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티타니아는 강대한 힘을 가진 반신인 것 치고 미숙한 요정이었다.
그녀는 요정왕의 대체품으로 만들어졌고 그 말은 그녀가 요정왕의 부재, 즉 요정왕이 성좌에게 당할 경우를 상정하고 만들어졌다.
따라서 티타니아의 존재에는 하나의 전제가 필요했다.
요정왕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대를 쓰러뜨릴 대체품.
대체품이 원본과 똑같아서는 부족하다.
즉, 요정공주는 요정왕을 뛰어넘도록 설계되었다.
이 말만 들으면 처음부터 완벽해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요정왕이 티타니아를 최대한 완벽하게 만들었다면, 그녀는 요정왕의 한계 내에서 완벽해졌으리라.
허나 그녀는 요정왕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성장의 가능성을 위해서는 변화를 허용해야 하고, 변화를 허용한다는 것은 미숙함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잠재력을 늘리기 위해 온갖 변수를 박아 넣었다는 뜻.
덕분에 그녀는 완전히 백지의 상태로 태어나 걷는 것부터 하나씩 배워나가야만 했다.
배가 고파도 굶어 죽을 때까지 울지도 않던 아기를 데려다 밥을 먹는 법부터, 웃는 법도, 우는 법도, 살아가기 위한 것은 모두.
모두 성진이 가르쳤다.
그러니 성진이 그녀에 대한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알고 있겠지만 너는 앞으로도 여기 남아 있어야 한다.”
“네, 그렇겠지요. 제가 멋대로 이곳을 이탈하면 바로 성좌들에게 신호가 갈 테니까요.”
티타니아는 평범한 영혼들과는 취급부터 달랐다.
관리자들을 아무리 잘 족쳐놔도 티타니아의 영혼에 이상이 생긴다면 성좌들에게 직통으로 신호가 올라가리라.
“이곳에 남을 네게 부탁할 것이 있다.”
이제부터는 세계정부와도 전쟁이다.
“너는 이곳에서 지금부터 그 어떤 플레이어도 31층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다오.”
새로운 플레이어의 유입을 차단한다.
“나는 이대로 탑의 끝에 올라 천상의 좌표를 손에 넣겠다. 네 해방은 그때까지 미뤄지겠지만 이곳에서 기다려주길 바란다.”
성진의 말에 티타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옆에 함께 있던 남태수도, 무르무르도 알아채지 못한 작은 차이.
명령이 아닌 부탁.
티타니아에게 성진은 유일한 것이자 모든 것이었지만, 성진에게는 아니었다.
아이가 부모의 관심을 바라듯 그녀는 내심 성진 또한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원했다.
그러나 전사로서 티타니아를 만난 성진은 항상 전사로서만 그녀를 대했다.
결국 성진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그녀에게 부탁한 적 없었으니, 죽고 나서야 처음으로 성진의 부탁을 들을 수 있게 된 것.
생각지도 못했던, 그러나 바라 마지않던 그 변화에 티타니아는 나이에 걸맞게 어린아이처럼 환한 웃음을 지었다.
“네, 기꺼이.”
처음부터 그거면 충분했으니까.
“선생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릴게요.”
* * *
탑의 바깥.
성진의 일격에 탑의 하늘이 깨져나가며 지구의 하늘이 드러났을 때.
스테이지 내에 있던 이들이 바깥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바깥에서도 스테이지 내부를 관측한 인물이 있었다.
“다나.”
신시아 스펜서.
리처드 카이만에게 이번 일의 해결을 맡긴 후, 자신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잠깐 동안 열린 30층 내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보인 것은 그녀의 동생인 다나와 추살대를 쓰러뜨린 두 테러리스트.
그리고 처참히 박살나고 있던 리처드 카이만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사도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새로운 사도의 등장인가.”
이것만으로는 그녀의 동생이 도대체 무슨 사건에 휘말린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평범한 상황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불과 광채의 사도가 쓰러졌다. 이는 나쁘지 않은 일.”
