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지나간 시대의 전설?(9)
[구로다 히로키의 조언이 좋았다? 최수원 3이닝 무실점 호투!!]
[최수원 ‘존중받을만한 커리어의 선수의 조언은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유용한 법이다. 구로다는 매우 훌륭한 멘토다.’]
[구로다 히로키 ‘멘토? 과찬이다. 사실 피칭에 관해서는 딱히 조언이랄 것도 없었다. 그는 그렉이나 클레이튼과 같은 특별한 재능을 지닌 투수다.’]
이번에 또 기사들이 난리가 났다.
참고로 내가 구로다에 대해서 했던 이야기는 정확히
“제 피칭을 보면서 요령을 몇 가지 알려줬는데 그게 좋았던 것 같습니다. 확실히 경험 가운데 어떤 부분은 시대를 관통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전부였다.
대체 어디에 멘토라는 단어가 있었던 것일까? 아마 구로다 히로키의 인터뷰도 비슷한 결이었을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 정말 크게 난리난 건 한국의 언론도, 뉴욕의 언론도 아니었다.
[3이닝 무실점!! 그 비밀은 일·한의 경계를 뛰어넘은 튜터링에 있었다? 야큐에는 국경도 연령도 없는 법!! 구로다 히로키의 적절한 어드바이스로 한층 더 발전한 투타겸업의 후발주자 최수원의 훌륭한 피칭!!]
그래. 일본이다. 한국 이상으로 야구에 미친 나라.
작년을 기준으로 NPB는 12개 팀에 1년 858경기로 총 관중 수가 2,700만 명가량 된다. 이는 전 세계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MLB의 7천만에 이은 2위의 기록이다.
KBO가 10개 팀에 720경기로 좀 괜찮은 해에 1,000만 살짝 넘는 걸 생각하면 평균 관중 수만 따지더라도 2배를 훌쩍 넘는다는 뜻이다. J리그가 폭망하고 오타니 쇼헤이를 비롯한 스타급 선수가 연속으로 배출된 탓에 1억 2천만이라는 인구가 거의 야구 하나에 몰빵한 덕분에 벌어진 현상이다.
한·일 관계는 당연히 좋지 않다. 해결되지 않은 역사의 문제. 그리고 제조업 선발주자와 후발주자의 경제적인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탓이다.
하지만 언제나 자본주의는 그러한 복잡한 문제조차 가볍게 뛰어 넘는다.
“스완, 너 일본에서 CF 제안 들어왔어. 구로다랑 같이 하는 조건으로.”
“일본에서 CF가?”
애초에 CF란 기업이나 상품의 이미지를 홍보하는 수단이다. 당연히 비호감을 모델로 쓰지 않는다. 80년대에는 홍콩배우를 CF모델로 쓰던 우리가 이제는 절대 중국 쪽 애들을 모델로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참고로 회귀하기 전 나는 MVP 2위를 그렇게 받았던 타자였음에도 일본 쪽 CF 제안 따위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응, 일단은 경기 영상이랑 AI 이용한 영상편집으로 내보내고 나중에 추가로 한국 귀국할 때나 미국 출국할 때 잠깐 일본 들러서 행사 참가. 구체적인 일정은 협상하기 나름일 것 같아.”
사실 받았다고 해도 아마 거절했을 거다. 난 일본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시계는 거기 모델만 착용하는 거. 그리고 혹시라도 ‘그거’하게 되면 선물로 롤렉스 말고 자기들이 제공하는 시계 선물하는 거야.”
“에······. 그건 좀 곤란한데. 퍼펙트했는데 롤렉스가 아니라 일본 시계를 선물하는 건······.”
“최소 5만 달러 이상의 고급 라인으로 7개. 그리고 15만 달러 이상의 최고급 라인으로 하나 제공할 거래. 그리고 그거랑 별개로 너한테 나갈 보너스도 협상 가능할 것 같아. 일단 그쪽의 현재 제안은 120만 달러인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협상하기에 따라서 150만 달러 정도는 가능할 거라고 보고 있어.”
“일본 시계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좀 들 것 같네. 뭐 롤렉스 갖고 싶으면 15만 달러짜리 일본 시계 미개봉 신품으로 팔고 본인이 롤렉스 사면 되는 거잖아. 안 그래?”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솔직히 이 정도면 매국이 아니라 외화획득이 아닐까? 그래, 자본주의란 본래 복잡한 감정도 종종 뛰어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면 일단 진행한다?”
