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저길 봐라(6)
[최수원!! 역시 우리 최수원 선수!! 최근 요 몇 경기 홈런이 멈췄었는데, 또 이렇게 맥을 시원하게 뚫어버리네요.]
[오늘 이 경기가 지금 미국 전 지역에 방송이 되는 거거든요. 이게 뭐가 대단한 일이냐?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미국의 경우 우리나라랑 방송 체계가 좀 많이 다릅니다. 특히 일요일 경기는 경기 시작시간도 달라지고 여러모로 더 특별합니다. 아, 물론 우리 한국은 지금 월요일 아침 8시 20분입니다만, 원래라면 사실 어제 새벽 3시 정도에 했어야 하는 경기입니다.]
[그렇군요. 아무튼 등판 경기가 전국 중계가 되는 것만해도 대단한 일인데. 최수원 선수. 그 무대의 시작을 정말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장식하네요.]
[예전부터 느끼던 부분입니다만 이 선수 정말 해야 하는 순간에, 그리고 자신이 돋보여야 하는 순간에 항상 뭔가를 해주는 느낌입니다,]
[으음······. 그건 그냥 최수원 선수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나 뭔가 하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아······.]
***
경기가 계속됐다.
메이저까지 뚫고 올라온 투수는 이미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기량과 재능을 증명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심지어 오늘 메츠의 마운드에 선 레니엘 디아즈는 22살의 젊은 선발이다. 그 재능의 크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막대하다.
-따악!!!
[타일러 비트 쳤습니다!! 우중간!! 빠른 타구!! 안타입니다.]
그러나 레니엘 디아즈의 재능이 아무리 막대하다고 하더라도 그 상대 역시 마찬가지로 메이저리거다. 최수원에게 홈런을 허용하고 멘탈이 흔들린 그를 상대로 양키스의 타자들이 맹타를 휘둘렀다.
[애런 감독, 마운드를 방문합니다.]
[투수 교체는 아닌 것 같고. 레니엘 선수를 좀 진정시키려는 듯 싶네요. 아무래도 아직 젊다기보다는 어리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선수니까요.]
[1회 초. 점수는 벌써 2:0. 원아웃에 주자 1, 2루. 레니엘 디아즈에게는 너무 혹독한 전국 데뷔 경기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괜찮습니다. 메츠 역시 2점 정도는 충분히 뒤집을 만한 힘이 있거든요.]
[맞습니다. 이번 시즌 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은 득점을 얻고 있는 팀이 메츠거든요. 게다가 고작 1회 초에요. 경기 이제 막 시작된 겁니다.]
타석에 6번 타자인 오스틴 배틀이 올라갔다. 서비스 타임 4년 차의 나름 건실한 3루수다.
스트라이크.
볼.
그리고 파울.
레니엘 디아즈의 공이 점점 안정을 되찾아갔다.
다섯 번째.
-딱!!!
살짝 빗맞은 내야 땅볼.
메츠의 내야수들이 기민하게 움직인다.
6-4-3
깔끔한 병살타.
[1회 초. 양키스의 공격이 끝났습니다. 점수는 2:0. 최수원의 홈런으로 시작해서 조금 흔들리는 기색이 있던 레니엘 디아즈 선수에게 추가점을 뽑아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만 아쉽게도 큰 점수를 만들어내지는 못했네요.]
“자자!! 괜찮아. 가보자!!”
약간의 점수 차이.
메츠의 덕아웃이 기세를 끌어올렸다.
시티 필드의 마운드.
과거의 언젠가 메츠가 어메이징하고 양키스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시티필드의 원정 경기에도 메츠 팬보다 양키스 팬이 더 많았던 시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원정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까마득하게 높은 포수 뒤편의 관중석들 사이사이에 핀 스트라이프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마운드의 흙을 가볍게 밟았다.
느낌이 확실히 괜찮다. 이게 흙 자체는 다 같은 흙이지만 관리에 따라서 단단함이 조금 다르다.
KBO의 경우도 2020년대 들어서 두 개 팀 정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메이저의 흙을 수입해서 사용하는지라 질감이 제법 비슷했지만 그래도 원래 일본식의 부드러운 마운드를 사용했던 만큼 컨디셔너를 조금 과하게 뿌려서 마운드 상태를 부드럽게 유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시티 필드의 마운드 역시 그와 조금 비슷했다. 내가 빅리그에 와서 밟아본 마운드 가운데 가장 부드럽다.
타석에 메츠의 1번 타자 후안 로메로가 올라왔다.
이번 시즌 지금까지 무려 4할의 출루율을 보여주는 남자로 알렉스의 홈런에 매우 높은 비율로 1타점을 보태준 든든한 도우미다.
