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79화 (179/305)

179화. 선두(2)

민혁은 처음 10억 5천만원에 도장을 찍었을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당시 누군가는 그의 10억 5천만원이라는 금액이 마린스라는 팀의 디메리트라고 이야기했지만 어쨌거나 10억 5천만원은 10억 5천만원이었다.

신인 역대 최대 계약금.

물론 역대 최대 금액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담감은 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했다. 아니, 단순히 최선을 다한다는 말 정도로 끝낼 수 없을 만큼 노력했다.

그리고 부상을 당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최초의 토미존 서저리 이후로 벌써 60년도 넘는 시간이 지났다. 너덜너덜한 인대를 제거하고 단단한 힘줄로 대체하는 이 수술의 예후는 지극히 좋아서 평균 18개월 정도의 재활을 제대로 끝내기만 하면 회복은 물론이거니와 오히려 이전보다 더 좋아지는 일도 많았으니까.

아니, 걱정을 했어야만 했다. 너무 나이브한 생각이었다.

그에게 10억 5천만원이라는 계약금을 건넸던 단장이 바뀌었다. 곧바로 그의 뒤를 이어 전체 1번 8억 5천만 원짜리 투수가 추가됐다.

그리고 20억.

계약금만 무려 20억짜리 규격 외의 괴물이 추가됐다.

최민혁은 이를 악물고 재활에 전념했다.

결과적으로 15개월 만에 복귀했고 선발의 한 자리도 차지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 결국 지금 그는 마린스가 아닌 브레이브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다.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그것을 축하했다.

그리고 이야기 했다.

솔직히 마린스와 비교하면 브레이브스가 백 배는 낫지 않냐고.

맞는 말이다.

체계적인 시스템과 유망주 지원. 그리고 빅리그 진출까지. 브레이브스는 마린스보다 훨씬 괜찮은 팀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럼에도 그는 가끔 사직 구장에 가득 찬 함성과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생각났다.

그래, 마치 지금처럼.

관중석에 가득찬 관중들을 향해 잠시 모자를 벗었다. 오늘 여기 모인 이들이 그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님은 잘 알고 있었다.

리그 2위.

1위와는 단 한 경기.

마린스의 수많은 팬이 오랜 시간 상상해온 순간일 것이다.

최민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경기에 마운드 위에 서기를 종종 상상해왔다. 그리고 그 상상의 끝에서 항상 그는 두 팔을 번쩍 들고 수많은 관중의 환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이뤄질 수 없는 상상이었다.

그를 향해 박수를 보내주는 몇몇 팬들을 뒤로하고 이정훈을 마주했다.

좋은 타자다.

솔직히 실력에 비해 크게 저평가된 타자라고 생각한다.

빠른 공.

리그에 160짜리 공을 뻥뻥 던지는 괴물이 나타나는 바람에 조금 빛을 바랜 감이 있긴 했다. 하지만 최민혁이 10억 5천만원이라는 계약금을 받았던 것은 최고 157km/h까지 던질 수 있던 단단한 오른팔 덕분이었다.

197cm에 110kg.

철탑과 같은 사내가 그 오른팔을 휘둘렀다.

-부웅

“스트라잌!!”

156.4km/h.

1회 말. 초구치고는 매우 놀라운 구속이었다. 하지만 요즘 저기 160단위의 숫자를 너무 자주 본 탓일까?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이정훈이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걸어 나왔다.

가벼운 호흡.

사실 공을 쳐야 하는 입장에서 저기 적힌 숫자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게 칠만한 공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우리 편일 땐 좆밥이 적이 되면 각성하는 건 요즘엔 만화에서도 잘 안 쓰는 클리셰인데. 이걸 이렇게 써먹네.’

탈 마린스 효과.

이정훈이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그래도 전광판에 숫자를 보니 좀 위안은 됐다. 최수원이 던지는 162km/h의 속구에 비하자면 6km/h나 느리다. 150이랑 144가 완전 다른 것처럼 162랑 156도 완전 다를 것이다.

두 번째.

한복판.

실투다. 이건 아무리 좋은 공이라도 대놓고 던질 수 없는 코스였다.

-딱!!

그리고 이정훈은 그 공을 두들기는 순간 느꼈다.

아, 이거 좀 조졌는데?

묵직했다.

