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35화 (135/305)

135화. 미스터 마린스(1)

4년 110억.

인천 드래곤스의 타자였던 노형욱이 부산 마린스를 선택할 때 받았던 금액이다. 참고로 당시 그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모 팀이었던 드래곤스가 그에게 고작 4년 80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FA시점을 기준으로 3년 정도 그는 리그 최고의 2루수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솔직히 납득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누적은 좀 크게 차이가 난다지만 직전 2년 정도는 그와 타격 성적이 비슷했던 재규어스의 박동석이 그보다 1년 먼저 FA로 나와서 4년 110억이나 받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사실 노형욱에게 80억이나 110억이나 엄청 큰돈인 건 똑같았다. 게다가 사실 세금 빠지고 비용처리 할 수 있는 것들 빠지고 어쩌고 하면 실수령은 30억씩 차이 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금액은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한 돈을 떠나서 선수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드래곤스가 그를 잡기를 원했다면 부족한 금액만큼의 뭔가를 표시 했어야했다. 노형욱이 느끼기에 드래곤스의 80억은 그냥 나가라. 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기에 노형욱은 오직 금액만 봤다.

그래, 정말 딱 금액만 봤다. 그래서 수원 돌핀스도 100억을 불렀지만, 그보다 10억 더 주는 마린스로 왔다.

근데 재작년에 드래곤스가 우승했고 작년에는 돌핀스가 우승했다.

그 가운데 드래곤스의 우승은 ‘ㅋㅋㅋ 거봐, 내가 너 필요 없다고 그랬잖아?’라는 말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속이 쓰렸다.

게다가 이 마린스라는 팀. 진짜 개판이었다. 직장의 만족도는 결국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드래곤스에서 노형욱은 진짜 중심 타자였다. 단순히 타순이 3번 4번인 게 아니라 팀의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여기 마린스에서는 그저 타선만 중심 타순일 뿐, 그는 팀의 중심에서 너무 멀었다.

지금 여기서 당황하고 있는 이정훈보다도 더.

“네······, 네? 아니, 그게 그러니까.”

“뭘 당황을 하고 그래. 뭔데?”

“아뇨, 그냥 수원이가 타격 요령을 조금 말해줬는데 영 좀 그래서요.”

“요령? 너랑 수원이는 타격 매커니즘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무슨 요령?”

노형욱의 시선이 마운드로 향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매우 낮아졌다.

“설마 광형이 형 뭐 쿠세 같은 거라도 발견한 거야?”

“아니······.”

“야, 이정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까지 이러기야?”

크게 보자면 마린스의 파벌은 세 개.

이정훈은 그 가운데서 유흥을 책임지고 있었고, 노형욱은 개인플레이 하는 쪽을 대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둘 다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애들의 반대편에 선 것은 마찬가지다. 게다가 유흥을 혐오하는 강라온과 달리 노형욱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이정훈과 가끔 어울리기도 하며 제법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아니······, 에휴. 모르겠다. 형. 이거 진짜 형만 알아야 해요. 다른 게 아니라. 이게 확실한 정보도 아니고 오히려 그거 의식하면 더 헷갈릴 수 있어서 그래요.”

“뭔데?”

“수원이가 그러는데 광명 선배. 그 체인지업 던질 때 팔꿈치 각도가 좀 떨어진다네요.”

“팔꿈치 각도?”

노형욱이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수원이가 홈런 친 공이 전부 체인지업이었잖아?”

“네, 수원이 말로는 느낌이 딱 온다는데 전 잘 모르겠더라고요. 오히려 더 헷갈려서······.”

“잠깐만. 수원이 좀 불러오자. 이거 내 생각에는 이야기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다.”

***

이정훈이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여간 이 인간 그새를 못 참고······.

“정훈이한테 들었는데 광형 선배 체인지업 던질 때 팔꿈치가 좀 떨어진다면서.”

“네. 사실 첫 번째 타석까지는 체인지업을 몇 개 못 봐서 확신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확신합니다.”

“그래?”

6번 타자 강라온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5회 초 공격.

마운드의 임광형이 와인드업했다. 덕아웃에서 보는 건 타석에서 보는 것과 여러모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집중력도 다르고 시점도 좀 다르다. 하지만 팔꿈치가 올라갔는지 내려갔는지만 따져보는 건 오히려 더 쉬웠다.

“체인지업이네요.”

-부웅!!!

“스트라잌!!!”

볼카운트 0-1.

노형욱이 눈을 크게 떴다.

