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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부수는 플레이어-4화 (4/170)

<4>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4 > Lv.5]

[요정들에게 일어난 문제를 알아내고, 해결하십시오.]

[수단과 방법은 어떠한 것이든 무관합니다.]

3층과 4층을 가볍게 클리어한 성진이 도착한 곳은 산과 숲으로 이루어진 스테이지.

산이 많은 대한민국에선 흔히 볼 수 있었던 지형이었다.

“요정들이 나온다던 층이 이곳인가.”

-네 맞습니다. 이곳은 저희가 성좌에게 붙잡히기 전까지 살던 곳입니다.

성진의 물음에 요정의 영혼이 답했다.

5층에 도달한 성진은 이전과는 다른 넓은 스테이지에 우선 주변 지형부터 살폈다.

스테이지의 설명은 간단했다.

문제를 알아내고 해결하라.

방법은 무관하다.

이는 단순히 문제파악과 해결능력을 보는 것 외에도, 다양한 선택지 아래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살펴보고 플레이어의 성향 자체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 요정들을 다 제거해 버리는 것도 방법 중 하나겠지.’

문제를 제기할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으니 그것 또한 해결방법으로 인정한다.

성좌란 그런 놈들이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어떤 문제인지도 잘 알고 있겠군?”

-네, 이곳은 저희가 요정향 에렌디아의 멸망 이후 대피용으로 만들어낸 무수한 간이차원 중 하나입니다. 그러다 보니 안정적인 완전한 차원과 달리 외차원에서 흘러들어오는 부유물들이 많았죠.

정식 차원과 달리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아공간에 가까운 차원.

지구나 요정향 같은 곳들이 커다란 배라면, 이곳은 일종의 구명보트였다.

“말하자면 숨어다녀야 하는 와중에 이상한 게 배에 올라탔다는 소리군.”

-맞습니다. 그런데 은인께선 어떻게 요정들에 대해서…….

“예전에 에렌디아에 신세진 적이 있다.”

-과연! 지금은 쇠락했지만 요정향의 빛은 과거 수많은 차원을 밝게 비추고 있었지요.

요정족은 천상의 성좌들과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종족이다.

대피용으로 인공적인 차원을 만들어낼 정도의 문명.

요정의 자부심은 성진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졌다.’

천상의 성좌들은 그 하나하나가 막강한 힘을 지닌 신성존재.

그러한 괴물들이 별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것이 바로 천상이었다.

‘놈들을 쓰러뜨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위대한 문명이 아니라 절대적인 힘이다.’

“이쪽이군.”

잠시 명상하듯 마력의 흐름을 살핀 성진은 그 자리에서 부유물의 방향을 파악하고 그쪽으로 출발했다.

-저기 요정 마을에는…….

“방식마저 참견받을 생각은 없다.”

부웅!

제자리 도약만으로 성진의 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몇 번의 도약을 반복하자 산을 뛰어넘었다.

거기에 마력은 일절 사용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힘이……?

요정족은 마법의 힘으로 발전하여 강대한 마도문명을 이룩했다.

그러나 성진의 힘은 마법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였다.

마법을 쓴 것도 아닌데 인간의 몸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온단 말인가?

영혼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성진은 굳이 이유를 설명해 주진 않았다.

“저건가.”

산을 몇 개 넘자 성진의 미약한 마력에도 몬스터의 존재가 잡히기 시작했다.

몬스터는 특정 개체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다.

정확히는, 특정 개체가 몬스터를 계속해서 생산해 내고 있는 꼴이었다.

“저놈이 주변의 동식물들을 몬스터로 변이시키고 있군. 단순한 문제라 다행이야.”

-자, 잠깐만요. 그냥 부수면 주변으로 오염이 확산……!

“그럼 파편까지 다 부숴 버리면 된다.”

산꼭대기에서 크게 도약한 성진이 기슭에 위치한 몬스터의 모체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착지와 동시에, 미사일이 떨어져 내린 것과 같은 폭발이 일어났다.

대량의 토사가 하늘을 향해 치솟으며 하늘을 가렸다.

“다행이군. 나무가 많아서 산사태는 안 나는 모양이야.”

성진은 흔적도 남지 않고 터져 버린 마수의 모체 위에서 부유물을 집어 들었다.

“이걸 가져다주면 되는 거겠지.”

외차원의 부유물은 바깥 세계에서 이리저리 오염되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여기에도 그럭저럭 마력이 들어 있었지만, 이런 걸 먹으면 성진 자신 또한 오염된다.

