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강속구(3)
“체인지업?”
김진규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기록에는 최수원이 체인지업을 던진다는 말은 없었다. 훌륭한 속구와 커브. 그리고 어설픈 슬라이더.
물론 지금 체인지업은 정확한 것은 자료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오랫동안 스카우트 생활을 해온 김진규의 눈으로 봤을 땐 조금 어설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최수원이 바로 지금 정찬민에게 체인지업을 던졌다는 부분이다.
정찬민은 쉬운 타자가 아니었다.
불과 4년 전만 하더라도 그 역시 김진규의 레이더망에 존재하던 타자다. 만약 수술까지 필요했던 그 햄스트링 부상이 아니었다면. 그로 인해 운동능력을 상당부분 상실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정찬민은 지금 브레이브스가 아닌 메츠에서 뛰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부상 이후로도 KBO의 평균적인 투수들을 기준으로 정찬민은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상위 선발, 특히 95마일 이상의 속구를 구사할 수 있는 투수들을 상대로 그 투수들의 체인지업에 취약함을 보인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생겼다.
그 정보는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애당초 KBO에 95마일 이상을 던지는 투수는 흔치 않았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정찬민 본인은 알고 있는 약점이었고 그렇기에 그는 그 약점을 공략할 투수가 널린 메이저리그 대신 한국에 남는 선택을 했다.
즉, 최수원은 어떻게 인지 아는 이들이 많지 않은 정찬민의 약점을 알고 있었고, 적어도 그 약점을 찌를 만큼. 그러니까 체인지업을 존 안에 집어 넣을 수 있을 수준까지 단기간에 연마를 해왔다는 뜻이다.
머리를 쓸 줄 알고, 구종 습득능력 역시 나쁘지 않다는 뜻이다.
투수 최수원의 관건은 현재의 기량이 아닌 앞으로 얼마큼의 성장을 보여줄 것인가다.
“저거 괴물이네 진짜······.”
이어지는 2회 초.
조창혁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김진규의 시선은 아직 덕아웃에 돌아간 최수원에게 못박혀 있었다.
***
투수가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상대 팀 투수가 아닌 상대팀의 타자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창혁은 오늘 그 당연한 이야기를 좀처럼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타자로는 대뜸 홈런을 날리고 세러머니를 하더니, 투수로 올라와서는 KKK까지.
‘시발, 멍청한 새끼들.’
특히 장찬민.
저 다리 병신.
고작 한 살 많은 주제에 뭐 그리 대단하다고 선배인 척 뻐기더니 저딴 똥볼에 헛스윙 삼진이라고?
장찬민을 보고 있으면 열불이 난다.
메달을 따고 병역 면제를 받고 다리 병신이 된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 병역 면제 카드 한 장이 너무 아깝고 화가 난다.
조창혁 자신은 학창 시절에 누구나 다 하던 후배 군기 좀 잡은 걸로 평생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솔직히 장찬민 쟤가 메달 따서 면제받을 바에야 자신이 받는 게 국익을 위해 훨씬 이득 아닌가? 미국 가서 외화를 벌어올 사람은 자신인데? 게다가 어차피 쟤는 다리 병신이라 메달을 못 땄어도 결국 면제였을 것이다.
온통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분해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조창혁이 그 속에 가득한 분노를 담아 공을 뿌렸다.
-뻐엉!!!
158.8km/h.
그 불꽃 같은 강속구에 마린스의 6번 타자인 사울 로페즈가 방망이를 내밀지 못했다.
“스트라잌!!!”
99마일에 가까운 속구.
미국을 기준으로도 충분히 강속구라고 부를 만한 공이었다.
올해를 끝으로 메이저를 노리는 투수라고 그랬던가? 확실히 이 속구만 보면 그런 평가를 들을만했다.
사울 로페즈는 분명 메이저까지 밟아본 야수였다. 하지만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은 그의 방망이가 아니었다.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준수한 수준의 수비를 보여줄 수 있는 그의 수비 능력이었다.
헛스윙.
그리고 내야 땅볼.
장찬민이 가볍게 스텝을 밟아 그 공을 처리했다. 고척의 인조 잔디에도 불구하고 매우 깔끔한 수비.
조창혁이 이어지는 이주혁과 정지운을 각기 내야 뜬공과 삼진으로 처리하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깔끔한 삼자범퇴.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앞선 최수원의 KKK. 그리고 2:0이라는 점수가 마음에 밟혔던 탓이다.
