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선두(12)
장진규가 마운드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참 재수 없다.
세상이 불합리하다는 것 정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진규 본인도 노력이건 뭐건 아무튼 이 프로리그 1군 무대에서 뛰고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불합리함의 혜택을 받은 이 중 하나다.
사람들은 종종 장진규 자신의 노력을 칭송하지만, 그의 동기들 가운데 그만큼 노력한 이가 어찌 없었을까. 노력이라는 것도 결국 그것으로 개화할 재능, 그리고 그 노력이라는 것을 버텨낼 내구성이 있을 때나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것조차 아득하게 뛰어넘을 만큼 불합리했다.
아니, 애초에 저렇게 생겼으면 영화배우나 할 것이지 대체 왜 야구를 하고 난리인가. 게다가 야구에 대한 재능은 또 어떤가. 150이 훌쩍 넘는 공을 던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재능의 특별함을 증명한다.
항상 그렇듯 방망이를 짧게 쥐고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은 채 공을 기다렸다.
어떻게든 1루로 나가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딱!!!
살짝 깊숙한 코스.
밀려난 타구가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150.3km/h의 강속구.
무서운 공이었다.
하지만 장진규는 그보다 훨씬 무서운 공을 이미 상대해봤다.
그것도 불과 몇십 분 전에.
그의 시선이 1루로 향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가 불합리한 재능의 소유자라면 1루에 선 저 괴물은 불가해의 무언가다. 야구의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조차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결과물을 낸다.
“전성기의 배리 본즈가 KBO에서 뛴다면 이런 성적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배리 본즈는 MLB에서 이런 포스를 뽐냈었고······. 굳이 따지자면 배리 본즈까지는 아니고 메이저에 10년에 한 번 나올 만한 MVP급 타자가 KBO에서 뛴다면······.”
“그러니까 정리를 하자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신인이 리그 최정상급의 선발로 활약을 하면서 동시에 KBO 레벨을 아득히 뛰어넘은 MLB의 그냥 MVP급도 아니고, 10년에 한 번 나올법한 MVP급 타자의 포스를 뽐내고 있다는 말이네요?”
뭐라고 해야할까?
1미터 30센티짜리 난쟁이가 키 2미터의 거한을 보고 너무 크다고 한탄하려는데 그 옆에 4.5미터짜리 진짜 거인이 서 있는 느낌이랄까?
그렇기에 장진규는 저 백하민이라는 투수에게 재능의 벽을 느끼고 절망하는 대신 그냥 참 재수 없다는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저 불가해의 재능 앞에서는 다 도찐개찐이었으니까.
마운드의 백하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한층 더 깊숙한 코스.
151.1km/h의 속구가 과장 조금 보태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장진규는 물러나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몸쪽 공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서 물러나지 않는 마음가짐이야 말로 장진규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으니까.
백하민이 그 앞에서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바깥쪽 속구.
-뻐엉!!!
“스트라잌!!”
장진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명백히 빠지는 공이었다.
“자자, 굿 볼.”
조유진이 자신의 미트를 팡팡 두들겼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도 정말 밉상이다. 세상에 다시 없을 괴랄한 타격폼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데 그래도 꾸역꾸역 평균은 해주고 있고, 도루저지, 블로킹, 프레이밍까지 수비에서는 흠잡을 곳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번 시즌 최수원이라는 괴물이나 저기 피닉스에 정병철같은 압도적인 타격성적을 보여주는 포수에게 완벽하게 가려졌지만 사실 이 녀석도 만만치 않다. 방금도 확실히 빠지는 공을 멋들어지게 속여넘겼다.
볼카운트 1-2.
불리했다.
네 번째.
또 바깥으로 빠지는 공.
반쯤 돌아가던 방망이를 멈춰세웠다.
“어? 이거 스윙 아닙니까?”
3루심에게 조유진이 강하게 어필했다. 하지만 방망이는 명백히 파울라인이 확장된 가상의 선을 넘어가지 않았다.
“아, 아쉽네······.”
볼카운트 2-2.