성좌들은 서로 협력관계이면서 경쟁관계이기도 했다.
성좌간의 관계는 당연히 사도들에게도 이어졌다.
불과 광채의 사도가 리타이어되었다면 그녀의 성좌인 침묵과 광기의 지분률이 그만큼 올랐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신시아로서는 딱히 그에 대해 복수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다나가 잘 지내는 것 같으니 이건 좋은 일.”
매국노끼리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해 싸우는 셈이었으나 신시아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신시아의 성과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일족이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을 테니까.
하나뿐인 그녀의 가족은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동생이 자신을 원수로 여긴다고 해도 성좌들에게 영혼까지 잡아먹히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하지만 다나가 속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사도와 얽혀있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
신시아는 최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영상을 계속 돌려보았다.
강렬한 빛 때문에 이것만으로는 정확하게 내부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스테이지의 구멍은 비록 일시적인 것이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 그렇다면 최소한 상대는 권능스킬을 이용한 전투가 가능한 수준의 사도라는 것.”
신시아는 혹시라도 성진이 사도가 아닐 가능성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사도인 그녀는 성좌의 힘을 잘 알았고,
그만큼 인간의 무력함도 잘 알았으니까.
‘보고할 필요는…… 없겠지.’
신시아는 따로 이 일을 그녀의 성좌에게 보고하지 않기로 했다.
침묵과 광기.
그녀의 주인은 불러도 대답 없는 침묵의 성좌였으니까.
고고한 밤하늘의 별은 인간 세상의 일 따윈 상관없이 저 하늘에서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단지 그 빛은 빛의 속도로도 수십 년을 가야 할 만큼 떨어져 있으면서도, 한순간에 지상의 모든 것들을 태워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기도 할 뿐.
“우선 다나를 이 자들에게서 떼어놓는다.”
신시아는 영상 속 두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30층 안의 인물들도 찢겨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그중 한 명과 눈이 마주친 기분이었으나 그럴 리는 없으리라.
이 영상은 인공위성으로 촬영된 것이었으니까.
* * *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30 > Lv.31]
탑의 31층부터 49층까지는 명예의 전당이라 불리는 거대한 하나의 스테이지로 이루어져 있었다.
31레벨부터 49레벨까지의 모든 플레이어들은 이곳에 머물며 전당 내의 챔피언을 하나 쓰러뜨릴 때마다 1레벨씩 올랐다.
말하자면 보스전만 모아놓은 구간인 셈.
남태수는 성진과 다나 앞에서 수첩에 메모해온 공략집을 읊었다.
“거의 20개 층의 플레이어들이 같이 쓰는 구간이라 이곳에는 NPC외에도 플레이어만의 사회가 구축되어 있어요. 덕분에 개별적으로 진행하는 다른 층들에 비하면 훨씬 더 ‘게임스러운’ 스테이지죠.”
물론 그들 일행에게는 딱히 좋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만큼 보는 눈도 엄청 많을 텐데. 여기서 30층처럼 날뛰었다간 비밀이고 뭐고 없는 거 아시죠?”
“걱정 마라. 한동안 너와 내 이름이 언급될 일은 없을 테니까.”
30층에서 벌써 그들을 쫓아온 사도와 마주친 참이었다.
다행히 성진의 정체는 아직 들키지 않았지만, 사도를 건드린 이상 세계정부도 본격적으로 움직이리라.
“티타니아가 30층을 막고 있는 이상 그곳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방법은 없다.”
30층에는 성진과 리처드의 전투를 목격한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바깥에 정보를 흘릴 가능성은 적었다.
성좌의 진실을 알아버린 이상, 성진을 돕진 못할지언정 방해하지는 않을 테니까.
성진을 세계정부에 팔아넘겨 봐야 그들에게 미래는 없었다.
게다가 어지간한 일은 티타니아가 30층을 관리하고 있는 이상 그녀가 해결할 수 있으리라.
