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고양이는 이제 충분히 즐겼나?”
“아니 그건 직업체험이었다니까요!”
한동안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니던 남태수는 도망쳐봐야 이내 사룡왕의 천리안 마법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2차 전직으로 나와 있는 직업들을 직접 해보니 알겠어요. 성좌들이 주는 직업을 아무리 단련해봐야 무르무르가 보여주었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겠죠.”
비록 하급 언데드가 대부분일지언정 언데드 백만 대군을 불러일으키고, 본 드래곤을 사역하던 20층의 무르무르는 절대적인 위엄을 자랑했다.
탑에서 100레벨, 200레벨을 찍어봐야 남태수 자신은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없으리라.
-그럼 순순히 묘지기가 되겠느냐?
“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고통받을지도 모르는 거래를 하고 싶진 않다고요.”
-거 미물 주제에 귀찮게도 구는구나.
사룡왕은 고양이 귀 남태수를 마주한 뒤로 계속 경멸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네놈 하나 때문에 계약자의 시간을 낭비시킬 수는 없느니라. 여가 선심을 쓰도록 하지. 네게 유예를 주겠다.
“유예요?”
[신성존재 사룡왕 엘드리치가 당신에게 임시 사도직을 제안합니다.]
[임시 사도직은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반환할 수 있고, 상호 동의하에 정식 사도로 승급할 수도 있습니다.]
[임시 사도를 포기하는데 페널티는 없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지구의 탑을 부술 때까지 기간을 한정한 사도 제안이다. 이후에 사도가 될지 말지는 네 자유. 이 정도면 불만 없겠지?
압도적으로 남태수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사실상 리스크가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진짜로 이런 조건으로 해주시겠다고요?”
-못 믿겠다면 여의 계약자를 보증인으로 세우지.
그 말에 남태수가 성진을 바라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네가 탑이 부서진 후 정식 사도로의 승급을 거절하더라도 복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라면 해줄 수 있다.”
포기하는데 페널티가 없다고 해도 자신의 호의를 거절한 사룡왕의 개인적인 분노는 다른 문제였다.
성진은 그것마저 자신의 이름으로 막아주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러면 해야죠? 안 할 이유가 없는데?”
-그렇다면 계약 성립이로군.
사룡왕은 그렇게 말하며 창 너머로 손을 뻗었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건 그녀의 의식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된 영체일 뿐.
실체는 없었기에 그 손은 남태수의 가슴을 그대로 통과했다.
그리고.
“윽!”
[사도 : 용왕의 묘지기로 전직합니다!]
[권능 스킬이 개방됩니다.]
[개방 레벨은 당신의 주인이 얼마나 힘을 내려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힘을 원한다면 충성을 증명하십시오!]
-이것으로 계약기간 동안 네놈의 심장은 여의 것이니라.
남태수의 심장에 용의 피 한 방울이 섞여들었다.
“뭐, 뭘 한 거예요?”
-여의 피를 섞었느니라. 물론 실제 피는 아니니라. 살아 있는 용이 없게 된 이후, 용의 피는 주술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 되었으니.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남태수를 위해 성진이 설명을 덧붙였다.
“대충 네 영혼이 저 녀석과 연결되었다는 소리다. 가끔 보물을 가지고 싶다든가, 인간의 비명 소리가 천상의 노래처럼 들린다든가, 공주를 납치하고 싶다든가, 입에서 불이 나온다든가 하겠지만 별문제는 없을 거다.”
“엄청나게 문제 있어 보이는데요??”
“죽어서도 영혼의 노예가 되는 것보단 훨씬 낫지 않나.”
“그거야 그런데…….”
투덜거려봐야 의미도 없는 거, 남태수는 적당히 중얼거리며 스킬창을 살폈다.
권능 스킬이 개방되었다고 하니 일단은 그것부터 확인할 생각이었으나 생겨난 건 패시브 스킬 하나뿐이었다.
[용의 혈족]
용과 같은 특성을 얻습니다.
-이 정도면 딱 이구아나들이 친근감을 느낄 정도겠구나. 네놈의 능력으론 아직 그 이상의 효과는 아무것도 없느니라!
시스템 창에서 사룡왕의 말이 나오는 건 신기한 일이었으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게 다예요?”
-여는 지금 이곳에 개입할 수 없으니 힘을 내려줄 수도 없지 않겠느냐.
“뭐야 그럼 네크로댄서보다 구린 거 아닌…….”
무심코 본심이 새어 나온 남태수는 사룡왕의 표정이 험악해지는 걸 보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일단 사도로 지정이 된 이상 여가 언제든지 지켜볼 수 있게 된 것이 중요한 것이니라! 정 급하다면 성좌에게 들키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여가 개입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당장의 능력보다는 사룡왕이 뒷배가 되어준다는 게 중요하단 소리였다.
