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우승 이후(1)
경기는 끝났다. 하지만 우리의 일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들과 술.
그래, 술이다. 지금까지 시즌 내내 팀 차원에서 술을 경계하는 분위기였지만 무려 창단 이후 첫 우승이 결정된 날이었다. 이런 날까지 뒤풀이에서 맥주 한 잔 없이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쪽에 눈시울이 아직도 붉은 이규만과 몇몇 선수들이 그 맥주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이규만은 경기 끝나고 인터뷰하는데 진짜 옆에서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펑펑 울었다. 더 부끄러웠던 것은 그 눈물을 보고 같이 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관객석에도 마찬가지로 펑펑 우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누가 보면 창원 블레이즈파크가 우리 홈구장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는 광경이었다.
“와, 선배님 진짜 끝장입니다. 아니, 거기서 어떻게 160짜리 투수한테 홈런을 날리십니까.”
“그러니까요. 거기서 블레이즈 놈들 추격 의지가 확 꺾이는데. 크.”
“그냥 운이 좋았지.”
근데 이걸 정말 파티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실히 한국이라서 그런가 MLB에 비해서는 화끈함이 좀 부족하긴 했다. 뭐랄까? 파티와 회식의 어느 경계 지점 즈음 되는 느낌이다.
아니, 어쩌면 그냥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어디 회사에 과장님 정도 될법한 양반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서경준이 나에게 물었다.
“수원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뭐를요?”
“규만 선배 홈런.”
“칠 만했죠. 규만 선배 배트 스피드 좀 느려지신 건 맞는데 선구안은 아직 살아 있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그 투수 공이 좀 정직했잖아요. 그 정도 되면 뭐 거의 리듬게임이죠.”
“그러니까 네가 봤을 때 뭐 규만 선배 타격감이 좀 살아나고 그런 건 아니다 이거네?”
그래, 뭐 만화 영화라면 여기서 주장이 극적으로 각성해서 뭔가 해내고 그러는 게 정석적인 진행일거다. 원래 주인공의 가장 훌륭한 조력자가 최종 보스 직전에 각성해서 사천왕 중에 최강을 담당하는 건 클리셰니까.
“네, 뭐 그렇죠. 규만 선배도 나이가 있으니까요.”
“나이······. 그래, 규만이 형이 나이가 있긴 있지.”
사회에서 마흔 살이면 그게 연구원이건 사무직이건 영업직이건 보통 기량이 절정에 다다를 나이다. 하지만 프로 선수에게 마흔이란 보통 사람의 환갑.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노익장이라는 말처럼 사회에서도 환갑의 나이를 넘어 오히려 실력이 더 올라가는 케이스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닌 것처럼 야구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질문을 던진 서경준은 표정을 보아하니 나의 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전 이만 슬슬 일어나보겠습니다.”
“벌써?”
“내일 경기도 있잖아요. 보아하니 여기도 그렇게 오래 놀 것 같지도 않은데요 뭐.”
내일 경기에 분명하게 빠질만한 선수들 몇몇을 제외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기껏해야 맥주 한두 캔 정도? 논알콜들도 제법 눈에 띈다. 뭐, 이것도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긴 하지만 운동 열심히 해서 몸 건강하고 덩치 큰 선수들의 경우 평균적으로 보통 사람들에 비해 술이 강하다는 것을 고려하면 정말 기분만 내는 수준이다.
“하긴. 넌 아직 우승만큼이나 중요한 것도 남았으니까. 아니, 아니다. 우승보다 오히려 그쪽이 더 중요하려나?”
서경준의 묘한 질문.
그러고 보니 이 선배 얼굴이 상당히 불콰하다. 아까 본인 입으로 세 캔 이상은 마시지 말라고 말하는 걸 봤으니 설마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닐 테고······. 보기 드물게 술이 약한 타입인 듯싶다.
“하하, 선배. 좋은 날 아닙니까.”
이정훈이 한 박자 빠르게 끼어 들었다.
확실히 눈치가 범상치 않다.
“당연히 우승이 제일 중요했죠. 나머지는 그냥 보너스 같은 거고요. 근데 제가 원래 좀 욕심쟁이라서 게임을 할 땐 보너스 스테이지까지 알뜰하게 다 챙기는 편이거든요. 게다가 만약에 내일 경기 전체적으로 컨디션 엉망이면 여기저기서 또 깔 텐데. 최종적으로 한국 시리즈 우승까지 가려면 지금 이 좋은 분위기 망가지면 안 되잖습니까. 저희 주장 저렇게 좋아하시는데 그래도 마지막에 반지는 끼워드려야죠.”
