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5층의 스테이지는 인간과 오크의 전쟁이지만, 딱히 종족의 명운을 건 대전쟁은 아니었다.
여러 종족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간 영주와 오크 영주끼리 땅따먹기를 하다 벌어진 영지전이었던 것.
그러니 어느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죽자고 싸우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애초에 성진이 있는데 전멸이라니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방에서 울려대는 경보음이 남태수를 당황스럽게 했다.
“요새가 함락되면 스테이지 실패인데?”
공략이 실패해서 탑 밖으로 쫓겨나면 그의 인생도 끝.
상황이 어찌 되었든 최우선 사항은 일단 이곳 요새를 지키는 것이었다.
-어쩌실 겁니까?
“외벽으로 가자. 오크군을 나 혼자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일단 막아봐야지!”
그 말에 즈덴다가 반응했다.
“동행하겠습니다.”
“예?”
“남태수 씨는 지금 탈옥범이 되어있는 상태 아닙니까?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제가 동행하는 편 나을 겁니다.”
어스름 수도회 내에서 수녀원장직을 맡고 있는 즈덴다라면 유사시에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한 남태수는 즈덴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함께 요새의 외벽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목격한 것은 전멸한 인간군과, 마찬가지로 전멸한 오크군.
“왔나?”
그리고 전장에 홀로 선 성진이었다.
* * *
두 군대의 전멸로부터 조금 전.
전장 한복판에 떡하니 버티고 선 성진은 주위의 낌새가 이상해지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내 두 군대의 진영이 조금씩 펼쳐지더니 성진을 포위하듯 감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곧 대표자로 보이는 플레이어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반갑습니다 주성진 씨.”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지?”
“별 건 아닙니다. 그저 저희들의 기여도를 확보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요?”
그는 두 군대를 등에 업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욕심을 너무 많이 부렸습니다.”
“욕심?”
“다른 사람들의 보상을 남겨주지 않고 혼자 독식하려 하시니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너희들의 기여도를 보장해달라 이건가?”
“아니요. 지금 당장 스테이지 도전을 포기하고 탑을 나가주십시오.”
25층의 플레이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랬다.
“당장 저희들이 25층에서 힘을 합쳐 당신을 몰아낸다고 해도, 다른 층에서 만나면 보복을 당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예 탑을 나가주십시오. 그러지 않는다면 NPC 군대와 함께 여기 있는 모두가 당신을 공격할 겁니다.”
“NPC들은 어떻게 포섭했지?”
“25층의 설정상 저희는 전쟁을 위해 불려온 용병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당신같이 강력한 존재가 나타나면 그 보상은 어떻게 해줘야 할까요?”
성진 혼자 전쟁을 끝낸 것이나 다름없는 만큼, 영지전이 끝나면 성진에게 엄청난 보상을 해줘야 하리라.
그 보상을 준비하는 문제는 둘째치고, 어떻게든 준비한 그 보상이 성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홀로 군대를 몰아낼 수 있는 초인이 날뛰면 요새의 NPC들이 막을 수 있을까?
“NPC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간단한 일이지요. 상대 영지를 빼앗기 위해 영지전을 벌였는데, 정작 당신의 보상금으로 더 많은 돈을 내야 할 판이라면? 배보다 배꼽이 커질 판이니 당신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NPC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진에게 가로막힌 오크군도,
성진에게 보상금을 내줘야 할 인간군도.
비즈니스를 위한 이 전쟁에서 성진의 존재를 반기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저희들이 두 군대의 지휘부와 이야기를 나눴지요. 두 군대의 힘을 합쳐 당신을 몰아내고, 당신이 없는 상태로 다시 전쟁을 진행하자고.”
정의가 아닌, 돈을 위한 전쟁.
영지전을 일으킨 NPC들은 설정상의 이해관계에 따라 성진을 배제시키자는 25층 플레이어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원망은 마십시오. 다 먹고 살자고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플레이어 대표에게 성진이 해줄 말은 정해져있었다.