호세 트레비뇨가 미트를 내밀었다.
몸쪽 깊숙한 코스 속구.
-따악!!!
후안 로메로가 곧바로 그 공을 따라왔다.
하지만 높았다.
3루쪽 파울라인을 넘어가는 높은 파울볼.
일단 볼카운트 하나를 먹고 시작······.
[3루수 오스틴 배틀!! 이걸 잡아내네요. 앞선 타석의 병살타를 씻어내는 아주 좋은 수비입니다.]
[이거 시작이 아주 좋네요. 투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수비가 한 번씩 나와주면 상당히 든든하거든요.]
[맞습니다. 게다가 바로 이어지는 타자가 알렉산더 맥도웰 선수 아니겠습니까? 이 선수 진짜 무섭거든요. 최대한 앞에 주자가 없는 편이 투수 입장에서도 마음이 편할겁니다.]
운이 좋았다.
마린스였다면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비다.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마침내 알렉스가 올라왔다.
***
‘랜디 존슨은 40대부터 역사에 길이 남을 노익장을 발휘했지만 그럼에도 끝끝내 그렉 매덕스에 ‘버금’가는 투수가 됐을 뿐. 그렉 매덕스를 넘어서지 못했다.’
브라이스 하퍼의 그 말이 알렉산더 맥도웰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10경기 출장. 8경기 스타팅. 34타석 29타수 15안타 5볼넷. 0.517/0.588/1.276. 그리고 7홈런.
최수원이 지금 기록 중인 타격 성적이다.
투타겸업이 문제가 아니다.
이건 이미 타격만으로도 역사에 길이 남을 성적이었다. 남은 보름을 어지간히 망치지만 않는다면 이달의 선수는 이미 최수원의 것이나 다름 없다. 심지어 남은 경기에 남은 모든 탙석에서 죄다 삼진으로 물러나도 이달의 신인 정도는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1등을 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내가 압도적인 기세로 달려 나가거나, 혹은 2등이 나보다 못하거나.
결과적으로는 같은 말이겠지만 그 마음가짐과 과정이 완전 다르다.
최수원이 놀라운 활약을 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알렉산더 맥도웰은 초조한 마음을 가졌었다. 그의 ‘라이벌’인 자신은 그 라이벌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서 최수원이 팀 동료인 레니엘 디아즈의 초구를 잡아당겨 담장을 넘겨버리는 것을 목격했을 때. 알렉산더 맥도웰은 자신의 가슴이 크게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역시 수원. 이 몸이 라이벌로 인정한 남자답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활약은 그를 강하게 압박했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곳에서의 대단함은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알렉산더 맥도웰은 그런 남자였다.
2등이 나보다 못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누군가가 자신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즐긴다. 언젠가는 자신 역시 그가 달려가는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방망이를 쥐고 타석에서 최수원을 바라봤다. 모자를 고쳐 쓰고 글러브 안의 공을 움켜쥐는 녀석의 모습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초구. 높은 코스. 공이 붉었다.
탑스핀의 구질인 커브라는 뜻이다.
-뻐엉!!!
그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스트라잌!!!”
[존에 살짝 걸치는 낙차 큰 커브. 알렉산더 맥도웰. 방망이 휘드리지 않습니다. 볼카운트 0-1.]
[오늘 최수원 선수의 공이 굉장히 좋네요. 저런 공은 사실 알고도 제대로 공략하기 힘든 공이거든요.]
요새 심판들이 커브를 조금 더 후하게 잡아주는 경향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방금 공도 심판에 따라서는 스트라이크 콜이 나오지 않았을 공이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최수원의 공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했다. 바깥쪽 높은 코스에서 뚝 떨어지면서 외곽으로 살짝 빠져나가는 커브라니.
알렉산더 맥도웰이 방금의 코스를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오늘 여기까진 스트라이크.’
두 번째.
무릎 높이 몸쪽 깊숙한 공.
살짝 깊었다.
-뻐엉!!!!
99.1마일.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1.
‘헤이. 수원. 네가 이걸 불만을 가지면 안 되지. 불만은 오히려 첫 번째 공 스트라이크 잡아 준 내가 가져야 하는 거야.’
양손으로 방망이를 꾹 눌러 잡고 다시 타석에서 다음 공을 기다렸다. 방금 두 개의 공은 참으로 기분 좋은 공들이었다. 그가 처음 수원을 봤던 것이 벌써 3년 전이다. 그 시간 동안 알렉산더 맥도웰은 정말 눈부시게 발전했다.
‘물론 그때도 나는 나이를 뛰어넘은 천재였지만.’