‘젠장. 투수가 이만큼이나 해주면 좀 분발해보라고.’
그리고 다시 마운드에 최수원이 올라왔다.
***
확실히 조창혁이 보여주는 피칭은 깔끔했다.
나와 투구 레퍼토리는 좀 다르긴 하지만 내가 가져가야 할 피칭 스타일이 바로 저런 형태다. 되던 안 되던 일단 힘으로 윽박질러 버리는 것.
솔직히 하위 타순이라 좀 더 잘 먹힌 경향이 있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건 기백에서 밀린 거다. 중간중간 정말 복판에 대놓고 던진 공도 있었는데 그런 공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뭐 저런 스타일은 어디까지나 한국이니까 먹히는 거 아니냐? 라고 볼 수도 있긴 했다. 하지만 조창혁은 4년 계약으로 미국에 가서도 그럭저럭 솔리드한 3선발급으로 2년 정도는 꾸역꾸역 버틴다.
이후로 나가떨어지긴 하지만 그것도 미국의 하드한 일정과 빽빽한 5선발 로테이션에 몸이 버티지 못하고 터진 것에 가까웠으니 실력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심지어 남은 2년 중에서도 1년은 로테이션을 채웠고 남은 1년은 불펜으로 제법 길게 던졌다. 심지어 이후로도 1년인가 메이저에 더 있다가 한국에 돌아왔다.
물론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조창혁은 더 이상 전성기와는 거리가 먼 퇴물이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최수원!! 벌써 네 번째 삼진!! 오늘 공이 정말 대단합니다. 브레이브스의 타자들이 손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본래 최수원 선수 같은 경우 속구와 커브 투피치였거든요. 사실 그것만 제대로 던져도 최고 160을 던지는 투수는 어려운 투수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앞서 장찬민 선수에게 체인지업으로 헛스윙 삼진을 끌어냈단 말이죠? 타자들 입장에서는 이제 머릿속에 선택지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거든요.]
[이지선다가 삼지선다가 된 만큼 셈이 더 어려워졌다. 뭐 그런 말씀이신거군요.]
[네, 그렇죠. 물론 체인지업은 장찬민 선수에게 하나 던진 이후로 아예 안 던지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게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기에는 또 어렵죠. 게다가 139km/h의 공이면 또 치기 딱 좋은 공 아니겠습니까. 만약 체인지업을 노렸는데 체인지업이 들어만 와준다? 그러면 이게 또 대박이거든요.]
솔직히 컨디션만 따진다면 최상이라고 하긴 어려웠다.
보통 월요일이 중간에 끼어 있어서 하루씩 더 쉬어가면서 스케줄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화, 수, 목을 연달아 타자로 출장했고 그 직후에 선발 출장이다.
아직 시즌 초반이라 체력적으로 크게 부치는 느낌은 없었지만 그래도 미묘하게 좀 고된 느낌이다. 만약 내가 정말로 경험이 없는 애송이였다면 조금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프로 생활만 무려 16년을 한 베테랑이다. 심지어 그 가운데 9년은 KBO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터프한 MLB에서 생활했다. 이런 걸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는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
-부웅!!
“스트라잌!!”
타자의 방망이가 늦었다. 그리고 그것은 방망이를 휘두른 타자 본인도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녀석이 방망이를 고쳐 쥔다. 살짝 배트를 짧게 쥐고 어떻게든 커트라도 하면서 공을 지켜보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 줬다.
복판으로 빨려 들어가는 공.
-딱!!!
믈론 속구가 아닌 꺾이는 각이 조금 밋밋한 고속커브였다.
바닥을 구르는 공.
내야 땅볼이었다.
사실 마린스의 내야진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힘든 일이다. 게다가 고척의 경우 인조 잔디라서 타구 속도가 좀 더 빠르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일루수로 뛰던 시절에는 고척이 홈이었는데도 수비하기 제일 개똥 같았었다. 물론 그만큼 타격 성적에서 이득이 있었으니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강라온이 빠르게 달렸다.
1, 2루간으로 흘러서 정지운 쪽으로 갔으면 더 불안했을 텐데 그래도 다행이다. 강라온의 글러브가 무사히 공을 잡아냈다. 게다가 일단 제대로 잡기만 한다면 타구 속도가 빠른 것이 수비에 도움이 될 때도 있다.
바로 지금처럼.
-뻐엉!!
“아웃!!!”
여유 있는 아웃.
그리고 이어지는 초구 외야 뜬공 아웃까지.