이후 이어지는 임광형의 피칭들.

노형욱은 이정훈보다도 더 좋은 타자였다. 아마 지금 KBO 타자들을 전부 실력순으로 줄을 세우면 열 손가락은 확신하기 힘들어도 손가락 발가락 다 쓰면 그 안에는 무조건 들어갈 만한 타자다.

“나도 눈이 제법 좋다고 자부하는데 너무 어렵네······. 이거 네가 왜 말 안 했는지 알겠다.”

“그러니까요. 처음에는 그냥 저도 말하려고 했는데 한 타석 서보고 오히려 수원이한테 입 다물라고 했다니까요. 아니, 팔꿈치가 대체 내려가긴 뭘 내려간다고······.”

“아니, 내려가긴 내려가는 것 같아.”

“네?”

“근데 이게 내가 덕아웃에서 옆모습을 보니까 좀 보이는 거지 정면에서는······. 자신이 없다. 광형이 형 디셉션 좋은 거 유명하잖아. 앞에서는 저거 아마 거의 안 보일 거야.”

“아니, 그러니까 형은 이거 구분이 된다는 거네요?”

“어, 지금 저거 체인지업.”

-부웅!!

“스트라잌!! 아웃!!”

이주혁의 스윙이 멋지게 허공을 가르며 깔끔하게 삼자범퇴로 공수교대.

이번 이닝, 마운드의 임광형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점수는 여전히 2:3. 5회 말. 최민혁 선수가 다시 마운드에 올라옵니다.]

[지금까지 4이닝 3실점이긴 합니다만 최민혁 선수 제법 괜찮게 경기를 이어 나가고 있어요.]

[보시면 최민혁 선수 경기를 잘 이어나가다가 점수를 좀 몰아서 내주는 경향이 있거든요. 지난 등판도 그렇고 오늘도 2회에만 3점을 내줬어요. 그것도 하위 타순에게 두들겨 맞아가면서요. 과연 이번 이닝은 어떻게 될지. 타석에 1번 타자 오민엽 선수가 올라옵니다.]

지금 시점에서 피닉스에 어울리지 않는 훌륭한 실력의 타자는 딱 셋.

마흔둘이라는 나이에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영원한 2인자 채광민과 장래 내가 없는 곳에서 MVP를 따낼지도 모르는 포수 정병철. 그리고 작년 시즌 골든글러브 유격수인 저 오민엽이다.

-딱!!!

벌써 세 번째 타석.

그의 방망이가 최민혁의 공을 놓치지 않았다.

유격수의 키를 넘기는 중전 안타.

1루를 지나 2루까지 달리려던 그가 걸음을 멈춰 섰다.

“후······. 하여간 이주혁 저건 쓸데없이 발은 빨라서는.”

올해로 풀타임 2년 차.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군대부터 해결한 군필 유격수다. 나와는 인연이 조금 있었는데 2년 전에 최수원 배라고까지 일컬어지던 그 장대한 병림픽에서 마린스가 승리했던 공신 1호가 바로 이 오민엽이다.

2025년 시즌 막판 공수 양면에서 대단한 활약을 했고, 결과적으로 마린스는 시즌 100패. 그리고 피닉스는 시즌 99패를 하면서 결국 마린스는 27 드래프트 전체 1번을 얻어 나를 지명했었다.

“그때 에러를 했어야해.”

“네?”

“25년에 우리가 마린스랑 상대 전적 더 안 좋았던 거 알지? 우리도 100패 찍었으면 우리가 꼴찌였어. 그랬으면 너 지금 우리 유니폼 입고 있을 거다.”

보호대를 벗어 배트보이에게 건네주며 오민엽이 투덜거렸다.

“대신 2026년의 유격수 골든글러브 오민엽도 없었겠죠. 선배 그때 눈도장 찍혀서 1군 붙박이 되신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낭중지추라고 어차피 튀어나올 송곳은 튀어나오게 돼 있어. 아마 그거 아니었어도 난 결국 1군 올라왔을걸?”

“과연 그럴까요?”

피닉스는 선수단 운영이 보수적이다.

그것도 몹시. 결과적으로 피닉스의 평균 연령은 10개 구단 가운데서도 손에 꼽을만큼 높았다.

20년대 초반에 선수단을 젊게 만든다고 하긴 했었는데 그것도 잠시였다. 순간적으로 선수단의 연령은 젊어졌지만 그렇다고 보수적인 운용은 변함이 없었으니 그 선수들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선수단의 평균연령은 또 올라갔다.

