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51화 (51/170)

<51>

성진이 명예의 전당에서 모든 챔피언들을 해방시킬 경우, 더 이상 이곳에서 레벨 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완전히 진행이 막히는 것.

때문에 센트럴 시티의 플레이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센트럴 시티에 남아 상점이나 커뮤니티 시스템 등을 이용해 올라갈 사람들을 지원하며 기다릴 후방지원 플레이어들.

그리고 함께 올라가기로 한 전투 플레이어들.

“꽤 많이 모였네요.”

“남아 있어 봐야 달라질 건 없으니 생산직들도 이번 기회에 올라갈 수 있는 층까지 도전이나 해보자고 모인 모양이더군.”

성진은 다나와 함께 50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모인 1,500명의 플레이어들을 돌아보았다.

그가 전장에서 이끌던 숫자에 비하면 소수였지만 성진에게 숫자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여기 모인 1,500명의 플레이어들은 미약하게나마 불패의 선봉장 효과를 받고 있었다.

이 힘이라면 아무리 자질이 떨어져도 꽤 높은 레벨을 찍을 수 있으리라.

“그럼 출발하지.”

성진은 49레벨 플레이어들을 이끌고 50층으로 올라섰다.

50층은 모든 플레이어가 개별로 진행하는 스테이지.

명예의 전당을 따라 신전처럼 지어진 그곳에서 성진은 붙잡아둔 나타니엘의 영혼을 꺼냈다.

“50층에 올라온 플레이어들에게 각자가 원하는 직업을 부여해라.”

-아, 알겠다.

나타니엘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응대하기 위해 사라졌다.

어차피 시스템 오류로 직업이 없는 성진은 그냥 50층을 통과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음?”

그러나 51층으로 향하는 그를 막아선 존재가 있었다.

-감히 여의 행사를 방해하려 들다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눈앞에 나타난 것은 입을 댓 발 내밀고 있는 사룡왕이었다.

* * *

-사형이다! 여가 계약자 얼굴 좀 보려는데 그렇게까지 방해를 해대다니! 계약위반으로 사형이다 사형!

사룡왕은 그렇게 외치며 성진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날다람쥐처럼 안겨들었다.

성진은 그러거나 말거나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사룡왕의 발언을 지적했다.

“너와의 계약조건에 내 거취 따윈 없을 텐데.”

-평생 함께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죽을 거라면 전장에서 싸우다 죽겠다고 한 적은 있지. 전장에선 함께라고 한 적도 있고.”

-그게 그 말 아니냐!

“내려오기나 해라. 애초에 사형이라면서 왜 들러붙고 있나.”

-사형을 시키려면 죽음을 내리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여의 백성들이 부르길 여는 죽음의 어머니이니, 여가 스스로를 하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형이 아니겠느냐?

사룡왕은 그렇게 말하며 성진에게 얼굴을 비벼댔다.

-죽음을 맛보도록 해라! 에잇! 에잇!

성진은 빤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파충류 주제에 무슨 애교를 부리나 싶었지만 지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상 함부로 밀칠 수도 없었다.

무패의 카르마가 1패라도 하면 소멸해 버리듯, 그런 짓을 했다간 자신이 가진 카르마가 부정될 테니까.

성진이 쌓아온 카르마의 근간.

-어떠냐? 꼼짝도 못 하겠지? 이 몸이 바로 네가 ‘싸우는 이유’니까.

사룡왕은 요염하게 웃으며 파충류 특유의 동공을 번뜩였다.

“망할 도마뱀 같으니.”

하는 짓만 보고 귀엽다고 생각해서는 큰 코 다친다.

누가 뭐래도 이것은 수만 년을 살아온 용들의 왕.

방금까지도 남태수의 영혼을 저당 잡아 그를 노예로 만들려고 했던 존재였다.

-뭐하는 건가요, 당신!

성진이 붙잡혀 있자 티타니아가 그를 대신해 분노했다.

-당장 떨어지세요! 선생님께 시체 냄새라도 바를 생각입니까?

-이건 영체라서 냄새 따윈 없느니라.

-하찮은 말장난 따윌!

티타니아는 마력을 움직여 사룡왕을 성진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영체인 사룡왕은 그에 저항하지 못했다.

-이래서 시체쟁이 따위를 데리고 다니는 게 싫었던 건데. 결국 구더기가 들러붙었군요.

티타니아는 과격한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하며 자신의 적대심을 숨기지 않았다.

새삼스러운 일이었기에 성진도 따지지 않고 중요한 문제부터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보아하니 의식만을 이곳에 보낸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거지? 그보다 설마 꼬리를 달고 온 건 아니겠지?”

-섭섭하구나, 여의 마법이 그것밖에 안 될 것 같으냐?

사룡왕은 사령술의 시조였다.

그 말은 곧 그녀가 새로운 마법 계열을 창조해낼 만큼 뛰어난 마법사라는 이야기.

-이 세상에 여를 뛰어넘는 마법사란 존재하지 않느니라. 왜냐면 다 죽거나, 성좌와 같이 짐승처럼 영락해 버렸으니까.

