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75층으로 가는 통로는 분명 절벽 위의 외길이었지만, 거인의 사이즈에 맞춰져 있었기에 상당한 크기를 자랑했다.
실제로 성진과 아이젠그라드의 싸움에도 버텨냈을 정도.
그러나 검강이 훑고 지나간 순간, 그 거대한 다리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재로 변해 지도에서 지워져 버렸다.
성진은 얼빠진 표정의 공격대 플레이어들을 뒤로하고 아이젠그라드의 영혼을 붙잡았다.
-너. 강한 전사. 나를 구해줬다. 나의 은인.
아이젠그라드의 영혼은 어린아이뿐이던 다른 거인들과 달리 그나마 청소년 정도로 쳐줄 수 있는 연령대로 보였다.
“하지만 말투가 이상한데.”
-아이젠은 바보다. 셈도 할 줄 모르고 룬도 반편이다. 천사들은 아이젠이 바보라서 괜찮다고 했다.
“나이는 좀 먹었지만 어리숙한 모습을 보고 여기에 같이 처박아둔 건가.”
바보치고는 상당한 검술실력이었으나, 그가 8대 종족 중 하나인 거인족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상할 거 없기도 했다.
거인족 전사라면 룬 마술에 의해 어떤 무기도 능숙하게 다뤄내기로 유명했으니까.
물론 거인이 쓸만한 사이즈의 무기가 흔하지는 않았기에 복잡한 총화기보다는 단순한 냉병기가 대다수이긴 했다.
어차피 무기의 성능은 얼마나 강력한 카르마를 쌓았느냐가 중요했으니까.
-아이젠은 걱정이다.
“걱정?”
-아이젠은 다리를 지킨다. 다리 너머에는 많은 아이들이 있다. 아이젠이 없으면 아이들이 죽는다.
아이젠은 절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은인은 고마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아이들이 죽는다. 인간들이 저 안으로 들어가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는다.
30년의 세월 동안 아이젠은 플레이어들에게서 75층을 지켜왔다.
비록 지금까지 몇 번이고 실패해 왔지만, 그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곳을 틀어막는 것으로 아이들이 75층 공격대가 생길 때까진 버틸 수 있었으니까.
그가 버티는 1분 1초는 말 그대로 아이들의 수명이나 다름없었다.
-놈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다리가 끊어져도 놈들은 온다.
아이젠은 영체의 몸으로 성진 앞에 무릎 꿇었다.
-은인. 내 영혼 따윈 어찌되든 좋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니다. 제발 아이들을 구해주길 바란다. 원한다면 내 영혼을 가져도 좋다.
성진은 그러한 아이젠을 보며 무심하게 답했다.
“대가가 잘못됐군.”
-나는 죽은 몸. 그 외에는 내어줄 것이…….
“영혼을 대가로 받는 건 성좌들이나 하는 짓이다.”
성진의 손은 어느새 다나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다.
“저놈들은 여기 있는 다나가 막아줄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저요?”
“나는 그동안 안쪽에 있는 거인들을 해방시킨다. 아이젠 너는 나와 함께 가면서 도시 안쪽에 대해 필요한 정보를 내놓아라.”
-구해주는 거냐!
“그래. 단 거인왕을 해방시키는 건 먼저 룬을 찾은 다음의 일이겠지만.”
성진 혼자 75층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룬을 찾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어차피 75층의 NPC들을 해방시켜 룬의 행방을 알아보긴 해야 하니, 아이젠의 부탁이 아니었어도 결국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되었으니 부탁하지.”
성진은 그렇게 말하며 다나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내가 안쪽의 거인들을 해방시키고 다니면 안쪽에서의 원거리 공격도 줄어들 거다. 그럼 비행기도 가지고 있는 놈들이 저 협곡을 건너지 못할 리가 없겠지.”
방해가 없다면 시간이 걸릴 뿐 건너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성진이 다리를 베어낸 것도 어디까지나 시간 벌이에 불과하리라.
“한 놈도 놓치지 말라곤 안 할 테니 할 수 있는 만큼 막아봐라.”