“오케이.”
그렇게 메이저 진출 직후 나의 첫 번째 용품 계약은 야구용품이 아닌 명품 시계로 결정이 났다.
***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
최초의 71인.
그리고 최후에 남을 26개의 자리.
라커룸의 짐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복작거리던 라커룸은 조금씩 쾌적해졌다. 하지만 그 쾌적함이란 결국 그 나름의 사정을 가진 누군가가 하나씩 사라짐을 의미했다.
“조만간 꼭 보자.”
“······.”
오스왈드 웰스.
빨강 머리에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17라운드 출신 포수 유망주.
녀석은 올해 처음 메이저 캠프에 올라왔음에도 무려 29일을 버티고 마이너 캠프로 강등됐다.
‘대충 네 번째 옵션 정도인가?’
이제 캠프에 남은 포수는 단 둘.
오스왈드 웰스는 마지막으로 탈락한 포수가 됐다. 어쩌면 녀석은 자신이 마지막까지 남는 걸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투타겸업의 선수가 하나 있으니 투수를 13명이 아닌 12명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포수를 세 명 쓸 수도 있다는 상상이었겠지.
하지만 그 녀석보다 앞서 마이너 캠프로 내려간 잭 챈들러가 사실 녀석보다 기량이 더 좋았음을 고려하면 결과는 뻔했다. 재능이 보이는 녀석에게 마지막까지 메이저 캠프의 맛을 보여준 것이다.
“오스왈드 저 녀석 실망이 좀 큰 것 같은데?”
“그러니까. 솔직히 좀 뻔한 일이었는데 말이지.”
도널드와 조쉬가 나의 인사에도 별다른 답 없이 묵묵히 짐을 싸서 떠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한 마디씩을 내뱉었다.
“원래 본인 일이 되면 뻔한 일도 뻔한 일이 아니게 되는 거니까.”
사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른 선수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해줄 수 있는 조언들이 나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구로다를 만나기 전까지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스무 살의 커쇼.
스무 살의 그렉 매덕스.
어쩌면 메이저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투수들의 스무 살을 내 경쟁 상대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편안해졌다.
그래, 내가 타자로는 명전 직행급 타자가 맞지만, 투수로는 아직 메이저 투수판도 제대로 못 밟아본 투수다. 심지어 딱딱한 마운드와 미끄러운 공에는 완벽히 적응도 하지 못 한 상황인데 간신히 5선발 경쟁밖에 못 한다는 것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100마일이 넘는 공을 던지는 투수고 아무리 메이저리그의 평균 구속이 올라갔어도 풀시즌을 치르면서 평속 95마일을 찍는 선발 투수는 리그에 서른 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그나저나 내일은 우리 셋 다 등판하는 날인가?”
“어, 시범 경기 마지막 원정이니까.”
이제 시범 경기도 고작 세 경기가 남은 상황.
“아, 맞다. 스완 너는 내일 타자로도 올라가지?”
지금까지 투수로 뛰는 날에는 타자로 올라간 적이 없었다. 근 한 달간의 시범 경기 동안 적당히 투수와 타자의 간격을 조절해가며 휴식일을 조금씩 줄여갔고 마침내 시범 경기 막판인 지금, 나는 진정한 의미의 투타 겸업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사실 구로다와의 대화 이후로 투수 성적이 제법 잘 나온 덕분이기도 했다.
“어, 선발 투수에 4번 지명 타자.”
“어? 너 타자로는 요새 계속 2번 치지 않았었어?”
슬슬 주전 야수들이 좁혀진 지금에도 나는 꾸준히 2번 타자로 출장을 하고 있었다. 최근 빅리그는 강한 3번을 넘어 아예 강한 2번으로까지 내려오는 분위기였던 만큼 이건 나의 타격이 현재 양키스에서 최고 수준이었음을 증명하는 타순이기도 했다.
“그 양반이 내일 복귀 예정이잖아.”
“아! 그러고 보니 벌써 그렇게 됐구나.”
***
어쩌면 나의 시범 경기 마지막 등판이 될 원정 경기.
이걸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상대는 시범 경기 첫 번째 상대였던 필라델피아 필리스였다.
필리스의 캠프로 향하는 버스.