“성좌가 흔적을 발견할 일은 없다는 거군.”

-전문적으로 말해봐야 알아듣기 힘들 테니 간단히 설명하자면 50층의 특수성, 해당 계층 관리자의 부재, 그대와 카르마로 연결된 사령술사의 존재 등등 여러 조건이 맞은 덕에 의식을 연결할 수 있었느니라.

사룡왕으로서도 꽤나 오랫동안 준비한 만남이란 뜻이었다.

-정말이지, 행성을 전부 뒤져도 제대로 된 사령술사 하나 없다니. 게다가 탑 안으로 들어올 틈을 기다리는 것도 지루했느니라.

“30층에서 청동망치를 소환한 걸로 지구의 좌표를 알아내고, 센트럴 시티에서 나타니엘을 잡느라 다시 소환했을 때 탑으로 기어들어 온 건가.”

-멍청한 성좌 놈들은 엄두도 못 낼 세련된 마법이니라. 물론 놈들이 지구의 탑을 수거해 2, 3백 년쯤 조사하면 방법을 알아낼 수도 있을 테지만. 어차피 우리에겐 여기가 마지막이니.

성진의 계획이 성공하면 이후에 침입 방법이 들키건 말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때쯤이면 성진이 천상의 문짝을 박차고 쳐들어간 상태일 테니까.

“마지막이라니 표현이 이상하군.”

-흐음?

“우린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거다. 우리의 목표는 천상에 올라간다고 끝나는 게 아니잖나.”

실패하든 성공하든 어느 한쪽은 멸망한다.

“모든 성좌를 쓰러뜨릴 때까지다.”

온 우주의 성좌라는 존재를 모조리 도륙 낼 때까지 성진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크헤헤, 좋은 마음가짐이다. 여는 계약자를 돕고, 계약자는 성좌들의 시체를 넘긴다. 그날의 약속을 잊어선 안 되지.

사룡왕이 만족스러워하자 그와 반대로 티타니아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아바마마를 언데드로 만든 간악한 마녀가……!

-영혼이 떠난 시체 따위를 어떻게 쓰든 무슨 상관이지? 게다가 애초에 그때 요정왕의 시체를 언데드로 만들지 않았다면 너를 포함한 다른 요정들도 모두 에렌디아가 멸망할 때 같이 죽었을 게다.

성진은 과거 천상이 요정향 에렌디아에 총공세를 펼칠 때 그 자리에 있었다.

비록 한발 늦어 요정왕이 죽은 다음에야 도착할 수 있었으나, 살아남은 이들을 구하고 성좌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성진이 티타니아와 처음 만난 것도 바로 에렌디아가 멸망한 그날이었다.

-그날 여가 기껏 죽음을 유예해주었건만 결국 이 꼴이구나. 이래서야 여의 계약자에게 도움이 될 수나 있겠느냐?

-……!

성진은 티타니아가 폭발하기 전에 재빨리 정령술을 풀어 그녀를 역소환했다.

멋대로 역소환하면 나중에 분명 화를 내겠지만, 여기서 난리가 나는 것보단 나았다.

“그놈의 썩을 성격은 어디가지 않는군. 애를 괴롭히는 건 그쯤 해라.”

-여는 사실만을 말했을진대 너무하는구나.

여덟 왕들은 딱히 정의의 편이 아니었다.

그저 적의 적은 친구이기에 함께하고 있을 뿐.

그 사이를 중재하는 것도 성진의 역할이었다.

-아무튼, 남태수라는 자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한동안 보기 힘들 수도 있으니 할 말은 해둬야겠지.

티타니아가 사라지자 그녀는 지금까지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집어던지고 본론을 꺼내 들었다.

-탑에 침입하는 과정에서 시스템 영역을 일부 엿볼 수 있었다. 도움이 될만한 걸 쭉 읊을 테니 알아서 기억해둬라.

사룡왕은 51층부터 이어질 내용들을 쭉 읊기 시작했다.

-51층부터 거신왕의 백성들이 나오는 층이 이어지는 건 알고 있겠지? 75층에 거신왕의 룬이 하나 남아 있었다. 주워가도록.

-어스름 수녀회의 수녀들이 다수 잡혀 있는 걸 확인했다. 어쩌면 어스름의 성녀도 이 탑에 잡혀 있을지 모르니 확인해보도록.

-가장 가까운 용의 뼈는 100층을 넘어가야 나온다. 그때까진 사룡군단을 준비시켜놓을 테니 뼈를 구하면 신호해라.

일반 플레이어와는 다른, 성진만을 위한 공략팁.

탑에 들어올 때 슬쩍 본 게 다라 모든 층의 정보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분명 도움이 될 내용들이었다.

-마지막으로 꼭대기에 있을 최고관리자는 치천사 중에서도 상위존재일 게다. 어쩌면 4대 천사 중 하나가 와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거라.

“티타니아를 잡아둔 탑이라면 어지간해선 그놈들이겠지.”

초반 스테이지부터 요정족이 다수 등장한 탑이었다.