사실 이정훈이 느낀 이 묵직하다는 감각은 아주 오랜 시간 논란이 된 감각이었다.

예전에는 초속이니 종속이나 하는 것으로 그것을 설명하려 했었고, 그딴 거 없는 게 밝혀진 이후로는 공의 회전수로 설명하려고 했었다. 물론 여전히 제대로 된 설명은 불가능했다.

아무튼 이정훈은 지금 최민혁이 던진 공에서 ‘묵직함’을 느꼈다.

방망이를 내던지고 1루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별 의미 없는 짓이었다.

높게 뜬 파울 플라이가 삼루수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했다.

원 아웃.

이정훈이 가볍게 혀를 차며 덕아웃으로 걸어갔다.

***

“공이 묵직해.”

“그렇겠죠. 한 가운데 속구를 못 치신 건데······.”

“아니, 핑계가 아니라 진짜로. 게다가 빨라.”

“네, 빠르죠. 156km/h나 되는데. 저 정도면 거의 저랑 창혁 선배 빼면 제일 빠른 수준이죠.”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내가 너 공 궁금하다고 타석에서 라이브 몇 번 해봤잖아. 거의 그때만큼 빠른 느낌이야.”

“아, 네. 뭐 민혁이형 공이야 원래 좋았죠.”

“아니, 우리 팀에 있을 때랑은 좀 다르다니까. 거의 아이언맨 Mk. 1이랑 Mk. 85만큼 차이 난다니까.”

“아, 네. 네.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뭐 또 고전 만화 이야기겠죠. 아무튼 저 집중 좀 할게요.”

이정훈이 아이언맨이 얼마나 대단한 히어로인지 한바탕 설교를 늘어놓고 싶은 모양인지 입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경기 중에까지 그런 짓을 할만큼 정신머리가 없지는 않았는지 이내 포기하고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하여간 90년대에 태어난 아저씨들은 항상 이야기에 캡틴 아메리카랑 아이언맨 이야기를 넣고 싶어서 안달이라니까.

타석에 강라온이 신중하게 자세를 잡았다.

초구.

바깥 코스 살짝 빠지는 속구.

-부웅!!

“스트라잌!!”

속았다.

확실히 여전히 컨트롤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을 던지는데 부담감이 보이지 않았다. 팀을 옮긴 영향일까? 아니면 토미존의 결과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일까?

사실 토미존 서저리를 받은 것만으로 공이 이전보다 더 강해지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 수술은 어디까지나 너덜너덜한 인대를 쌩쌩한 힘줄로 갈아 끼우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수술을 받은 선수들 가운데 더 좋은 공을 던지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아픔 없이 던지니까 전력으로 공을 뿌릴 수 있게 됐다.’

‘아파서 나도 모르게 위축이 좀 됐었는데 자세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대충 토미존 이후로 더 좋은 공을 던진 투수들이 하는 이야기들이다.

게다가 재활 열심히 한 선수들 가운데는 수술 전보다 몸 자체가 더 좋아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게다가 최민혁의 경우 토미존 받고 15개월 만에 복귀한 거였는데 그게 2월이었으니까 지금이 딱 19개월 차. 보통 완치 판정 내려주는 시기가 18개월 차 정도니까 여러 가지로 아다리가 맞아 떨어지기는 했다.

근데 사실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다 떠나서

‘탈 마린스 효과.’

이 한 단어면 지금 상황이 다 설명 되기는 한다.

본래의 역사대로면 최민혁이 지금 정도 포스를 보이는 건 내년도 아니고 내후년. 그러니까 내가 타자로 1차 각성해서 한참 날아다니기 시작하던 시기랑 딱 겹쳤으니까. 그걸 거의 2년 당긴 건 탈 마린스 말고는 설명이 어렵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슬라이더에 헛스윙 삼진.

경기 전에 받아본 전력분석팀의 자료에 따르자면 슬라이더 자체는 이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는데 속구의 위력이 좋아지면서 삼진율이 극단적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

최근에는 그래도 강라온 아니면 이정훈 중 하나 정도는 출루에 성공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익숙하고 정감이 가는 상황이었다.

[자, 타석에 최수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0.441/0.656/1.189. 그리고 26홈런. 뭐 말할 것도 없이 리그 최고. 아니, 리그 역사상 최고의 타격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입니다.]

