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72화 (172/305)

172화. 시계의 전설(2)

엘리츠의 에이스인 제이크 보어는 MLB에서 실패했고, KBO에서는 성공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첫 번째는 빠르고 낮은 코스로 던지는 변형 패스트볼이라는 한 15년쯤 전의 정석 같은 피칭 스타일이 메이저의 주류 타자들에게는 이제 적응이 끝난 스타일이라는 점. 하지만 KBO에서는 아직 끝물이기는 해도 충분히 통용되는 스타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MLB에서 아직 통하는 저런 유형의 불펜 투수들 평균 구속이 97마일 이상이라는 점. 그리고 KBO와 MLB의 평균 구속 차이가 5마일 정도라는 점을 고려하면 평균 91마일 정도에 형성되는 제이크 보어의 커터는 구속 면에서 충분한 매리트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제이크 보어가 KBO에서는 통하는 그 두 가지 이유라는 것들이 결국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차라리 나에게는 피닉스의 임광형 같은 투수가 더 어렵다. 물론 현재 KBO의 성적만 따진다면 제이크 보어의 성적쪽이 임광형보다 약간 더 좋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만약 지금 이대로 둘 다 빅리그로 간다면 유의미하게 임광형 쪽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두지 않을까 싶다.

-딱!!!

내가 강하게 후려친 타구가 잠실의 넓은 외야를 살짝 넘어 세 번째 줄의 관객이 끼고 있던 글러브에 쏙 들어갔다.

시즌 16호 홈런.

초반의 폭발적인 페이스는 아니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솔직히 5타석 다 들어와도 2타수 정도 기회를 받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홈런이 꾸역꾸역 나온다는 것 자체가 내가 지금 이 리그에서 방망이를 휘두를 레벨이 아니라는 증거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메이저의 스카우트들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1:0.

이후로 노형욱이 2루타를 치고 이규만이 우익수 키를 넘기는 단타로 1점을 추가하며 2:0으로 추가점까지 내고 1회 초 우리의 공격이 끝났다.

***

덕아웃으로 돌아온 제이크 보어가 자신의 글러브를 내팽개쳤다. 게다가 본래 외국어 가운데 가장 습득이 빠른 건 역시 욕설이라서일까?

“시발!!!”

그 와중에 그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한국 욕설이 튀어나왔다.

최수원이 홈런을 쳐낸 것까지는 그래, 그렇다고 치자. 저 싸가지 없는 놈은 그 싸가지와 반비례하는 방망이를 가졌으니까.

하지만 이후로 노형욱과 이규만에게 연속 안타를 내준 것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말렸어······.’

최수원이 홈런 치고 타구 감상하고 걸어 나가는 일에 조금 흥분했다.

덕분에 노형욱에게 던진 두 번째 공이 제대로 낮게 깔리지 못했다. 이규만의 경우는 제대로 던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운이 좀 없었지싶다.

마운드에 마린스의 2선발인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올라왔다.

작년 팀 동료였던 투수다. 딱히 좋아할 수는 없는 녀석이었다. 그와 피칭 스타일은 비슷했는데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그렇다고 딱히 한국말을 익히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첫해를 끝내고 연봉 협상에서 거의 자신의 3년 차 연봉에 준하는 연봉을 요구했다는 것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은 제안이었다. 비율 스탯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세부 내용이나 소화 이닝의 차이가 엄연했으니까.

-뻐엉!!

“스트라잌!!!”

150.4km/h의 커터.

제이크 보어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 같았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조금 달랐다. 제이크 보어의 구속이 146 내외에서 형성되는 대신 로케이션이 더 낮고 더 좌우로 뿌려졌다면,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구속이 150 내외인 대신 커맨드가 영 좋지 못했으니까.

-딱!!!

[쳤습니다!! 2, 3루간 빠른 타구!! 유격수 강라온!! 잡았습니다!! 곧바로 1루에!!]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강라온의 아주 좋은 수비.]

하지만 그 조금 다른 피칭이 의도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땅볼 유도를 통한 장타와 홈런 억제.

그리고 적극적인 병살의 유도.

하지만 그 모든 것에는 한 가지 중요한 단서가 있었으니 바로 훌륭한 내야 수비가 그것이었다. 분명 강라온은 좋은 유격수였다. 하지만 강라온을 제외한 마린스의 내야는 엉망이었고 그렇기에 엘리츠는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마린스 행을 허락했다.