“그렇지. 겸사겸사 우리도 보너스도 좀 달달하게 챙기려면 한국시리즈 꼭 이겨야지. 그거 돌핀스에 동기 말로는 A급 기준으로는 보너스가 몇 천 차이 난다던데. 경준 선배. 수원이는 제가 태워다주겠습니다. 오늘 같은 날에 택시 태우기도 좀 그렇고 마침 집 방향도 비슷하거든요.”
이정훈의 차는 딱 이미지 그대로였다.
문 두 짝 달리고 뚜껑이 열리는 빨간 스포츠 카.
“선배, 이런 거 안 위험합니까?”
“인마, 차는 원래 다 위험해. 그리고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비싼 차면 사람들이 막 비켜줘서 더 안전하다니까? 그리고 내가 스피드광 같은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이걸로 80km/h이상 안 밟으니까 위험할 것도 없지.”
“스포츠카를 모는데 80km/h 이상 안 밟는다고요? 아니, 그러면 고속도로는 어떻게 하는데요?”
“고속도로를 왜 차를 타고 가냐? 거긴 뚜껑을 아무리 열어도 보는 사람도 없잖아. 게다가 어디 멀리 갈 거면 기차를 타야지. 난 이거 무조건 시내에서만 탄다. 과시용이야. 과시용.”
과연 이정훈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듯. 근 5년을 몰았다는 그의 차는 주행거리가 고작 18,000km에 불과했다.
“1년에 4,000키로도 안 탄 거에요?”
“홈 경기 때 출퇴근하고 서면 나갈 때만 몰았으니까.”
9월 말.
심지어 새벽.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정훈이 자동차의 뚜껑을 열었다. 근데 또 히터를 빵빵하게 틀고 열선까지 키니까 나쁘지 않았다. 한겨울 노천탕에 앉은 것 같은 느낌과 조금 비슷하달까?
운전을 하면서 이정훈이 자신이 슈퍼카를 모는 이유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너도 인마 나이 먹어보면 알게 될 거다. 아니다, 넌 평생 모르려나? 이게 막 슈퍼 스타면 또 모르겠는데 나처럼 어정쩡하면 FA 전에는 사람들이 은근 무시하거든. 워낙에 야구 선수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으니까. 게다가 우린 또 소득을 미리 좀 당겨 받는 느낌이잖냐. 그래서 확 질러 버렸지. 게다가 아무래도 여자애들 꼬시기에 또 이만한 것도 없기도 하고.”
“이런 거에 넘어오는 여자치고 제대로 된 여자는 없지 싶은데요.”
“나도 애초에 제대로 된 여자 만나자고 그런데 놀러 다니는 거 아니거든?”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논리에서 이정훈에게 패배하다니.
영 이상한 기분이다.
“경준 선배 너무 미워하진 마. 그거 어떤 의미에서 보면 다 질투의 일종이다. 원래 인마. 잘난 놈은 좀 못난 사람이 질투하고 그러는 거 이해해주고 그런 맛도 있어야 하는 거야.”
“안 미워합니다. 그 선배도 진짜 열심히 했잖아요.”
“그러면 다행이고. 그래도 아까 우승이 진짜 제일 중요하고 나머지는 보너스에 불과하다는 말. 제법 멋졌다. 경준 선배도 그거 아마 마음에 들었을 거야. 솔직히 너도 너 잘난 거 알잖냐. 뭔가 선수 생활 내내 진짜 죽을 똥 싸가면서 목표로 하던 게 있었는데 절대 안 될 것 같던 그 목표가 누군가에게는 너무 손쉬운 통과점 같으니까. 그게 좀 그랬을 거야.”
“쉬운 통과점이라뇨. 절대 쉬운 목표는 아니었어요. 솔직히 홈런 신기록이나 리그 MVP 쪽이 더 쉽죠. 마린스 우승보다는.”
“······. 뭐지? 분명 그게 아니라고 위로하는 내용 같은데 왜 묘하게 기분이 더 나쁘지? 야, 너 방금 이건 어디 가서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마라. 알겠냐?”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으니 술에 취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주변에 차도 거의 보이지 않는 새벽 거리.