2회 말 브레이브스의 공격을 막아내는데는 고작 공 일곱 개로 충분했다.
***
“굿 볼.”
“굿 캐치.”
조유진이 무거운 장구류를 벗었다.
공수교대에 주어진 시간은 고작 1분 55초.
빠듯했다.
장비들을 내려놓고 방망이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 공을 받는데 집중하던 몸과 머리다. 상대 투수의 투구 패턴과 기타 자료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메모해둔 것을 볼 시간 따위는 없었다.
이닝이 종료된 시점부터 다음 이닝의 첫 번째 공이 투구 될 때까지 주어지는 시간은 정확히 2분. 그것을 넘어가는 순간 벌금이 주어진다. 20만원짜리 벌금이지만 최저연봉을 받는 선수에게는 적지 않은 금액이다.
서둘러 방망이를 몇 차례 휘둘러 보고 타석으로 올라갔다.
오늘 경기에 올라오기 전 2군의 소식을 들었다.
마린스의 주전포수인 최진웅에 관한 이야기였다. 시범 경기 초반 최수원의 공을 제대로 받지 못해 허벅지 쪽 내전근 파열과 고환의 붓기로 6주 진단을 받았던 그는 현재 무사히 2군에 복귀하여 어제 리햅 경기를 가졌다.
아마 사직 구장에서 경기가 있었더라면 곧바로 합류 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팀의 기세도 워낙에 좋았고, 여섯 경기 연속 원정이었던 터라 다음 시리즈부터 다시 1군 합류가 결정난 상황이었다.
한교철 혹은 조유진 자신.
둘 중 하나는 이번 시리즈가 끝나고 2군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뜻이다.
타격은 한교철이 아주 미세하게 앞서는 상황.
수비에서는 조유진이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만약 이게 주전 포수 자리라면 무조건 조유진의 승리다. 하지만 결국 주전 포수는 최진웅이고 한교철과 조유진이 경쟁해야 하는 자리는 백업 포수다. 타격의 중요성이 조금 더 커진다.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졌다.
조유진이 자신의 머리를 몇차레 휘휘 저었다.
마운드에 선 투수는 무려 조창혁.
오늘 마린스에서 조창혁을 공략한 타자는 최수원과 노형욱 뿐이다.
안좋은 생각은 멈췄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조창혁의 공을 두들겼을 때 돌아올 달콤한 미래만을 상상했다.
그리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그리고 조창혁이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꿈틀 거렸다.
‘와, 뭐지? 저 새끼는? 개그맨인가?’
고등학교 이후로 타격을 끊은 조창혁이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런 타격 폼으로는 설사 공을 친다고 해도 타구에 힘이 실릴 리 만무하다. 아니, 상하체가 따로 노는데 저런 놈이 프로라고? 진짜 KBO 수준이 한심하다. 역시 얼른 하루라도 빨리 메이저로 가야 하겠다는 마음이 다시 한 번 강하게 올라왔다.
두 번째.
그냥 빠르게 끝내버리겠다는 강한 마음.
무려 157.8km/h의 강속구.
그러니까 최수원이 학창 시절에 던지던 가장 빠른 공과 아주 흡사한 공이었다.
-딱!!!
배트가 밀렸다.
안 그래도 밀린 배트인데 타구를 끝까지 밀어내기도 전에 일루 쪽으로 슬쩍 몸이 돌아가는 바람에 힘도 제대로 안 실렸다. 상체를 숙이는 폼으로 완전히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조금 부족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 대신 조유진의 몸은 이미 일루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브레이브스의 포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브레이브스의 일루수가 서둘러 구르는 공을 향해 달렸다.
조창혁이 서둘러 일루 커버를 하러 달려 나왔다.
하지만 마린스의 9번 타자 조유진.
포수임에도 불구하고 팀에서 세 번째로 빠른 발을 가진 호타는 아니지만, 준족의 타자를 잡아내기에는 부족했다.
“세이프!!!”
그리 깔끔하지 않은 내야 안타.
조유진이 미소지었다.
현재 슬래시라인 0.161/0.161/0.194.
드디어 한교철과 타격에서 거의 동등해졌기 때문이었다.
3회 초.
노아웃에 주자 1루.
그리고 1번 타자 강라온.
마린스의 팬들의 기대감이 고조됐다.
상위 타순이 돌아왔기 때문이 아니다.
“제발 병살만 치지 마라. 병살만.”
남은 두 타자가 모두 아웃 된다고 해도 좋았다.
마린스의 3번 타자 최수원.
이번 이닝.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