* * *
75층 공격대는 기본적으로 플레이어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유망주로 손꼽히는 이들만 모여 있었다.
어중간한 실력으로는 공격대에 끼어봐야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데다, 애초에 끼워주지도 않으니 당연한 일.
그러나 70명이 넘는 공격대 인원들이 지금은 다나 단 한 사람에게 붙잡혀 있었다.
“아니 씨, 중간 보스가 없어지면 뭐하냐고! 거인 궁수는 그대로인데!”
아이젠그라드가 길을 틀어막고 있었음에도 공격대가 외길에 집착했던 이유.
그건 결국 거인궁수의 화망을 뚫고 협곡을 날아서 건너는 게 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저 녀석은 어떻게 저걸 다 피하는 거야?”
플레이어들은 협곡 너머에서 자신들과 똑같이 저격당하면서도 잘만 피해 다니는 다나를 보며 어이가 없어졌다.
이쪽에 숫자가 더 많은 만큼 다나 쪽으로 떨어지는 화살 자체가 적긴 했다.
그렇다고 해도 다나는 혼자.
결국 저쪽에 떨어지는 화살은 전부 다나만을 노리고 있는 공격이 아닌가?
“너희도 쟤처럼 좀 보고 피해 봐!”
“꼬우면 네가 하든가! 미사일처럼 내리꽂히는 화살을 보고 피하는 게 가당키나 해?”
지원계 플레이어들의 투덜거림에 협곡으로의 접근을 시도하던 근접 플레이어들이 이를 갈았다.
그나마 어떻게 대협곡 위로 나아간다 싶으면 어김없이 다나가 심판의 검을 날렸다.
파사의 기운을 담은 심판의 검은 닿는 것만으로도 마법을 디스펠.
날고 있던 플레이어들은 순식간에 협곡 아래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협곡 아래로 지나가는 것도 안 되니 원…….”
협곡 아래에 가득한 독기는 70레벨 대 플레이어들이 버틸 수 없는 수준.
저 아래로 떨어지면 독기에 범벅이 되어 죽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활강스킬이 달린 망토라도 있어서 가다가 떨어져도 다시 이쪽의 절벽으로 달라붙어 살 수는 있습니다만. 대협곡의 폭은 활강만으로는 건널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알아? 젠장. 이렇게 된 이상 그 남자가 75층 안쪽의 거인들을 처리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아무리 다나가 버티고 있다곤 해도 혼자서 막는 건 한계가 있었다.
성진이 저 안으로 들어간 이상 바깥으로 화살을 쏘아대는 거인의 숫자는 계속 줄어가리라.
즉, 75층 공격대도 여기서 버티고 있으면 언젠가는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게 언제인 줄 알고?’
만일 그렇게 들어간다고 해도 75층 안에 먹을 게 남아 있기나 할까?
“당했군. 완전히 당했어.”
성진 한 사람 때문에 공격대 전체가 닭 쫒던 개가 되었다.
“어떻게 혼자서 레이드 보스를 잡을 정도의 스펙을 갖춘 거지? 아직 발견되지 않은 탑의 숨겨진 보상이라도 다 챙기면서 올라온 건가?”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주성진이 가진 정보력이 세계정부를 뛰어넘는 수준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놀랍게도 그 추측은 일부 사실이었으나 카심으로서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콰앙!
“방어막 깨졌다 뒤로 빠져!”
온갖 방어 장비와 스킬을 떡칠하고 협곡으로 접근하던 파티가 저격에 얻어맞고 또 뒤로 물러났다.
화살의 속도를 생각하면 전 인원이 알아서 피하는 건 무리.
결국 방패를 앞세워 전진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방식으로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도대체 저년은 어떻게 알고 피하는 거야?”
“화살이 떨어지기 전에 미리 움직이는 것 같은데 특수한 감지 스킬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젠장. 일단 물러난다!”
이대로 가다간 75층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멸.
결국 카심은 공격대를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공격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그러나 카심을 괴롭히는 것은 다나와 거인궁수뿐만이 아니었다.
“공대장님! 여기 와서 이것 좀 확인해보셔야겠습니다.”
“왜 또?”