하지만 성장한 것은 최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성장은 타자로서의 성장만이 아니었다. 아니, 압도적인 타격 성적에 가려졌지만, 성장 자체만 따져본다면 투수로서의 성장이 더 도드라질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깔끔한 폼. 하지만 그 폼과 괴리된 느낌의 묘한 팔의 스윙이 독특한 디셉션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어렵지 않다.
쳐낸다.
알렉산더 맥도웰의 방망이가 최수원의 공을 두들겼다.
-따악!!!!
1루 내야 관중석 최상단을 직격 하는 거대한 파울.
[100.7마일의 빠른 공!! 최수원 선수 이번 시즌 들어서 가장 빠른 공입니다.]
[이 선수도 작년 기록을 보면 최고 구속이 101마일 정도이긴 한데 이번 겨울 동안 상당한 벌크업을 했거든요. 게다가 나이도 고작 20살밖에 되지 않습니다. 구속 상승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뜻이죠.]
마운드의 최수원이 로진백을 몇 차례 매만졌다.
알렉산더 맥도웰이 장갑을 다시 동여매고 배트를 강하게 움켜쥔다.
볼카운트는 1-2.
매우 불리한 카운트였다. 하지만 알렉산더 맥도웰의 얼굴에는 초조한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충분히 공격적인 투수였다. 그가 지난 KBO에서의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은 자신의 공은 충분히 ‘믿을 만하다’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 선 알렉산더 맥도웰은 특출났다.
무작정 존에 공을 꽂아 넣는다? 그건 자신의 공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건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던지는 공에 불과했다.
지금 그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은 무엇인가.
최수원이 그것을 선택했다.
초구와 흡사한.
하지만 그보다 아주 미세하게 더 빠져나가는 커브.
코스의 차이가 아니었다.
차이를 둔 것은 공을 쥔 악력.
낙폭의 차이를 통하여 공을 더 빠트리겠다는 실로 터무니없는 난이도의 도전이었다. 조금만 실수를 한다면 밋밋한 공이 되거나 터무니 없이 빠지는 공이 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라이벌을 만났다며 즐거운 마음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는 저 알렉산더 맥도웰을 속여넘기려면 그 정도의 모험은 필요하다. 최수원은 그렇게 판단했다.
둥근 공이 최수원의 손을 빠져나갔다.
그 공은 수원이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최수원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며 그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이었다.
초구와 흡사한 궤적.
그 붉은 공을 바라보며 알렉산더 맥도웰이 판단했다.
‘초구와 흡사하게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이다.’
3차원의 스트라이크 존이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2차원적인 면으로 본다면 존에서 벗어나는 공이겠지만 3차원적인 공간으로 봤을 때는 존의 어딘가를 스쳐 가는 저 커브를 쳐내기 위해서는 타격의 포인트를 조금 더 잡아당길 필요가 있었다.
그의 방망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야구공의 실밥이 만들어낸 공기의 흐름이 공의 움직임을 바꿨다.
완벽?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그 궤적은 공을 던진 최수원이 머릿속에 그려냈던 최선의 그것에 한없이 가까웠다. 그래, 바깥으로 조금 더 움직이는 그 어느 지점에서도 존을 지나가지 않는 완벽한 유인구였다.
알렉산더 맥도웰이 어느 순간 깨달았다.
‘망할.’
분명 그 판단은 고등학교를 건너뛰고 대학리그를 평정하며 남들보다 2년이나 빠르게 드래프트 됨을 통하여 얻어낸 알렉산더 맥도웰의 ‘경험’. 그리고 그가 타고난 ‘재능’의 결정체였다.
‘늦었다.’
그리고 그 위에 초인적인 균형감각과 순발력, 협응력이 더 멀리 빠져나가는 공을 향해 방망이의 궤적을 수정했다.
-따아아아악!!!
3살? 4살?
정확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선물해준 아동용 글러브를 처음 손에 끼웠던 그 순간.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던 천재가 쌓아 올린 거대한 노력의 시간이 그 방망이에 ‘완력’이라는 힘을 더했다.
최수원의 손가락이 타구를 가리켰다.
시티필드의 개떡 같은 우측 담장.
쭉쭉 뻗어 나가는 타구를 향하여 타일러 비트가 달려나갔다.
늦지 않았다.
타일러 비트는 그 타구를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저 높은 곳으로 떠오른 타구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 마치 자신만이 이 지구의 중력에서 자유롭기라도 한 것처럼.
타일러 비트는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면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멋지게 담장을 밟고 뛰어올라 팔을 쭉 뻗었다.
하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
여전히 부족했다. 설사 그의 팔이 10cm쯤 더 길었다고 하더라도 부족했을 만큼.
1회 말.
알렉산더 맥도웰이 최수원을 상대로 시즌 9호 홈런을 기록했다.
마운드의 최수원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