즉, 세계정부는 아직 성진과 남태수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중요한 순간마다 목격자가 없었거나, 없어졌으니까.
“30층을 넘어 새로운 관리자의 영역으로 넘어왔으니 할 일은 정해져 있지.”
“또 20층에서의 그걸 하시려고요……?”
관리자 사냥.
힘의 회복은 물론, 앞으로의 움직임을 위해서라도 관리자를 미리 잡아 족치는 편이 유리했다.
“남태수 너는 다나와 함께 스테이지를 진행하고 있도록. 일이 끝나면 바로 50층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둬라. 나는 따로 행동하겠다.”
성진은 그렇게 말하곤 훌쩍 뛰어올라 멀찍이 사라져갔다.
남겨진 남태수는 슬쩍 다나의 눈치를 살폈다.
“…… 그럼 우리도 이동할까.”
그리하여 탑의 31층으로 넘어온 일행은 둘로 나뉘었다.
남태수는 다나를 데리고 이 스테이지의 중심지인 센트럴 시티로 향했다.
센트럴 시티는 탑 내부에서 플레이어들이 직접 만든 도시였다.
31레벨부터 49레벨까지의 플레이어들은 모두 같은 마을을 공유하며 명예의 전당이라는 인스턴트 던전을 도는 방식이었다.
이는 곧 이곳에서 장기체류를 하게 될 거라는 소리였으므로 아예 이곳에 도시를 지은 것.
센트럴 시티는 사람이 모이는 곳에 시장이 서고 집들이 들어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탑 안에 자라난 도시라는 뜻이었다.
“히야 빌딩숲이라니 이게 얼마만이냐.”
센트럴 시티로 들어선 남태수는 주변을 가득 메운 고층빌딩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플레이어들은 탑의 상점에서 기여도 포인트를 통해 무엇이든 구매할 수 있었다.
포션이나 스킬북 같은 건 물론,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건이라면 정말로 ‘뭐든지.’
“저런 건물 하나 통째로 구매해서 놓으려면 도대체 몇 포인트나 들었을까?”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업화된 대형 클랜들.
탑 바깥에서 탑 내부의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 그들은 센트럴 시티에 상업지구를 만들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이곳에서 시장을, 음식점을, 숙소를 이용하며 포인트를 소비했고, 대형 클랜들은 그렇게 벌어들인 포인트로 바깥에 아이템을 내보냈다.
탑 안팎을 오가는 게 막혀있다곤 해도, 유동인구가 충분하니 물류가 성립했다.
신규 플레이어들은 기업에게 용돈을 받고 물자를 들고 들어오고, 내보낼 아이템을 받아 탑을 오르다가 졸업할 때 들고 나오는 것.
“우리도 한동안은 여기 머물러야 할 테니 일단 숙소부터 잡아두자. 그런 의미에서 부탁이 있는데…….”
“……?”
“나는 세계정부에 수배되어서 이름이 알려져 있거든. 네가 대신 방을 알아봐 주지 않을래?”
다나는 그 말에 남태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포인트는요?”
“응?”
“눈에 안 띄는 외곽지역 숙소라고 해도 금액이 꽤 될 텐데요. 저 검기 연구하려고 온갖 기공 관련 스킬북 다 사들여서 까보느라 포인트 없어요.”
“아, 그래. 포인트야 뭐 나랑 성진 씨가 충분히 모아뒀…….”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인벤토리를 열어봤다가 그대로 굳었다.
두 사람이 수배당한 뒤로 남태수는 플레이어들과 거래하기는 텄다고 생각하고 가진 포인트를 죄다 포션으로 바꿔두었다.
덕분에 지금 남은 포인트는 완전 빈털터리까진 아니어도, 집을 구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 대출이라도 받을까?”
“수배당한 상태라 대출도 안 나오실 텐데요?”
“다, 다나 네 이름으로 대신 좀…….”
그 말에 다나는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남태수를 바라봤다.
이후 그 표정은 다나가 남태수를 바라볼 때의 기본값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