“진위가 의심되는 내용이긴 한데,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똑같은 이야기가 올라오는 걸 보니 뭔가 일어나고 있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건 또 뭐야. 50번 대 층으로부터 대규모 언데드 거인들이 75층 방향으로 진격 중이라고?”
카심은 땀에 전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한번 아서 보내서 후방 상황 파악하고, 커뮤니티 내용 계속 체크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시간이 지체되어 짜증이 날 뿐이었는데, 이젠 시간을 지체하면 골로 가게 생겼다.
“혹시 공대장 하고 싶은 사람?”
카심의 말에 모두가 그의 시선을 피했다.
“썅.”
오늘따라 푹신한 침대가 그리워진 카심이었다.
* * *
-으아앙 아이젠 혀엉!
75층으로 들어선 성진은 눈에 보이는 족족 거인들을 쓰러뜨리며 영혼을 해방시켰다.
“묻고 싶은 게 있다.”
성진의 말에 아이들은 아이젠의 뒤에 숨어 눈알만 땡그르르 굴렸다.
분명 성진이 그들을 구해준 건 맞지만, 방금 전까지 살벌한 카르마를 뿜어대며 자신들을 죽이려 들었던 인물이었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는 것.
-괜찮다. 은인은 거인의 친구다. 룬 마술도 쓴다.
그나마 이곳의 아이들은 아이젠을 부모처럼 따르고 있었기에 그가 설득하자 대화가 가능했다.
“거신왕의 룬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는데 아는 거 없나? 아마 플레이어들은 알 수 없는 장소에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한다만.”
성진의 물음에 아이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너 나 할 것 없이 다들 알고 있는 곳에 숨겨져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실망도 없었다.
“평범하게 뭔가 숨겨져 있을 만한 곳은 플레이어들이 다 뒤져봤겠지. 그럼 생각지도 못한 곳이나, 플레이어들의 수준으로는 닿지 않는 곳을 찾아봐야 한다는 건데.”
성진은 건물 위에 서서 도시를 돌아보았다.
초인적인 안력을 가진 성진이지만 이곳에선 빼곡한 건물에 가려 지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즉, 사방에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실제 스테이지는 더 넓다는 뜻.
“어쩔 수 없나.”
아무리 성진이라도 보물찾기는 특기가 아니었다.
“티타니아.”
-아아아아 진짜!!!
성진의 정령술로 소환된 티타니아 미니언은 예상대로 나타나자마자 분노를 표출했다.
-그 썩은 시체 같은 년이!
앞서 사룡왕이 티타니아의 성질을 긁을 때, 성진은 사룡왕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티타니아를 역소환했다.
둘 중 그나마 말이 통하는 쪽을 꼽으라면 티타니아인 데다, 그땐 사룡왕과 이야기해야 할 것도 많았기 때문.
애초에 사룡왕 또한 그 점을 알기에 티타니아에게 시비를 건 것이었다.
자신의 사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영악하게도 전혀 다른 화제를 가지고 티타니아부터 내쫓았던 것.
-선생님도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나요? 그런 소리를 하는 년을 곁에 두고 저를 역소환하시다니요!
“미안하게 됐다.”
문제는 그런 일이 있었으니 성진 또한 다음에 티타니아를 소환할 때는 이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이후로 한 번도 소환해주지 않으시다니!
티타니아의 잔소리는 그 이후로도 이어졌다.
이러한 꼴이 싫어서 그녀가 필요해지기 전까진 다시 소환하지 않은 것이었지만.
‘역시 옛말에 틀린 거 하나 없군.’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 일이었다.
-그래서, 저를 다시 부르신 걸 보면 또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요?
티타니아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면서도 할 일은 제대로 했다.
“이 층에 거신왕의 룬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는 제보가 들어왔다. 찾을 수 있겠나?”
-일단 한번 볼까요?
티타니아는 방금까지 신나게 투덜거리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업무에 들어가자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역시 네가 제일 좋다니까. 부하라는 놈들 중 태반은 사람 말도 안 통하는 놈들이었으니 원.”
-제, 제가 제일 좋다니 갑자기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물론 저도 좋아하지만요…….
은근히 쉬운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