조유진의 뭐라뭐라 떠드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말싸움 이겨봤자 이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신경을 할애하는 것 자체가 패배다.
백하민의 특기는 슬라이더다.
특히 그가 던지는 두 종류의 슬라이더는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리그 최정상급의 선발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가 가진 무기가 그 슬라이더 뿐이기 때문이다. 같은 손 타자에게 슬라이더는 스트라이크인 척하는 볼이다. 따라서 다른 손 타자에게 슬라이더는 볼인 척 하는 스트라이크다. 속지 않으면 그대로 두들기기 딱 좋은 공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슬라이더는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는 최고의 변화구였지만 다른 손 타자에게까지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오른손 투수인 백하민이 좌타자들에게 약한 이유다.
바깥 코스 공 하나 반 정도 빠진 빠른 공.
속구가 아니었다. 살짝 안으로 휘어 들어오는 고속 슬라이더였다.
고교 시절이었다면 상대 타자의 방망이가 헛돌았을 그 공을 딱 KBO 평균 레벨, 혹은 그 이하에 불과한 장진규가 두들겼다.
-딱!!
파울 라인 밖으로 벗어나는 타구.
볼카운트는 여전히 2-2.
나쁘지 않은 카운트였지만 삼진을 잡아낼 결정구가 없었다.
체인지업.
백하민의 사인에 조유진이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못쓸 공은 아니다. 오늘 경기 전에 몇 번 던지는 것을 봤는데 나쁘지 않았다.
-딱!!!
하지만 장진규는 속지 않았다.
정확한 타격.
타구가 2루를 지키던 강라온의 글러브를 피해갔다.
[아, 2-2 카운트에서 장진규가 여섯 번째 공을 쳐서 안타를 만들어냅니다.]
[4회 초. 투아웃에 주자 1루. 타석에 강호창 선수가 올라옵니다.]
-우우우
그를 향한 관중들의 야유는 여전했다.
***
좀 아쉬웠다.
하민이 형의 체인지업은 결정구로 써먹기에는 너무 구리다. 거의 내 체인지업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카운트 하나 잡기 위한 깜짝 용도라면 몰라도 차라리 거기서는 속구나 슬라이더로 승부하는 편이 나았다.
“오래간만입니다.”
“······.”
1루에 선 장진규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하게 자신의 장비를 벗고 2루를 향해 세 걸음을 걸어 나간 뒤 몸을 숙였다. 확실히 재미없는 타입이다. 야구를 즐긴다기보다는 정말 목숨 걸고 하고 있달까?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는 상대는 언제나 기꺼운 법이니까.
-딱!!
장진규가 최선을 다해 2루로 달렸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최선을 다 한다고 항상 좋은 결과가 따라올 수는 없는 법이다. 강호창의 타구가 강라온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했다.
-뻐엉!!
“아웃!!”
가벼운 포스 아웃.
경기가 계속됐다.
4회와 5회를 지나 마침내 6회 말.
하민이 형은 그때까지 꾸역꾸역 브레이브스의 공격을 틀어막았다.
3.2이닝. 11개의 아웃카운트를 잡는 동안 타순이 두 바퀴를 돌았지만 내준 점수는 고작 1점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사이 조창혁 역시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우리 타선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그 가운데서 백미였던 것은 역시 5회 말에 나에게 삼진을 뽑아낸 것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볼카운트 3-2에서 존 밖으로 슬쩍 빠져나가는 아슬아슬한 슬라이더였다. 그렇게 삼진 하나 잡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그 표정은 정말 뭐라 형용하기 힘들 만큼 재수가 없었다.
타석에 8번.
하민이 형이 올라갔다.
앞선 타석에서는 시원한 헛스윙 삼진.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뭐, 고등학교 시절에야 에이스에 3번을 쳤다지만 그건 선수 간의 수준 차가 거대한 고등학교 시절이니 가능한 일이고 프로에 와서 벌써 1년이 넘게 방망이도 제대로 안 잡았는데 리그 최고 수준의 투수를 상대로 투수가 안타를 치는 것은 언감생심 꿈꾸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실제로 조창혁도 하민이 형을 상대로는 적당히 속구나 던지면서 여유롭게 승부를······
-딱!!!!!!