요정들에게 가져다주면 알아서 정화할 테니 문제는 해결되리라.

“그럼 그 전에.”

성진은 주변에 살아남은 몬스터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중요한 NPC가 아닌 만큼 별로 강력한 영혼들도 아니었으나, 그런 영혼도 다수가 모이면 힘이 된다.

“너희들을 해방시켜 주마.”

이어서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갈(喝)!!!”

강렬한 폭풍이 성진으로부터 뿜어져 나갔다.

마력은 일절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물리적 ‘기합’.

성진의 살기가 담긴 기합은 산천초목을 뒤흔들고 스테이지의 적으로 등장한 몬스터를 일제히 심장마비 시켰다.

몬스터에게서 흘러나온 영혼들은 탑으로 회귀하지 않고 성진에게로 빨려 들어왔다.

-당신은 도대체…….

성진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영혼으로 회복된 힘을 파악했다.

‘아직도 한참 부족하군.’

그마저도 회복한 힘의 대부분은 관리자인 천사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노예로 부리고 있는 영혼들에게 많은 힘이 남아 있었을 리는 없었으니까.

‘갈 길이 멀군.’

성진은 영혼의 인도에 따라 요정마을로 들어섰다.

-이, 이건……!

그곳에 펼쳐진 광경은, 몬스터로만 노역하던 영혼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었다.

* * *

성진은 1층부터 빠르게 탑을 오르고 있었으나, 1,201회차 플레이어들은 그보다 빨랐다.

그들은 애초에 탑의 공략법을 모두 숙지하고 20층까진 화력으로 밀어버릴 장비를 챙겨 들어온 이들이었다.

그에 반해 성진은 클리어 자체는 빠르나, 스테이지 내부에 등장하는 모든 영혼을 일일이 해방하면서 오르고 있었기에 속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조차 엄청난 속도였으나, 5층에는 이미 그보다 먼저 올라온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남태수는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용사님, 이것 좀 드셔보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남태수는 요정이 내미는 술을 얼떨떨하게 받아들었다.

올해로 서른하나.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은 그에게 이런 미녀의 관심은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5층은 플레이어가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이종족을 마주하는 곳.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이곳에서 한 달 이상 머물며 공략을 위한 기반을 다지곤 했다.

‘요정족은 플레이어에게 호의적이니 최대한 친해져서 보상을 키워야 하는데…….’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남태수는 미남미녀뿐인 요정들을 상대로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가 없었다.

요정들이 보여주는 이유 없는 호의는 오히려 남태수를 불안하게 했다.

사회에서라면 말도 못 붙일 미모의 종족이 자신에게 헌신적으로 구는 모습은 남태수로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반면 다른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래, 이게 플레이어지. 바깥에서 NPC 취급당하던 생활도 끝이야. 나도 이젠 플레이어라고!”

현대 사회에서 플레이어들은 무소불위의 귀족 그 자체였다.

이곳의 플레이어들은 아직 5레벨에 불과하면서도 5주 차 훈련병이 병장 기분을 내듯, NPC들을 상대로 왕처럼 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남태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반갑네 태수 씨. 나는 인페르노 클랜의 대니 김이라고 해. 물론 이름이야 머리 위에 떠 있겠지만, 김이라고 불러줘.”

“예? 예에…….”

“아무리 세계정부 아래 하나 된 시대라곤 해도 인종별, 출신별 차별이 없다곤 할 수 없지. 보아하니 태수 씨는 토종 한반도 출신인 것 같은데 어때?”

대니 김의 손짓에 남태수의 옆에 앉아 있던 요정 NPC가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요정 여인은 은근히 남태수에게 몸을 밀착시키며 달라붙었다.

허나 그것이 요정의 본의는 아니라는 것을 남태수는 알고 있었다.

‘이런 요구는 좀 들어주지 말라고.’

5층의 NPC들은 플레이어에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내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호의적인 NPC에게 정보나 아이템을 얻는 건 탑의 흔한 공략법 중 하나였다.

남태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NPC에게 접대를 시켜 파티원을 구한다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덕분에 그는 아까부터 이 끈적한 분위기가 불편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같은 회차 사람들끼린 한동안 스테이지에서 얼굴 맞대고 살아야 한단 말이지. 그런데 저길 봐.”

대니 김이 가리킨 곳에는 다른 1,201회차 플레이어들이 보였다.