“해봐.”
“…… 정말로 당신 혼자 여기 있는 모두와 싸우겠다는 겁니까?”
“얼마든지.”
“미쳤군.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대화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대표는 그렇게 말하며 진영으로 돌아갔다.
대화는 무용.
그렇다면 이어질 일은 하나뿐이었다.
“놈은 강하다! 다가가지 말고 멀리서 쏴!”
한 사람과 두 군대의 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탑은 오른 층수에 따라 레벨이 정해진다.
그 말은 곧 레벨 차이가 큰 이들이 같은 구간에서 만날 일이 없다는 뜻이며, 어느 플레이어 한 명이 스테이지를 압도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같은 스테이지에 있는 이들끼린 레벨도 같다는 거니까.
수십 명의 플레이어, 그리고 2만의 군대를 등에 업은 이들은 자신들이 한 사람에게 패배할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추살대를 쓰러뜨린 걸 보면 PK특화 직업에 관련능력도 상당하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숫자 앞에는 장사 없다.”
액션영화 속 킬러 주인공이라도 만 단위의 적과 평야에서 맞붙어 이길 순 없었다.
“20층에서는 무슨 NPC 사령술사의 언데드 군단을 몰고 왔다지? 하지만 이번엔 NPC들도 전부 적인데 어쩔 거지?”
20층에서의 일은 커뮤니티에도 알려졌지만, 그 내용을 전부 믿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그대로 적어도 믿기 힘든 내용에, 혼란스러운 상황이 더해져 사실 그대로 전하기도 힘들었기 때문.
25층의 플레이어들은 괴담에 가까운 그 이야기를 적당히 걸러 들었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궁병들이 쏘아 올린 화살이 하늘을 덮었다.
이어서 화살비가 성진에게 내리꽂히는 순간.
파앙!
회오리치는 충격파와 함께 모든 화살이 일제히 튕겨 나가듯 원래 자리를 향해 되돌아갔다.
“컥!”
“으아악!”
“놈에게 활은 통하지 않는다! 궁병대 후열로!”
몇몇 궁병이 되돌아오는 화살에 맞는 와중에도 그들은 진형을 유지했다.
NPC 군대는 진형을 갖추고 차근차근 성진을 압박하길 원했다.
‘어차피 저놈을 쓰러뜨린 다음에는 다시 영지전이 이어질 거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 병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지.’
승리가 확실하다고 해도 손해를 보는 일은 싫다.
그러나 성진은 그들이 느긋하게 쉬도록 놔둘 생각이 없었다.
“마법사대 앞으……!”
그것이 NPC 지휘관의 유언이었다.
수백 미터의 거리를 단번에 도약한 성진은 병사들의 머리 위를 날아 지휘관의 머리통을 군홧발로 차버렸다.
<영혼 해방자(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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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지휘부의 깃발을 빼앗아 주변을 휩쓴다.
인정사정 보지 않는 성진의 손속에 시스템 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카르마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영혼 해방자(희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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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미친……!”
플레이어들은 NPC가 실시간으로 갈려 나가는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피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인간이었던 것들의 잔해가 비처럼 쏟아졌다.
철퍽!
튜토리얼의 좀비 층을 지났음에도 아직 고어한 광경에 내성이 없던 몇몇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얼굴에 육편이 튀자 선 채로 졸도했다.
“광전사였나! NPC들을 믿지 마! 잡졸은 저놈에게 포션이나 다름없다! 흡혈하기 전에 플레이어들이 막아야……!”
파티 리더 경험이 있는 몇몇 플레이어들이 상황에 대응하려 했으나 플레이어라고 성진의 손을 피할 순 없었다.
‘헉!’
성진과 눈이 마주친 순간,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다가온 성진의 손이 플레이어의 목줄기를 잡아챘다.