거기에 성좌들에게도 꽤나 중요한 영혼인 티타니아까지 갇혀 있었으니, 놈들 입장에서도 이 탑은 나름대로 중요한 탑이리라.

“최대한 낙관적으로 봐도 타임 리미트는 1년. 짧으면 지금 당장에라도 성좌들이 이곳을 살펴보러 올 수도 있다 이거군.”

-게다가 통과에 시간이 필요한 스테이지들을 생각하면 여유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하느니라.

상황이 이러하니 성진도 남태수를 재촉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남태수의 진행속도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남태수가 우리의 나비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놈이 아무리 난리를 부려도 뉴욕에 태풍은 안 불 것 같다만.

“나비효과도 알고 있나?”

-탑에 들어갈 틈을 찾아 지구 곳곳을 뒤지는 동안 꽤나 많은 걸 볼 수 있었느니라. 안타깝게도 그대에 관한 자료는 별로 없더구나. 도대체 어쩌다 그 어린 나이에 혼자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있었던 겐가?

30년 전 탑이 지구상에 처음 나타날 때.

그 위를 날고 있던 비행기는 이세계로 튕겨 나갔다.

성진은 아직도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 거 없다.”

-에잉…… 그만큼이나 동고동락했으면 좀 더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 봐도 좋을 텐데 말이다.

이제 와서 좀 투덜댄다고 성진이 입을 열 리도 없었으므로 사룡왕은 시원하게 포기했다.

그녀에게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사룡왕은 대신 성진의 마력을 빌려 작은 창을 열었다.

마법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개별 스테이지인 50층 전직의 방을 이용하고 있는 남태수의 모습.

-자, 그럼 우리 나비가 어떤 선택을 할지 함께 지켜보도록 할까?

* * *

“언데드 생성, 데스나이트.”

남태수는 자신의 스킬로 소환된 데스나이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너무 약해. 이래서야 무르무르 네가 데스나이트를 소환했을 때와는 사실상 다른 스킬이야.”

-그야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20층에서 데스나이트를 불렀을 때는 요정기사 마티아스의 영혼을 불어넣었으니까요.

“이젠 확실히 알겠어. 영혼 없이 스킬로 구현되는 사령술은 반쪽짜리에 불과해. 성좌들은 사룡왕의 마법을 제대로 베껴내지 못한 거야.”

50층에서는 2차 전직을 고르기 전에 스킬을 미리 체험해볼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해 사령술사의 상위직업을 선택해 데스나이트를 소환해본 남태수였으나, 결과물은 기대 이하였다.

소환된 데스나이트는 무르무르가 마티아스를 불러냈을 때와는 달리 그저 좀 더 강력해졌을 뿐인 해골기사였다.

‘그때 본 건 그야말로 모든 걸 베어 버릴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죽음의 기사였어. 그에 비하면 이건 장난감 정도밖에 안 돼.’

마력을 볼 수 있게 된 지금은 남태수도 그 차이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고를 거면 사령술사의 상위직보단 차라리 마검사처럼 듀얼클래스에 가까운 직업이 낫겠어. 어차피 사령술은 배워서 쓰면 되니까.”

-사제 직군의 스킬이 섞인 죽음의 사제 같은 것 말입니까?

“그것도 있고, 명예의 전당에서 정립된 내 전투방식대로라면 생존기를 챙길 수 있는 직군으로 둘둘 말아 버티는 쪽도 괜찮겠지만…….”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으나 성진이 해준 이야기를 듣고 나자 좀 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히든 클래스 목록을 보여줘.”

본래라면 조건을 달성해야지만 고를 수 있을 히든 클래스도 관리자인 나타니엘이 성진의 손에 떨어진 이상, 전부 확인해보고 고를 수 있었다.

남태수는 떠오른 시스템 창을 위에서부터 훑어보았다.

[네크로댄서]

-Dancing all night!

당신은 하루 종일도 춤출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스킬에 예술점수가 추가됩니다.

“응?”

[네코로멘서]

-냥냥, 냥 냐냥?

MP 대신 Kawaii 스택을 얻습니다.

Kawaii 스택을 소비하여 언데드 대신 고양이를 소환합니다!

“으응???”

그 아래로도 기나긴 스크롤이 계속 이어졌으나 대부분의 직업들이 비슷비슷했다.

“…… 알려지지 않은 히든 클래스가 이렇게 많았다고? 게다가 히든 클래스가 쓰레기인 건 알았지만 이것들은 도대체???”

-재미있군요. 이것들도 시험해 보시지요, 마스터.

“뭐?”

-운명이 걸린 중요한 결정인데 묘지기 외에도 전부 체험해보고 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그런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기에 남태수는 히든 클래스들을 전부 체험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고양이 귀가 자라난 상태로 냥냥거리던 와중, 사룡왕이 열어준 창문으로 성진과 눈이 마주쳤다.

“…… 그런 걸 좋아했나?”

“으아악 아니야!!”

-으음, 저런 걸 사도로 삼는 건 좀…….

사룡왕은 벌레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남태수를 바라보았다.

남태수 나이 서른.

‘그냥 자살하자.’

청춘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