무엇보다 강라온은 ‘좋은’ 유격수였지 그 앞에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유격수는 절대 아니었고, ‘규격 외’라는 수식어와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그런 유격수였다.

이는 KBO의 특이성 때문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유격수 포수, 그리고 중견수는 수비 가중이 가장 큰 포지션으로 타격에서 다른 포지션에 비해서 조금 부진할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다.

하지만 KBO를 보면 몇몇 슈퍼스타는 물론이거니와 평균치로 따져도 메이저리그만큼 극심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리그 내에도 선수들 간에 뛰어야 하는 리그가 다를 정도의 수준 차가 있기 때문이다.

AAA나 MLB를 노릴 만한 재능들이 수비 가중치가 가장 높은 유격수, 중견수, 포수 등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마린스의 강라온 역시 그런 유격수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래도 엘리츠의 유격수인 오형원에게는 감히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형원. 33세.

그는 분명 ‘규격 외’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유격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KBO에서 MLB로 진출했던 ‘규격 외’의 유격수 둘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가장’이라는 수식어에 제일 어울리는 유격수였다.

그리고 2010년대 이후 KBO에서 MLB로 진출했던 ‘규격 외’의 유격수 둘이 사실상 MLB에서 자신이 MLB에 어울리는 레벨의 선수임을 증명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KBO에서 ‘가장 훌륭한 유격수’인 오형원은 분명 KBO 레벨을 벗어나는 유격수다.

그가 첫 번째 FA에서 받았던 금액은 고작 4년 40억원.

그리고 그것을 보상이라도 받듯 두 번째는 FA까지 가지도 않은 채 다년 계약으로 5년 110억을 받았다.

올해로 그 다년 계약의 3년 차.

잠실을 가득 메운 엘리츠 팬들의 함성이 커졌다.

***

-딱!!!

오형원이 친 타구가 잠실의 넓은 담장을 아슬아슬하게 넘어갔다.

아무래도 저 인간 컨디션이 아주 맥시멈으로 올라온 느낌이다. 분명 리그 MVP를 노릴만한 타자는 아니다. 기복이 워낙에 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복이라는 것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 소리를 듣는다는 말은 컨디션이 좋을 때는 리그 MVP 찜쪄먹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약점은 속구.

참고로 빠른 속구가 아니라 그냥 속구다. 컨텍이 너무 엉망이라서 대충 리그 평균 정도 되는 속구에 방망이가 붕붕 돌아간다. 그래서 매년 삼진왕 경쟁을 하는 타자 중 하나다.

그런데도 어째서 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냐하면 선구안이 좋아서 존을 벗어나는 공은 기가 막히게 거르고 변화구를 이상하게 잘 친다. 게다가 힘도 좋아서 일단 맞으면 질 좋은 타구가 잔뜩 나온다.

선구안은 좋은데 컨텍이 안좋은 실로 보기 드문 유형인 셈이다.

다만 지금처럼 컨디션이 좋을 때는 컨택도 미묘하게 상승해서 방금처럼 152km/h짜리 커터를 잡아당겨서 담장을 넘겨버리기도 한다.

점수는 2:1.

홈런을 두들겨 맞은 투수는 흔들린다.

가끔 주자가 있으면 투수가 흔들리니까 홈런 때리는 것보다 연속 안타를 치는게 더 유리하다는 애들이 있는데 헛소리다. 홈런 맞는게 보통은 멘탈에 제일 안 좋다.

마운드의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모자를 한차례 고쳐썼다.

엘리츠의 다음 타자는 용병 타자인 제이콥 윌슨.

스물여덟의 타자로 우투우타의 우익수다.

전형적인 AAAA리거로 나이를 생각하면 미국에서 조금 더 도전해볼법도 한데 빠르게 포기하고 KBO로 넘어왔다.

예전에 제이크 보어와 같은 팀에 뛴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제이크 보어가 KBO에서 거둔 성공과 받는 대우가 그를 비교적 빠른 시기에 KBO로 향하게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공이 날았다.

152.1km/h의 커터.

코스가 영 좋지 못했다. 거의 복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이다.

-딱!!!

1회 말.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결과적으로 3점을 내줬다.