“이번엔 내가 제안할 차례군. 지금 당장 탑을 포기하고 나가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시, 싫다면……?”
성진은 그 물음에 대답 없이 붙잡은 플레이어를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금속 갑옷으로 중무장한 성인 남성이 야구공처럼 하늘을 날았다.
잡을 것도 없는 평야.
25레벨 플레이어로서는 착지할 방법이 없어 이대로 떨어지면 죽는 상황이었다.
“포기! 포기!!!”
땅에 닿기 전 포기를 선언한 플레이어는 그대로 탑 밖으로 이동되었다.
성진은 협박도 설득도 필요 없는 그 단순한 행위를 계속해서 반복했고, 하나의 군대와 플레이어들이 전멸하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인간군을 궤멸시킨 성진은 그대로 도망치지도, 끼어들지도 못하고 상황을 지켜만 보던 오크군을 향해 돌아섰다.
“여긴 제한시간을 버티는 스테이지이니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선 그쪽도 수를 줄여놔야겠지.”
그리하여 소식을 듣고 남태수가 뛰어나왔을 때는 이미 성진만이 전장에 홀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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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은 멀리서도 남태수를 발견하고
가볍게 도약해 그의 앞까지 단박에 날아왔다.
“감옥에서 볼 일은 다 본 모양이지?”
“어, 음, 오해는 풀었죠? 더 큰 오해가 생긴 것 같긴 하지만요.”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진이 이 스테이지에서 전장을 홀로 틀어막고 버티자, 기여도 독점에 화가 난 플레이어들은 NPC 군대를 부추겨 성진을 공격했다.
반면 어차피 이번 층에서 보상을 챙기긴 글렀다고 생각한 몇몇 플레이어들은 전장을 떠나 요새 내에서 다른 퀘스트를 찾고 있었다.
이번 소란에 남태수와 함께 상황을 보러 나왔던 그 플레이어들은 성진과 눈이 마주치자 기겁을 하며 물러났다.
“저, 저희는 반대했어요!”
“너희들에겐 관심 없으니 썩 꺼지도록.”
그 말에 다른 플레이어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남태수는 같이 온 즈덴다의 눈치를 살폈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성진을 멍하니 보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나저나 다행이군. 요새만 멀쩡하면 군은 전멸해도 괜찮았던 건가.”
이미 남태수한테 지구의 공략 실패사례들을 들으며 실패조건을 확인해 두긴 했지만, 25층의 군대를 전멸시키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에요? 덕분에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테러리스트가 되어버렸는데!”
“어차피 속았을 뿐인 일반인이라도 성좌의 노예인 건 똑같다. 그놈들의 시선을 일일이 신경 쓰지 마라.”
“시선이 문제가 아니라 현상수배가 걸린 게 문제라고요 저는…….”
그들이 10층이나 20층에서 벌인 일들은 온갖 와전된 소문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세계정부가 성진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던 것도, NPC 무르무르가 날뛴 것도 일반 플레이어들은 사정을 알 방법이 없었으니까.
반면 오늘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수많은 목격자들을 통해 비교적 정확히 퍼져나가리라.
“알 바 아니다.”
[스테이지 클리어.]
[퍼펙트 클리어!]
[기여도 순위]
- 88%
- 6%
(소수점 이하의 기여도는 표기되지 않습니다.)
[기여도 보상을 추가 지급합니다.]
[스킬 포인트를 추가 지급합니다.]
“그보다 30층에 대한 대비나 해 두도록.”
“30층이면 요정향이요? 거긴 왜요?”
“거기서 찾아야 하는 영혼이 있다.”
성진은 사로잡은 천사의 영혼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담당구역 내의 영혼목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성진이 잘 아는 이름도 적혀 있었다.
“요정공주를 만나러 간다.”
성진을 지원하는 여덟 왕.
그중 요정왕 맥글로리 에렌디아의 직계혈족이 이 탑에 갇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