뚜껑 열린 차를 타고 시속 60km/h로 달리는 스포츠카가 만들어내는 묘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창단 이후 첫 정규시즌 우승이라는 타이틀과 그것에 기뻐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흔 살 넘은 아저씨가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엉엉 우는 꼴을 본 탓일 수도 있다.
“싫은데요. 여러분 마린스 우승 했습니다!! 진짜 조오오오온나게 힘들었어요!!”
“야, 인마. 미쳤어? 지금 새벽 4시야.”
이정훈이 서둘러 자동차 뚜껑을 닫았다. 그 와중에 애초에 달리던 속도가 60km/h라서 별로 속도를 줄이지 않았는데 뚜껑이 잘 닫힌다.
“새끼가. 맨날 건방지고 재수 없고 제 잘난 맛에 사는 것 같아서 영 재수 없었는데 좋아하는 꼴 보니까 조금은 사람 같고 좋네.”
“선배, 뭔가 한 문장 안에 재수 없다는 말이 문맥에 맞지 않게 여러 번 들어간 것 같은데 제 착각인가요?”
“아니, 중요한 단어는 원래 두 번 강조해야 하는 거야.”
새벽이라 뻥 뚫린 도로.
아마 택시를 탔다면 한 7, 8분이면 도착했을 것 같은 거리를 슈퍼카를 타고 15분 이상 달려 도착했다.
“그러면 잘 자고. 이따 보자.”
“네.”
***
같은 시간.
뉴욕 시티 필드.
[아!!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 다리를 절뚝이며 덕아웃으로 돌아갑니다. 시즌 막판. 이제 고작 15경기를 남겨 둔 상황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요.]
[비록 최근 약간의 부진으로 MVP 경쟁에서 조금 뒤쳐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가능성은 충분하거든요. 이번 시즌 메츠의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 역시 마찬가지고요. 부디 큰 부상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시즌 막판 더블 헤더의 첫 번째 경기를 치르던 알렉산더 맥도웰이 1루로 달리던 과정에서 햄스트링에 부상으로 교체됐다.
“젠장. 의사는 뭐래?”
“큰 부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름 정도는 쉬어줘야 한다고······.”
메츠의 단장 조슈아 파그노만이 애꿎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었다.
“젠장. 하필 이럴 때에.”
지구 1위는 이미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와일드 카드 경쟁은 충분히 가능한 상황에서 시즌 41개의 홈런을 쳐준 타자가 사실상 시즌 아웃 선고를 받다니.
“맥도웰 선수는 충분히 뛸 수 있다고 주사 맞고 뛰겠다고 하긴 합니다만······.”
“그런 멍청한 소리는 알아서 걸러 줬으면 좋겠는데? 앞으로 10년은 써먹어야 하는 선수야. 당겨 쓴다고 우승할 상황도 아니고. 푹 쉬라고 해. 젠장······.”
돈을 적게 쓴 것도 아니다.
선수들의 성적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냥 운이 없었다.
번갈아 가면서 부상이 터졌고 누군가는 SNS에 뻘짓을 하는 바람에 슬럼프가 찾아왔다. 이번 시즌 메츠가 보험사로부터 받은 보험료만 무려 7천만 달러. 어지간한 스몰 마켓팀 2개 페이롤에 필적했다. 돈 많이 벌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그만큼 팀 전력 여기저기에 구멍이 숭숭 났다는 의미다.
결국 3억 달러에 필적하는 금액을 쓴 건 우승을 위해서였다. 이건 7천만 달러를 아낀 게 아니라 무려 2억 3천만 달러를 낭비한 거다.
“제임스 코퍼레이션 쪽 연락은?”
“아무래도 그쪽도 시즌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모양새입니다. 아시잖습니까. 요즘 워낙에 핫한 거······.”
분명 열흘 전만 하더라도 감히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껏해야 61호. 그러니까 아시아 홈런 신기록 이야기 정도가 전부였다. 분명 그러했다. 알렉산더 맥도웰이 조만간 미국에 올 자기 라이벌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떠들어대긴 했지만 그래봐야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그리고 지금.
[시즌 66홈런!! 최수원 끝나지 않는 홈런 쇼!!]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 않았다.
남은 경기 수는 고작 4경기.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심지어 태평양 건너. 야구의 본고장인 이곳 미국에서까지.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