그들은 끼리끼리 나뉘어 정보를 교환하거나,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 회차에는 백인, 흑인, 라틴계는 많아도 우리 같은 동양계는 적단 말이야. 이래서야 우리 동양인들끼리 잘해 보는 수밖에 없지 않냐고. 안 그래?”

대니 김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와 함께하는 다른 동양계 플레이어들이 잔을 들어 올리며 호응했다.

대니 김은 일찌감치 5층에 올라와 1,201회차의 동양계 플레이어들을 끌어들이는 중이었다.

물론 진짜 동료가 필요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소속 클랜도 없는 떨거지들. 이런 놈들은 적당히 쓰다 버리면 뒤탈도 없고 깔끔하지.’

세계정부가 탑 안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사후대처가 가능한 정도.

탑 안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정확한 수사가 불가능했으며, 목소리 큰 쪽이 이기는 수준이었다.

이렇다 보니 실크로드의 상인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듯, 플레이어들도 여기저기 소속되어 움직이는 편이었다.

“말씀은 알겠는데…….”

“아, 물론 태수 씨도 이것저것 알아봐야지. 함께하잔다고 덥석 물면 나도 실망했을 거야. 파티는 실력도 보고, 인성도 보고 신중하게 고르는 게 맞지.”

대니 김은 앉은 채로 상반신을 쭉 내밀고는 손으로 입을 가려 보는 눈들을 차단하고 말했다.

“인페르노 클랜은 불과 광채의 산하 클랜 중 하나라서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정보들이 많지. 예를 들어 여성 NPC들의 정보라든가.”

남태수의 눈이 자연스럽게 옆에 앉은 요정 NPC에게로 돌아가자 대니 김은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여기야 NPC들이 기본적으로 순종적이지만 다른 층은 아니잖아? 공략도 바빠 죽겠는데 까칠한 NPC들 길들이고 다니기도 쉽지 않지. 우리랑 함께하면 진행이 수월한 건 물론, 층마다 NPC 미녀들을 갈아끼며 다닐 수도 있다는 거야.”

“아, 네…….”

“어디 층마다 바꿔 타는 게 단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세 명이고 네 명이고 얼마든지 찾아줄 수 있지. 영웅호색이라잖아. 능력만 입증하면 사소한 것들은 얼마든지 클랜에서 대령해 줄 수 있어.”

대니 김이 그렇게 말하자 남태수에게 음식을 나르기만 하던 다른 두 요정이 요염하게 웃으며 그에게 달라붙었다.

‘얘는 얼굴만 보면 내 딸뻘인데…….’

남태수는 내심 기겁했다.

그에게 달라붙은 요정 중 하나는 중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모습이었다.

비교적 노안인 남태수의 얼굴과 동안인 요정의 앳된 모습이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어린 쪽은 취향이 아닌가?”

대니 김은 킬킬대며 요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설마 태수 씨 아직 총각인 건 아니지?”

대니 김의 말에 다른 동양계 플레이어들이 웃었다.

불편한 광경.

더더욱 불편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NPC들은 플레이어들의 말이라면 순종적으로 따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남태수는 문득 성진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양반은 사도고 뭐고 다 쳐부쉈는데.’

자신은 같은 신규 플레이어에게도 이렇게 얕보이고 있었다.

남태수는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보기로 했다.

“주성진…….”

“응?”

“혹시 주성진이라는 사람 아시나요?”

남태수는 재능이 없는 대신 탑에 들어오기 전에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 보기로 했다.

자신의 손이 닿는 선에서 다른 플레이어나 유망주들을 조사한 것도 그 일부.

그러나 그가 조사한 내용 중 주성진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만한 힘이 있으면 알려질 법도 한데.’

“처음 듣는 이름인데? 우리 회차 사람이야?”

대니 김은 동기들의 이름조차 확인해 두지 않았는지 딴소리를 했다.

그래도 유명 클랜 소속이라면 자신과는 다른 정보가 있을지도 모른다.

남태수는 그런 생각으로 말을 더 이어가려 했으나,

파악!

벽을 뚫고 튀어나온 손이 대니 김의 목줄을 틀어잡았다.

손은 다시 바깥으로 사라지며 대니 김을 끌고 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했던가.

대니 김이 끌려가며 박살난 벽면의 구멍으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NPC가 아니라 플레이어였군.”

호랑이도 도망갈 악마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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