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80화 (180/305)

180화. 선두(3)

[풀카운트!! 최수원!! 쳤습니다!! 큼지막한 타구!!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 갔습니다!!! 시즌 27호 홈런!!]

[와, 바깥쪽 코스 정말 아슬아슬하게 잘 제구된 공이었는데 이걸 그대로 잡아당겨 버리네요. 보시면 앞서 저 코스로 슬라이더를 던져서 헛스윙을 끌어냈었거든요. 사실 타자 입장에서는 좀 망설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을 텐데. 역시 최수원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 진짜······.”

물론 알고 있었다. 최수원이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것은. 하지만 이렇게 또 홈런을 한 방 맞고 보니까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팀에 존경······할 만한 인간은 아니지만, 아무튼 메이저에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인 조창혁도 최수원이라면 학을 뗐다.

“야, 그 괴물 새끼? 어휴, 어지간하면 걘 자연재해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겨. 그 새끼 그거 타격 성적을 좀 봐라. 진짜 올 시즌 투수 성적 보잖아? 마린스랑 다른 팀 선수들이랑 차이 꽤 날거야. 넌 진짜 시기 안 좋을 때 트레이드 된 거라니까. 아,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말고. 장기적으로 보면 결국 마린스보다는 브레이브스가 나을 테니까. 여기 박 코치님도 그렇고 트레이너들 진짜 유능하다.”

최수원이 내야를 한 바퀴 돌아 홈플레이트에 안착했다.

사직 구장의 수많은 팬이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그 시끄러운 환경 속에서 노형욱이 타석에 들어왔다.

2년 전.

그러니까 최민혁이 신인왕을 노렸던 그 시절에 가장 든든한 득점 지원을 해주던 타자다. 지금도 최수원이라는 괴물에게 가려졌지만, 시즌 71경기 중 69경기에 출장하여 15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리그 홈런 6위를 달리고 있다.

“최수원 말고 다른 놈들? 글쎄다. 형욱이 형이나 라온이 정도는 좀 치는 편이지. 근데 나머지는 어차피 속구 제대로 못 치는 사람들이라서. 아, 맞다. 근데 기본적으로 우리 같은 투수들은 이걸 명심해야 된다. 내 공이 진짜 최고라는 느낌으로. 어? 쫄지 말고. 좀 두들겨 맞아도, 상대 타자가 얼마나 대단한 타자건 간에 아무튼 가슴 쭉 펴고 눈에 힘 빡 주고. 오케이? 아니, 최수원은 그냥 없는 셈 치라니까. ”

조창혁이 말해준 것처럼 가슴을 쭉 펴고 눈에 힘을 빡 주고 노형욱을 바라봤다.

타석의 노형욱이 피식 웃는다.

바깥쪽 낮은 코스.

가장 빠른 공.

노형욱의 방망이가 그것을 그대로 잡아당겼다.

‘아······.’

한순간 조금 전 최수원이 잡아당겨 넘겨버렸던 그 홈런이 머릿속에 다시 재생됐다. 순식간에 쭉 떨어지는 자신감. 최민혁이 애써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가슴을 펴고 눈에 힘을 빡 주고.’

그리고 브레이브스의 중견수 강호창이 달렸다.

펜스 바로 앞.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노형욱의 타구가 담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 담장 바로 앞에서 잡히는 타구. 1회 말 마린스의 공격이 이렇게 끝이 납니다.]

[점수는 1:0. 강호창의 멋진 수비입니다.]

[그러고 보니 강호창 선수도 작년까지 마린스의 주전 중견수였죠?]

[네, 사실 그것 때문에 시즌 전만 하더라도 마린스의 센터라인이 많이 흔들리지 않을까하는 예상이 많았습니다만 용병인 사울 로페즈 선수와 이주혁 선수가 그 빈 자리를 메우 훌륭하게 메워주고 있습니다.]

“규만 선배, 정훈이 말처럼 진짜 공이 많이 묵직하네요.”

“그치? 거봐. 내가 말했잖아. 공이 엄청 묵직하더라니까.”

노형욱과 이정훈의 이야기에 이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테일링이 좀 심한 걸지도 모르겠네.”

“근데 수원이는 어떻게······.”

“최수원 쟤는 원래 이상한 놈이잖아. 그냥 힘으로 밀었나보지.”

“아뇨, 힘은 저보다 차라리 형욱 선배가 더 좋죠. 아마 스윗스팟 벗어났으면 담장 넘기기 힘들었을걸요? 뭐지? 테일링 무브먼트가 특별히 더럽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최수원이 고개를 저었다.