-게다가 30층에 만들고 있는 차원문이 완성되면 제대로 된 힘을 부여하는 것도 가능해지겠지.
티타니아가 만들고 있는 차원문은 성진이 천상의 좌표를 얻은 직후, 군대를 불러오기 위한 것.
사룡왕의 능력이라면 그전에도 남태수 하나 봐줄 힘 정도는 숨겨 들여올 수 있었다.
-어차피 네 힘은 네가 데리고 다니는 영혼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냐. 대기만성형 직업이라 생각하고 한동안은 스스로의 사령술로 때우거라.
사룡왕은 더 이상의 양보는 없다는 듯 선을 그었다.
이어서 그녀는 무르무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무르무르라 했지. 네놈도 의욕을 낼 수 있도록 일이 성공했을 때의 포상을 약속해주마. 원하는 것이 있느냐?
-마스터가 임무를 다하면 저 또한 당신의 사도로 삼아주시옵소서.
-그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얼마든지 가능하다만…….
사룡왕은 고개를 끄덕이려다 문득 남태수를 바라보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남태수가 후에 정식 사도가 되기를 선택하면 네놈도 사도로 삼아주마. 그가 거절한다면 너 또한 사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예? 왜 또 저를 걸고넘어지는데요?”
-그야 이대로 가면 네놈은 단물만 빼먹고 도망갈 것이 아니냐. 도망갈 거면 동료에 대한 죄책감이라도 한 줌 가져가야지. 안 그러느냐?
사룡왕의 말에 남태수는 뻣뻣하게 굳었다.
차마 등 뒤에 있을 무르무르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크헤헤, 남은 시간 동안 최선을 다해 설득해보도록. 네가 사도가 되고 싶다면 우선 저놈을 정식 사도로 만들어야 할 게야.
사룡왕은 무르무르를 바라보며 용의 포효가 뒤섞인 그녀 특유의 웃음을 지었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그 웃음소리를 듣자 남태수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과연 사악한 사령술사들의 시조다운 괴팍한 성격이었다.
-자, 그러면 너무 오래 머물렀다간 흔적이 남을 테니 여는 슬슬 돌아가도록 하지.
사룡왕이 떠나자 다른 방에 있던 성진과의 연결도 끊어졌다.
“아.”
무르무르와 둘만 남게 된 남태수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 * *
[특수 직업 : 이단심문관으로 전직합니다!]
[2차 전직 공통 스킬이 해금됩니다.]
[이단심문관 전용 스킬이 해금됩니다.]
“확실히 이거라면.”
다나는 이단심문관의 스킬을 체험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검기로 마법을 벨 수 있다고 해도 순수 전사에게 마법 대응은 한계가 있었다.
이단심문관은 디스펠이나 상태이상 해제 등 마법 대응에 특화된 직업.
“거기에 이 심판의 검이라는 스킬도.”
탑에서는 50레벨의 2차 전직, 100레벨의 각성 등의 특정 구간마다 각자의 직업에 맞는 강력한 스킬을 배울 수 있었다.
이단심문관의 50레벨 스킬인 심판의 검은 검 위에 마력을 덧씌우는 검기가 아닌, 마력으로 이루어진 검을 통째로 만들어내는 스킬.
마력을 소모하여 마음대로 무기를 소환할 수 있는 유용한 스킬이었다.
“소지하고 있는 무기를 등록하면 그것과 똑같은 옵션과 형태를 지닌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가. 컬렉션 보너스도 있는 것 같고, 일단 손에 들어온 건 다 등록해놔야겠네.”
무기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는 다나로서는 특정 옵션의 무기를 애지중지하는 것보다 이런 게 훨씬 나았다.
“마력만 된다면 계속 만들어서 던질 수도 있을 테니 원거리 대응력도 조금은 해결되겠지.”
무엇보다도 스킬을 사용할 때마다 마력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다 보니 잘하면 스킬을 쓰지 않고도 직접 기술을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좌가 내려주는 힘에 구애되어서는 안 돼.’
스킬은 어디까지나 샘플일 뿐.
그걸 보고 배워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상태창의 숫자보다 중요한 건 카르마인가…….”
센트럴 시티에서 다나는 80레벨 이상의 전투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시에라를 쓰러뜨리고 카르마를 획득했다.
그러나 아직 영혼의 본질을 마주하지 못한 다나는 카르마를 느낄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현 상태를 보여주는 건 탑의 시스템 창이었다.
<불굴의 투지(희귀)>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꺾이지 않는 이상, 당신의 육체도 꺾이지 않는 불굴의 가호가 내립니다.
-일반 등급 효과 활성화됨.