사실 이번 시즌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운이 없었다.

‘엘리츠에게 만큼은 패배하지 않겠다.’에서 ‘그래도 엘리츠의 홈에서만큼은 패배하지 않겠다.’로 한 걸음을 양보했던 저 결심이 어쩌면 ‘엘리츠의 홈에서 연패는 하지 않겠다.’ 정도로 수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2회가 지나고 3회.

나의 두 번째 타석.

점수는 여전히 2:3.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나에게 제법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나도 어지간하면 그 눈빛에 답하고 싶었다.

[아, 엘리츠의 덕아웃. 최수원 선수를 그냥 내보냅니다. 자동 고의 사구.]

[뭐, 원 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에서 굳이 최수원 선수를 상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거겠죠. 더군다나 점수 차이도 고작 1점이니까요.]

[참, 지금 이 장면은 뭐랄까요? 작년의 최동원상 수상자도. 잠실의 넓은 외야도. 최수원을 막기는 역부족이다. 그런 이야기를 뜻하는 것 같아서 좀 무섭기까지 하네요.]

하지만 엘리츠의 덕아웃도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알아서 나와 승부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원아웃에 주자 1루.

강소구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참으로 뜨거웠다.

그 뜨거움에 기름을 좀 부어줄까 말까 고민이 되는 찰나.

-딱!!

노형욱이 1회 초에 이어서 연타석 안타를 쳐냈다.

살짝 밀린 타구가 우중간 어정쩡한 곳으로 향했다.

중견수인 라찬명은 언제나처럼 망설임 없이 낙구지점으로 달리고 있었다. 뜀박질 자체는 그리 빠르지 않았지만, 반응만큼은 실로 신속했다.

원 아웃에 주자 1, 2루.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덕아웃 펜스에 몸을 기댄 채 우리를 바라본다.

그리고 타석에 이규만.

앞선 타석에서 우익수 키를 넘기는 단타를 기록했던 사나이가 섰다.

초구.

낮게 깔리는 144.7km/h의 커터.

그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딱!!!

오형원이 움직였다.

강라온처럼 한 박자 빠른 움직임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절했다. 삼루로 달리는 나를 굳이 바라보지 않았다. 글러브에 들어온 공을 부드럽게 뽑아 2루로. 그리고 그 공이 다시 1루로.

[엘리츠의 깔끔한 수비. 원아웃 주자 1, 2루 상황에서 제이크 보어가 깔끔하게 병살을 이끌어냅니다.]

[점수는 여전히 2:3. 엘리츠가 위기를 넘깁니다.]

그리고 그것이 엘리츠와의 1차전.

우리가 그나마 역전과 가장 가까웠던 순간이었다.

***

[잠실도 막을 수 없었다!! 최수원, 시즌 37경기 만에 16홈런!! 29경기 출장으로 만든 대기록!! 시즌 62홈런 페이스!!]

[마린스의 연승이 끊어지다. 엘리츠와의 1차전 2:3 아쉬운 패배.]

[엘리츠 리그 3위 재탈환!! 2위 돌핀스와는 이제 한 경기!!]

[퍼펙트 투수 최수원. 시즌 네 번째 승리에 도전!!]

뉴욕에서 두 번째로 인기 있는 스포츠 구단의 한 사무실.

동아시아의 스카우트 총 책임자인 에릭 기무라의 보고서를 읽던 그의 방문을 누군가가 두들겼다.

-똑똑똑

“어떻게 됐어?”

“그게······. 아무래도 에인절스 쪽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 마이크 프로스태드쪽과 다시 대화를 나눠보시는 것이······.”

“끄응······. 그 친구가 얼마를 요구했지?”

“800만 달러입니다.”

“미쳤군······.”

“자기 커리어를 통째로 날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댓가라고······.”

“차라리 우리 쪽에서 고용을 제안하는 건?”

“그건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800만 달러.

고작 자료 쪼가리에 불태우기에는 너무 큰 금액.

심지어 그 자료가 정말로 유효하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

“비행기 알아 봐줘.”

“네? 그거라면 차라리 마이크를 이쪽으로 부르시는게······.”

“아니, 그쪽 말고. 한국행 비행기. 직접 확인을 해봐야겠어.”

메츠의 단장 조슈아 파그노만이 마침내 한국행을 결심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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