[쳤습니다!! 백하민!! 삼루수의 키를 넘기는 강한 타구!! 안타!! 안타입니다!!]
매우 깔끔한 좌전안타.
“와!!!”
대기타석에 있던 쪼유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봤다.
덕아웃에서 그 다음을 기다리던 이정훈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쪼유에게 말했다.
“야, 쪼유. 좀 보고 배워라. 어? 투수도 지금 치고 나가는데. 뭐하는 거냐?”
“안 그래도 지금 제가 딱 한 방 제대로 치려고 그랬습니다.”
“그게 설마 병살타는 아니지?”
“당연하죠. 제가 딱 타점 세팅 해둘 테니까 선배님 와서 홈런으로 깔끔하게 3타점 쓸어 담으시면 됩니다.”
“그래? 그러면 오늘부터 타점왕 한 번 도전 해봐?”
너무 엉망진창이라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 대화였다.
쪼유는 평소처럼 타석에 섰다. 백하민은 조금 어색한 자세로 1루에서 두 걸음을 걸어 나왔다.
조창혁의 154km/h 속구가 존을 스쳤다.
-뻐엉!!
“스트라잌!!”
쪼유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부웅!!!
“스트라잌!!”
결과는 높은 속구에 헛스윙.
무려 155.7km/h의 속구였다.
볼카운트 0-2.
세 번째 공이었다.
-딱!!!
존 밖으로 살짝 빠져나가는 브레이킹볼이었는데 쪼유의 방망이가 공을 건드렸다. 이정훈이 미래라도 본 것일까? 이건 누가 봐도 병살타 각이었다.
1루의 백하민이 2루를 향해서 달렸다.
쪼유가 끝까지 방망이를 잡아당기고 1루를 향해 전력으로 달려나갔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병살타.
작년까지의 마린스라도 선행타자 아웃 정도는 나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장찬민이 공을 잡았다.
그리고 2루 커버가 와있을 신희성에게 공을 던졌다.
매우 경쾌한 박자감이었다.
그리고 신희성의 글러브가 그 가벼운 송구를 놓쳤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니, 굳이 이유를 찾아보자면 장찬민은 평소보다 반의 반 박 정도 빠른 타이밍으로 공을 처리했고, 신희성은 평소보다 미묘하게 움직임이 굼떴다.
1,000번. 혹은 2,000번에 한 번 정도는 그냥 나올법한 실수.
하필이면 그 실수가 지금 터졌다.
신희성이 빠르게 뒤로 흘린 공을 주웠지만 이미 늦었다.
노아웃에 주자 1, 2루.
조창혁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타석에 선 이정훈이 그 일그러짐을 놓치지 않았다.
2개 연속 빠지는 공.
볼카운트 2-0.
브레이브스의 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간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작 그 20초 남짓의 대화로 흔들리던 조창혁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점이었다.
2개의 볼카운트 정도는 패널티로 깔아줘도 상관 없다는 듯한 피칭.
인성은 배울 구석이 없어 보이지만 저런 모습들은 같은 투수로써 보고 배울만했다.
하지만 이정훈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볼카운트 공짜로 2개나 받아놓고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온다면 그건 양심이 없는 거다.
-뻐엉!!!
여덟 번째.
이정훈이 가뿐하게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했다.
5:5 상황에서 노아웃 만루.
조창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어지는 강라온을 상대로 노아웃 만루에서 그대로 단 1점도 내주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을 실행에 옮겼다.
삼구 삼진.
6회 말에 갑자기 오늘 한 번도 던진 적이 없었던 159km/h를 넘어 가는 속구를 연달아 던져대며 강라온을 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리하여 원아웃에 만루.
나의 네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오늘 경기에서 지금까지 두 번의 자동 고의 사구.
그리고 한 번의 삼진.
6회 말에 5:5 동점.
그리고 만루.
과연 브레이브스의 덕아웃은 어떤 선택을 할까?
마운드의 조창혁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