당신의 전력은 당신의 몸 상태가 아니라 정신 상태에 좌우됩니다.
-희귀 등급 효과 활성화됨.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싸울 수 있습니다.
-영웅 등급 효과 미획득.
-전설 등급 효과 미획득.
-신화 등급 효과 미획득.
<피보다 진한 신념(영웅)>
대의를 위해 싸울 때, 당신은 더더욱 강해집니다.
-일반 등급 효과 활성화됨.
신념을 따를 때 모든 능력이 향상됩니다.
-희귀 등급 효과 활성화됨.
맞닥뜨린 벽이 두껍고 높을수록 가진 능력이 배가됩니다.
-영웅 등급 효과 활성화됨.
해당 카르마가 운명 보정을 받습니다.
-전설 등급 효과 미획득.
-신화 등급 효과 미획득.
하나같이 탑이 제공하는 기본 상태창에는 등장하지 않는 항목들이었다.
오로지 카르마의 존재를 인지한 이들에게만 공개되는 히든 시스템.
이것은 성좌가 딱히 인간을 위해 탑을 내려준 것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운명 보정.”
다나가 얼핏 이해하기 힘든 저 문구에 대해 물었을 때, 성진은 이렇게 답했다.
‘운명 보정은 카르마에서 가장 강력한 옵션이다. 충분한 운명이 모인다면 죽음조차 초월할 수 있지.’
작게 보면 죽어야 할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끝까지 싸울 수 있고,
크게 보면 필멸자의 운명을 초월하여 신성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옵션.
성진은 이만한 옵션이 영웅 등급부터 달려있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고 했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어.”
그 외에도 영혼이 굴복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싸울 힘을 부여해주는 불굴의 투지.
스펙만 올리면 다인 일반 플레이어들과 달리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 하는 다나에게는 가장 적합한 카르마라고도 할 수 있었다.
“51층으로 진행하겠어.”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50 > Lv.51]
다나가 전송된 곳은 야외에 설치된 25인용 막사였다.
“왔나. 같은 파티원이라고 같은 막사에 전송시켜준 모양이군.”
그곳에는 이미 성진과 남태수가 도착해 있었다.
“네. 말씀하신 대로 이단심문관으로 전직했어요. 그리고 태수 아재는…….”
다나는 남태수를 보며 말을 끌었다.
“왜 저러고 있어요?”
남태수는 무서운 거라도 본 타조마냥 고개를 푹 숙인 채 귀를 막고 앉아 있었다.
한편 무르무르는 영체화하여 그 옆에서 얼굴을 들이댄 채 눈도 깜빡 안 하고 계속 뭐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음은제가대사막에있었을때의이야깁니다대사막은물한방울없이생물이살기힘든환경인데요다행히위대하신사룡왕폐하의은혜를받은언데드들은대사막에서도아무렇지않게…….
다나가 성진을 바라보자 성진은 답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룡왕의 사도직을 인질로 걸린 이후 틈만 나면 저렇게 언데드의 좋은 점을 설파하고 있더군.”
성진에게서 대강의 설명을 들은 다나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남태수를 바라보다가, 구해달라는 눈빛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외면하는데!”
“눈빛이 징그러워요.”
다나의 말에 성진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징그러운 모습이긴 했지.”
“으아악! 그런 거 떠올리지 말라고요, 이 악마야!”
“저게 무슨 소리예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지.”
성진은 다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구체적인 사항을 함구했다.
“그보다는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군. 여기 스테이지는 한가롭게 떠들고 있을 여유 따윈 없으니까.”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막사 밖으로 나섰다.
푸른 하늘.
넓은 평야.
비명이 난무하고 시체가 날아다니는 전장.
“거기 뭐하고 있나! 어서 피해라!”
NPC들의 외침 속에서 성진은 날아오는 바위를 가볍게 받아냈다.
집채만 한 바위를 적당히 내려놓은 성진은 저 멀리 바위를 던진 적들을 바라보았다.
“거인이 약 200명. 크기를 보아하면 전사는 아니로군.”
그곳에는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인들이 쌓아놓은 바위를 던지고, 달려드는 기병들을 짓밟으며 진격하고 있었다.
탑의 51층.
그것은 인간과 거인이 맞붙는 전장 스테이지였다.
“51층부터는 인간의 나라에 쳐들어온 거인을 막아내는 방어전에서 시작해, 75층의 거인왕국 수도까지 역습에 나서는 구조인데요. 성진 씨는 이번에도 평범하게 깰 생각은 없죠?”
“당연하지.”
성진은 인간 측의 야영지를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플레이어들과 합류하는 것은 여기가 아니라 몇 층 위의 더 큰 전장에서의 일이었다.
“우린 지금부터 거인 편에서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