“쯧······. 귀염성이 없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진짜 귀염성이 없네.”

“대신 야구를 잘하잖습니까.”

“그래, 그건 인정. 뭐 귀염성 좀 없어도 야구 잘하면 됐지. 아쉽네. 병철이에다가 너까지 받았으면 우리도 올해는 가을 야구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저 없어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10개 팀 중에서 5등만 하면 되는 건데요 뭐.”

“나도 작년까지 그렇게 생각을 했었거든? 야, 말도 마라. 괜히 몇십 년을 가을 야구 못 하는 게 아니라니까. 어휴······.”

“작년에 피닉스가 꼴찌였죠?”

오민엽이 인상을 찌푸렸다.

“야, 넌 그래도 홈런이니까 2개 치면 2타점이잖아. 난 안타를 4개. 그 중에서 2루타가 2개였거든? 근데 그날 내 타점이랑 득점이 몇이었는지 아냐?”

“0점?”

“오, 뭐야? 너 내 팬이냐? 경기 본 거야?”

“아뇨, 그냥 맥락상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오늘 경기는 우리가 좀 가져가자. 너 인마. 신기록 세웠으면 슬슬 좀 쉬어. 분위기 보니까 오늘 광형 선배. 너 아니면 언터쳐블인게 한 8회까진 점수 안주고 끝내줄 것 같아. 그러면 우리가 9회에서 3점 정도 내준다고 치면 되거든. 와, 신난다. 우리 팀도 앞으로 5이닝 동안 3점만 더 내면 시즌 3승이네?”

“너무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를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너도 피닉스에서 1년만 풀시즌 뛰어봐. 그러면 나처럼 현실주의자 된다. 아, 그러고보니 너도 마린스네. 그러면 내년 이맘때쯤 나랑 말이 잘 통하겠다.”

“저희는 우승할 건데요.”

“뭐? 푸하하하하하.”

오민엽이 크게 웃었다.

“야, 너 농담에도 재능이 있구나. 진짜 올해 들은 말 중에 제일 재밌었다.”

“농담 아닌데요.”

-부웅!!

“스트라잌!! 아웃!!”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2번 타자와 3번 타자가 연달아 삼진아웃.

최민혁의 시선이 잠시 우리를 스쳤다.

그리고

-뻐엉!!

빠른 견제구.

나와 잡담을 나누는데 정신을 팔고 있던 오민엽이 빠르게 1루로 귀루했다.

“세이프!!”

확실히 탈 KBO급 수비 소리 듣는 유격수답게 반응속도가 달랐다.

“아무튼 오늘은 우리가 승리 좀 챙겨가야겠다. 광형 선배가 선발 등판한 경기잖냐. 이런 때 안 이기면 우리는 이길 경기가 없어요. 게다가 내년 드래프트에는 최수원도 없는데 100패 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딱!!!

42세의 늙은 타자.

영원한 2인자 채광민의 타구가 담장을 넘겼다.

그의 시즌 1호 홈런이었다.

***

2:5

내가 홈런을 두 방이나 쳤는데도 승리로 향하는 길은 영 보이지 않았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한교철의 깔끔한 루킹 삼진.

아니, 그래도 방망이는 휘둘러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그래, 포수 타석은 쉬어가는 거지. 라고 포기하게 되는 장면이었다.

그 와중에 저 구석에 앉아있던 조유진 녀석 표정 관리가 일품이다. 그래, 여기서 경쟁자 빠따 엉망이라고 좋아하는 티 내면 그건 진짜 쓰레기지.

“딱 기다려. 이번에는 내가 뭔가 보여줄테니까.”

이어지는 1번 타자 서경준의 타석.

이정훈이 또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대기타석으로 향했다. 기대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다음이 7회고. 대충 나부터 공격이 시작되겠구나. 같은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예의상 방망이 정도는 뽑아두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찰나 노형욱이 말을 걸어왔다.

“수원아, 내가 곰곰이 좀 생각을 해봤는데.”

“네? 무슨 생각이요?”

“오늘 경기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

글쎄······.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정훈이 어떻게든 출루라도 좀 하고 내가 홈런 뻥뻥 날려주고 오민엽 말처럼 임광형 내려간 9회 말에 승부 보는 수밖에 없지 싶은데.

“그래도 규만 선배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규만 선배요?”

나의 시선이 덕아웃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올 시즌 0.207/0.258/0.207을 치고 있는 우리 캡틴이 진지한 표정으로 임광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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