시범 경기 초반 주전급 선수가 거의 없는 상태로 가던 때와는 달리 세 대의 버스는 주전급 선수들로 가득했다. 이미 내려갈 선수는 다 내려가고 캠프에 서른명 남짓 남은 덕분이었다. 오늘 원정에 빠진 선수는 팀의 원투펀치인 도밍고 로드리게스과 게릿 콜. 그리고 내일 경기와 모레 경기에 선발로 뛸 예정인 딜런 리와 앤드릭 나바 뿐이었다.
오늘 경기의 선발이었던 만큼 짬밥이니 뭐니 상관없이 나에게는 첫 번째 버스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가 배정되어야 했다. 세 줄짜리 우등 버스에서 좌석이 두 개 붙은 자리. 그것도 맨 뒤에서 한 칸 앞의 그 자리. 그런데 내가 앉아야 하는 그 가장 좋은 자리에 무언가 우뚝 솟은 거대한 머리가 보였다.
‘응?’
누군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를까.
현재 양키스가 밀고 있는 차기 프랜차이즈가 지금 내 바로 뒤에서 버스에 탑승한 앤서니 볼피라면 지난 6년 동안 양키스를 대표했던 프랜차이즈는 바로 저 남자였다.
애런 저지.
2017년 그가 신인상을 타기 전까지 양키스의 마지막 신인상은 1996년의 데릭 지터였다. 또한 2022년 그가 MVP를 타기 전까지 양키스의 마지막 MVP는 2013년의 마리아노 리베라였다.
양키스가 자랑하는 코어4 이후로 처음 탄생한 양키스의 프랜차이즈.
그리고 회귀 이전의 삶에서 내가 MVP를 탈 수 없었던 강력한 이유 중 하나.
솔직히 저 녀석이 2022년에 62홈런을 치지만 않았어도 나의 34세 시즌에 기록했던 61호 홈런이 훨씬 대단한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물론 그런 걸로 녀석에게 앙심을 품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건 신기록을 세우지 못했던 나의 잘못이니까.
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스완!! 잠깐!! 잠깐만!!”
애런 저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가려는 나의 옷깃을 내 뒤에서 따라오던 앤서니 볼피가 급하게 붙잡았다.
“왜?”
“스완. 네 성격은 잘 아는데. 진짜 이번만 참자. 어? 내가 나중에 잘 이야기할 테니까.”
“무슨 소리야. 이해를 못 하겠네?”
“시치미 떼지 말고. 너 인마 게릿한테 들이박은 거 이미 다 알고 있어.”
“들이 박아? 내가? 언제?”
“야, 진짜. 선발 투수끼리야 좀 그럴 수 있거든? 근데 이건 아니야. 애런은 양키스에서 게릿이랑은 아예 입지가 다르다고.”
확실히 게릿 콜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그 커리어에 비해 좀 많이 무시를 받고 있기는 했다. 기본적으로 도밍고 로드리게스에게 좀 치인 면도 있었고. 하지만 애런 저지는 아직 야수들 사이에서, 심지어 팀 전체적으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고 있는 듯싶었다.
“아이참. 진짜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네.”
“모르기는!! 너 지금 애런한테 가서 비키라고 하려는 거잖아.”
“에이, 그런거 아니야.”
“아니라고?”
“당연하지. 지금 내 마음은 자리 잘못 찾은 사람에게 친절하게 자신의 잘못을 알려주려는 순수한 선의로 가득하다고.”
“헛소리하지 말고!! 오늘은 여기 내 자리 앉아라. 애런도 너랑 싸우려고 저기 앉은 건 아닌 거 알잖아. 투타겸업에 선발이 야수 버스에 탈 거라고 생각했겠냐?”
슬쩍 몇 칸 뒤의 애런 저지를 살폈다.
눈을 감은 채 귀에 이어폰을 꼽고 의자에 기댄 그 모습이 좀 고깝기는 했지만 그래, 아무리 선발이 무소불위라고 해도 이건 시범 경기고 애런 저지 정도의 짬밥에 로컬보이 출신의 프랜차이즈면 인정해줄 건 또 인정해줘야지.
“뉴욕 돌아가면 뉴욕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
“오케이.”
시범 경기 나의 마지막 등판.
완벽하게 정돈된 브라이트 하우스 필드의 마운드 위에 내가 올라섰다.
상대는 브라이슨 스토트.
필리스의 주전 유격수로 올 시즌 FA를 앞둔 명실상부한 메이저리그의 A급 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