인 기록이 아니니까 전광판에 160.1km/h 찍혔으면 160 넘긴 거지. 하지만 이제 찐으로 최초 160 이상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글쎄, 이전에도 트랙맨 기준으로는 160을 넘긴 토종 투수들이 몇 명 더 있었어.
(TV 중계 화면상 160 이상의 구속이 나왔던 선수들의 화면 캡쳐 자료)
그러니까 요지는 형평성이지. 이전에 160넘긴 투수들은 구단 기준이 스피드 건이었으니 160을 못 넘긴거고 최수원은 트랙맨으로 바뀐 이후니까 넘긴 거다? 물론 아까도 말했다시피 구속은 KBO의 공식 기록이 아니야. 하지만 그래도 진짜 최수원이 160 넘긴 한국 역사상 최고의 파이어볼러 소리 듣고 싶으면 163은 던지고 와야 한다고 본다. 저거 이전 스피드건 기준으로는 157정도에 불과할 테니까.
본래 온갖 어그로들과 잡다한 글들이 넘쳐나는 게시판이기에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한 제법 정성 어린 게시글은 금세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모으는 법이다.
반박을 하는 사람들. 긍정을 하는 사람들. 인신공격을 하는 사람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댓글의 홍수 속에서 가장 크게 미소 짓는 것은 다름 아닌 마린스의 홍보팀이었다. 분명 1승 2패. 개막전부터 루징 시리즈를 치렀는데 온라인 분위기만 봐서는 거의 무슨 마린스 우승 같은 분위기다.
“확실히 구속이 임팩트가 크긴 크네요.”
“아무래도 숫자가 한눈에 볼 수 있게 딱 직관적이잖아. 투구폼 동일한 140짜리 속구에 120짜리 체인지업의 조합이 얼마나 위력적인지 구질구질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속구 160. 이러는 게 눈에 더 들어온다 이거지.”
“근데 이거 이러면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이벤트라도 하나 개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벤트? 글쎄······. 홈런 신기록 같은 거야 워낙에 쭉 흥행이 되는 거니까 추첨 이벤트에 홈런볼 잡은 사람한테 이벤트를 해주고. 뭐 그런 걸 한다지만 최고 구속 정도로는 좀 약한데······.”
“그래 뭐 왜 그런 거 있잖아요. 160.1km/h였으니까 1601번째 입장 관객한테 뭐 최수원 선수랑 기념 사진 찍고 사인볼 같은 걸 준다거나. 그런 거요. 보니까 예전에 애들한테 팬 서비스도 엄청 잘하던데.”
“뭐, 나쁘진 않네.”
“진행할까요?”
홍보팀장이 잠시 고민했다.
“예지 씨, 작년에 우리가 4월에 관중이 얼마나 들어왔었는지 자료 있지?”
“네, 잠시만요. 찾아볼게요.”
“작년 4월에는 그래도 분위기도 좀 괜찮고 성적도 잘 나와서 관중수 꽤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과거 부산 마린스는 최고의 인기 구단이었다. 비록 창원 블레이즈가 영남권의 인기를 상당히 흡수했고 영남권 인구 자체가 나날이 감소하는 터라 그 인기가 예전만 못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평균 관중 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기 구단이다.
“아, 팀장님 찾았어요. 작년 4월 평균 관중 수 8,227명이네요.”
“그것밖에 안 돼? 우리 4월에 3위 달렸었잖아.”
“그게 재작년에 워낙에 못하기도 했었고 날씨도 좀 별로였었잖아요. 게다가 막판에 사람 좀 모일 때 즈음에는 원정 위주로 다녔었고요.”
“최수원 선수 다음 등판이 언제지?”
“별다른 일 없으면 이번 주 토요일 대전 피닉스랑 경기 아닐까요? 뭐 늦춰진다고 해도 일요일일 거고요.”
“작년 4월 주말, 휴일에는 관중수가 어땠지?”
“홈 경기는 둘째 주, 셋째 주였고 각각 11,651명. 10,319명. 14,411명. 13,047명이었습니다.”
“우리 지난 개막전 시리즈 토요일에는 21,000명 넘게 왔었지? 그건 개막전 특수라고 쳐도 지금 분위기 보면 최수원 등판일이면 160짜리 공 보러 사람들 좀 더 모일 분위기잖아. 그러면 못해도 16,000명은 모이겠지?”
“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홍보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우리 어차피 구속 소수점 두 자리까지 표기가 되잖아.”
“잠깐만요. 팀장님 설마?”
“16,013번째로 입장하는 관중으로 하자.”
“팀장님 그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다가 16,013명 안 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맞아요. 팀장님. 그러면 차라리 이건 어떠세요? 1,601번째 관객은 무조건 나오는 거니까 좀 적당히 작은 선물로 하시고. 16,013번째는 선물 큼지막한 걸로 해서 주중이고 주말이고 가리지 않고 하는 거죠.”
“오, 팀장님. 예지 씨 아이디어 괜찮은데요? 저러다가 최고 구속 갱신하면 자연스럽게 숫자도 늘리고. 혹시 알아요? 막 최고 구속 계속 조금씩 갱신하고 이러면서 화제 되면 평일에도 관중이 만육천 명 넘게 모일지?”