[227타석 127타수. 아니, 제가 말하면서도 진짜 어이가 없는 성적입니다. 다만 최근에는 집중적인 볼넷 때문인지 그래도 타격감이 상당히 떨어져서······.]

[네, 타격감이 상당히 떨어져서 네 경기 동안 홈런을 하나 ‘밖에’ 못 쳤죠. 미리 말씀드리지만 네 경기 평균 하나의 홈런을 치면 작년을 기준으로는 홈런왕입니다.]

[정말 웃음밖에 안 나오는 성적이네요. 자, 그런 최수원 선수를 맞아서 과연 최민혁 선수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이 선수도 트레이드 직후에 갑자기 성적이 폭발했거든요.]

[네, 맞습니다. 최민혁 선수의 최근 다섯 경기 성적을 보면 정말 장난이 아니거든요. 특히 우타자를 상대로는 OBA. 그러니까 피안타율이 0.087밖에 안 됩니다.]

방망이를 쥐고 익숙한 루틴대로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덕아웃에서 고의사구를 지시하지는 않는군요.]

[네, 아무래도 최근 최수원 선수의 타격 페이스가 조금 저조하기도 했고 최민혁 선수의 컨디션이 워낙에 좋으니까요.]

초구.

움직이던 방망이를 멈춰세웠다.

-뻐엉!!!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속구.

확실히 이정훈이 내 공만큼 빠르게 느껴진다던 이야기가 이해되는 공이었다.

나도 190cm의 장신이지만 최민혁은 나보다 7cm나 더 크다.

물론 나의 경우 키에 비해서 팔이 좀 긴 편이라서 윙스팬은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대신 최민혁은 지금 공을 끌고 나오는 거리가 상당히 더 길어 진 느낌이다. 덕분에 공을 늦게 놓는 만큼 체감 구속은 상당히 올라갔다. 구속이 아무리 빨라도 사람이 팔을 휘두르는 속도에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릴리스 포인트가 1cm정도 길어지면 타자 입장에서는 구속이 0.1마일 정도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확실히 탈 마린스 효과가 있긴 한 것 같다.

브레이브스는 유망주 팔아먹는 구단답게 유망주 육성에서는 마린스보다 더 훌륭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두 번째.

마찬가지로 존에서 살짝 빠지는 속구.

볼카운트 2-0

세 번째.

존에 걸치는 공이었다.

살짝 들어 올린 다리를 내려놓고 그대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니까 한 절반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이거 슬라이더인데?’

몸을 멈췄다.

움직이던 방망이는 관성대로 나아가려했지만 확실하게 멈췄다.

-뻐엉!!

“스트라잌!!!”

하지만 1루심은 내 방망이가 돌아갔다고 판단했다.

볼카운트 2-1.

설마 눈 가리고 아웅으로 고의사구 대신 적당히 볼넷으로 내보내는 게 아니라 진짜로 잡아보겠다는 생각인건가?

그러고 보니 이번 주에 있었던 경기에서는 홈런보다 삼진이 많긴 했다.

네 경기에서 삼진을 무려 두 개나 당했으니까.

네 번째.

존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공.

-부웅!!

“스트라잌!!!”

또 슬라이더였다.

확실히 속구 타이밍에 맞춰 타격을 준비하다 보니 속구 위력이 올라오면 슬라이더가 잘 통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찌됐건 슬라이더는 지난 2002년 측정을 시작한 이래로 피치 밸류에서 1위 자리를 내준 적이 한 번도 없는 구종이다.

그야말로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는 최강.

그리하여 볼카운트는 2-2.

최민혁이 다섯 번째 공을 던졌다.

-뻐엉!!

풀카운트.

이번에도 역시 슬라이더였다.

하지만 속지 않았다.

네 번째에 아슬아슬하게 존에 걸쳤던 것과 달리 너무 대놓고 존 안쪽으로 들어온 탓이었다.

여섯 번째.

바깥쪽 아슬아슬한 코스.

네 번째 나를 속였던 공과 흡사했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딱!!!

삼진이 무섭다고 이런 상황에서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한다면 좋은 타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위대한 타자는 될 수 없었으니까.

참고로 나는 이미 테드 윌리엄스 이후 가장 위대한 타자 자리를 차지했던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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