“자자, 뭐가 됐건 일단은 잘 막아보자. 오늘 1위 올라가야지.”

“그니까요. 오늘 딱 보니까 돌핀스 패배 각이던데 뒤집어야죠.”

오늘 수원에서는 돌핀스의 5선발과 창원 블레이즈 1선발의 맞대결이 있을 예정이었다. 만약 거기서 돌핀스가 패배하고 오늘 마린스가 승리한다면 리그 1위에 올라간다.

[아, 그러고보니 마린스의 경우는 오늘 만약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승리해서 리그 1위 자리에 올라간다면 이게 15년 만의 기록이 되겠네요.]

[15년이요?]

[네, 6월 시점에서 마린스가 1위에 올랐던 것이 지난 2012년 이후로 처음입니다.]

[그렇군요. 뭐, 그럴 수 있죠. 사실 팀이 어느 시점에서 강력하고 그런 건 다 다르니까요.]

[아뇨, 그게 그러니까 시점 문제가 아니라 마린스가 리그 1위 자리에 단독으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15년 만입니다······.]

[아······.]

경기가 계속됐다.

***

-딱!!!

강라온이 빠르게 땅볼을 처리했다.

마음이 급했는지 송구가 이전처럼 완벽하지는 않았는데 규만 선배가 팔을 쭉 뻗어 그 공을 무사히 받아냈다.

“아웃!!”

이런 걸 보면 팀이 확실히 좋아지긴 좋아졌다고 느낀다.

선수는 기계가 아니고 따라서 누구나 컨디션이 좀 오르락내리락 한다. 성적이 좋은 팀은 결국 그 사이클이 매우 적절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쉽게 지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팀이다.

지금 강라온의 컨디션이 조금 떨어졌을 때 규만 선배의 컨디션이 올라오는 것처럼.

“선배님들. 나이스 수비.”

덕아웃 입구쪽으로 나가서 수비 이닝을 끝내고 돌아오는 선배들을 격려했다. 외야에서 걸어온 이정훈이 코끼리 에어컨 근처로 빠르게 이동했다.

“어우, 죽겠다. 죽겠어.”

“오늘 정훈 선배 쪽으로는 공도 많이 안 갔잖아요.”

“야, 모르는 소리 하지마. 이게 공이 많이 와야지만 힘든 게 아니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집중을 하는 게 얼마나 피곤한데. 게다가 오늘 날도 너무 덥고. 지금 기온 몇 도냐?”

“그렇게 높지는 않은데. 27도예요.”

“야, 6월에 저녁 시간인데 27도면 충분히 높은 거지. 올해 날씨 완전 미쳤네. 내가 이래서 지구 온난화를 싫어하는 거야. 얼른 좀 시원한 서울 쪽 가서 경기 하고 싶다. 역시 여름에는 돔이 좋은데. 안 그러냐?”

“그런데 선배 고척에서 성적이 제가 알기론 엉망진창······.”

“어흠······. 아 타격 준비나 해야겠다.”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정타가 나오지 않았다.

슬라이더에 방망이가 헛돌아 삼진이 나오거나, 혹은 먹힌 타구가 나오거나.

사람들의 말처럼 정말 공이 묵직하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내가 홈런을 칠 때는 그런 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뭐 조언해줄 거 없어?”

“조언? 글쎄다······. 넌 어차피 치고 죽어라 뛰는 것밖에 없잖아. 하던 대로만 열심히 해봐.”

“하던 대로라······. 역시 평소에 구박은 많이 했지만 내심 나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던 건가? KBO리그 포수 타율 4위인 나의 실력을?”

“야, 3위랑 7푼 차이나면 인간적으로 4위 소리 하면 안 된다니까?”

“후후후.”

아니, 팀 캐미가 좀 올라가는 건 좋은데 그 올라가는 캐미스트리만큼 조유진의 간덩이도 점점 더 크게 부푸는 건 영 좋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2할 3푼짜리가 자꾸 자기가 타율 4위니 뭐니 헛소리를 하는데, 심지어 이놈 이거 타격도 타율 원툴로 출루율이고 장타율이고 다 엉망이다.

[자, 타석에 조유진 선수가 올라옵니다. 이번 시즌 마린스 돌풍의 주역 중 한 사람이죠.]

[네, 사실 최수원 선수가 워낙에 압도적이라 여러모로 묻히는 감이 있습니다만 마린스 팬들 사이에서는 근 15년 가깝게 마린스가 찾지 못하던 조각 중 하나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예요.]