“평일 만육천? 그게 가능한 숫자야?”
“아마 작년 말쯤에 엘리츠가 잠실에서 호크스랑 막판 포시 경쟁할 때 목요일인데 만팔천 정도 찍었을걸요?”
마린스 홍보팀 직원들이 입 끝까지 올라온 ‘막판 포시 경쟁 해야 가능한거면 우린 안 되겠네.’라는 말을 삼켰다. 자조적인 농담도 때와 분위기라는 것이 있는 법이니까.
“그러면 예지 씨 의견대로 진행하는 걸로 하자. 예지 씨는 홍보 문구 만들고 디자인 시안 뽑히는 대로 오늘 중으로 나한테 올려줘.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그리고 김 대리는 운영팀 연락해서 최수원 선수랑 컨택해보고.”
“넵!!”
***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은 서울, 경기, 인천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프로팀의 절반 역시 서울, 경기, 인천에 위치한다. 이 말인즉 마린스와 같은 지방 구단은 전체 원정 경기의 절반 이상을 저기 서울 근처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실제 성적에서도 좀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데, 선수들이 홈구장에서 성적이 비교적 잘 나오는 것은 익숙한 구장인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집에서 출퇴근하는 것과 4성급 관광호텔에서 출퇴근하는 것은 컨디션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 역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난 진짜 이렇게 서울로 원정 갈 때마다 호창이 형이 왜 5억이나 덜 불렀는데 서울에 갔는지 알 것 같다니까.”
“알 것 같으면 이정훈 너도 가지 그랬냐? 너도 엘리츠가 5억 차이 나게 불렀었잖아.”
“아이참, 경준 선배. 전 옵션 다 포함해서 5억 차이였고. 옵션 빠지면 8억 차이였으니까 실질 금액은 차이가 꽤 크죠. 게다가 서울이랑 부산이랑 집값에 생활비 차이까지 생각하면. 무엇보다 제가 서면에서나 스타지. 강남에서는 좀 그렇잖아요.”
“쯧.”
서울로 가는 대형 버스.
마린스의 원정 버스는 총 세 대였는데 일반적인 4열 고속버스와 달리 3열의 프리미엄 버스 형태이며 좌석 간 앞뒤 간격도 매우 넓어 22인석으로 좌석 하나하나가 거의 비행기 비즈니스석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솔직히 버스만 따지자면 메이저리그도 이렇게 좋은 버스를 타는 구단은 없다.
물론 거기야 기본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주로 이동하고 버스는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할 때나 쓴다지만 그래도 거의 30분에서 길면 1시간씩 버스를 타게 되는데 그때마다 한국에서 타던 버스가 그리웠었다.
“강남은 역시 서울 태생인 수원이 데리고 가야죠. 안 그러냐 수원아?”
“네?”
“야야, 이정훈, 갈거면 너 혼자 가라. 아니, 아직 미성년자라 술도 못 마시는 애를 데리고 클럽은 무슨 클럽이야. 너 진짜 그런 낌새라도 보이기만 해봐? 이번엔 정말 가만히 안 있는다.”
“어휴, 장난입니다. 장난. 저도 민짜랑 갈 생각은 없었어요.”
이정훈과 서경준이 투닥거렸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강라온과 노형욱이 그걸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버스의 구석 자리.
앞에 앉은 감독과 멀리 떨어진 상석에 홀로 앉아있던 이규만이 이정훈을 나지막하게 불렀다.
“정훈아.”
“네, 규만 선배님.”
“너도 슬슬 나이도 찼는데 당분간은 자제 좀 하자.”
“하하, 네!! 알겠습니다!!”
“하민이 스무 살 됐다고 괴롭힐 생각 하지 말고.”
“어휴, 걔는 애초에 데리고 나갈 생각 자체가 없었습니다. 하민이는 괜히 데리고 갔다가 제가 돈 쓰고, 들러리만 실컷 서게 될 확률이 너무 높아요. 제가 좀 아이돌 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배우상한테는 안되죠.”
이정훈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서경준이 꼬투리를 잡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 그러면 수원이는 좀 만만해서 데리고 나가려는 거야?”
“에이, 수원이는 저랑 장르가 다르잖아요. 전 아이돌상. 쟨 모델상. 풀이 다른 겁니다. 서로서로 윈윈하는 거죠. 솔직히 그냥 일방적으로 제가 돋보이고 싶으면 선배한테 같이 나가자고 했겠죠.”
“뭐 이 자식아?”
서울 잠실 구장.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두 개의 프로팀이 공유하는 가장 광활한 경기장.
당연히 개막전 첫 번째 시리즈였던 엘리츠와의 경기는 아니었다. KBO의 긴 역사 속에서 호크스와 그리핀즈 다음으로 많은 우승을 차지했던 서울팀. 바로 재규어스가 우리의 두 번째 3연전 상대 팀이었다.
시리즈 1차전의 1회 말.
마운드 위에 배우의 얼굴을 가진 투수가 올라왔다.
백하민의 프로 1군 선발 데뷔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