[하하, 그건 평가가 좀 너무 거창한 느낌이 있네요.]

공을 받을 줄 아는 포수.

사실 프레이밍에 관한 부분은 야구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심판의 눈을 속이는 짓을 기술로 분류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기계식 심판을 도입해서 스트라이크존 판독을 기기에 맡겨야 한다는 말도 많긴 했는데 이게 좀 애매한 부분이 있긴 했다.

아이스하키에 인포서가 하키채 내려놓고 주먹으로 맞짱 뜨면 괜찮은 것처럼, 벤치클리어링 할 때 빠따 내려놓고 발차기 안 하고 주먹으로만 하면 또 괜찮은 것처럼 이것 역시 야구라는 종목의 재미 중 하나라는 의견도 완전히 잘못된 의견은 아니다.

게다가 이게 또 어떤 부작용으로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변에서 보기에는 뭐 저런 관습, 혹은 규칙이 다 있어? 하는 것도 역사가 오래되면 그 나름의 균형이 생긴다.

일례로 메이저리그에서 보복구에 관한 규정을 새로 신설한 이후 오히려 히트 바이 피치가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했던 적이 있다. 보복구를 맞을 걱정이 없으니 안심하고 마음껏 공을 던진 덕분이었다.

아무튼 마린스 입장에서 쪼유는 2할이 넘는 타율을 기록하면서 공까지 받을 줄 아는 귀한 포수였다. 여기서 만약 본래 역사처럼 작년에 백하민 대신에 정병철을 1라운드로 뽑았더라면 이라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쳤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쪼유가 특유의 상체를 잔뜩 숙인 자세로 최민혁의 공을 기다렸다.

초구.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아니, 슬라이더였다.

확실히 일품은 일품이다.

최민혁도 저기에 체인지업 같은 써드 피치 하나 제대로 장착하고 부상 없이 경험만 좀 쌓으면 정말 미국에 수출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이번엔 진짜 빠른 공.

-딱!!

쪼유의 방망이가 그 공을 건드렸다.

절대 두들긴 게 아니었다.

말 그대로 그냥 건드렸다.

파울라인을 넘어 힘없이 구르는 타구.

볼카운트는 이제 0-2.

잠시 손을 들어 타석을 벗어난 녀석이 자신의 손바닥을 몇 차례 주물렀다.

묵직한 공······.

아, 잠깐만.

설마 그건가?

세 번째.

쪼유의 방망이가 멈춰섰다.

-뻐엉!!

슬라이더.

볼카운트 1-2.

내가 볼 때 이건 알아보고 멈췄다기보다는 그냥 볼카운트 0-2라서 유인구 하나 나올꺼라는 예측에서 멈춰 세운 듯 싶다.

그리고 네 번째.

존에서 많이 빠진 속구.

2-2.

다섯 번째.

쪼유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타격의 순간, 본능적으로 1루를 바라보려는 머리가 숙였던 몸을 1루 쪽으로 끌어당긴다. 그리하여 이상하기 짝이 없던 자세에서 정상적인 자세로의 전환이 스무스하게 이뤄졌다. 정말 지독할 정도로 몸에 박아넣은 자세 그대로다. 물론 정석적인 자세와 비교하자면 힘의 손실은 컸다. 하지만 정상적인 자세로 시작해서 마무리가 망하는 것보다 이상한 자세로 시작하여 마무리가 깔끔한 쪽이 결과 면에서 훨씬 괜찮을 수밖에 없다.

제대로 맞은 타구가 2루수의 머리를 살짝 넘어갔다.

“세이프!!”

노아웃에 주자 1루.

쪼유가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 네 개를 쭉 펴들었다.

V자도 아니고 저건······. 아 지금 설마 2할 4푼 됐다고 자랑하는 건가? 아니, 아닐 것이다. 그래, 자기가 타율 4위다. 뭐 그런 소리겠지.

“다녀오마.”

대기 타석의 이정훈이 웃음기 싹 빠진 얼굴로 방망이를 들고 타석으로 걸어갔다.

그 진지한 모습이 한 없이 불안했다.

-딱!!!

그리고 이정훈은 자신의 말을 완벽하게 지켰다.

초구 타격.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말 이상을 해냈다.

그냥 다녀오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나갔던 애까지 같이 데리고 돌아왔다.

깔끔한 병살타.

“선배?”

“크흠······. 오늘 민혁이 공이 참 묵직하단 말이지. 이거 영 안 뻗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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