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흐응. 세계정부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서울 모처의 호텔.
현장의 수사반장을 데리고 나온 산달폰은 호텔에서 그를 무릎 꿇려놓고 룸서비스로 시킨 콜라를 홀짝였다.
“새로운 사도인가? 하지만 또 다른 성좌가 빨대를 꽂은 흔적은 없었는데. 기존 성좌 중 하나가 두 번째 사도를 만든 건가?”
어느 쪽이든 외부에서 알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확실한 건 새로 온 놈은 기존의 세계정부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는 건데…….”
산달폰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수사반장을 발 받침대로 사용했다.
최면에 걸린 그는 산달폰이 무슨 행동을 하든 아무런 반응 없이 흐릿한 눈을 했다.
“뉴페이스가 기존의 기득권이 마음에 안 드는 건 당연하지. 문제는 여기에 엮인 놈들이 몇이나 될지에 따라 달라지겠네.”
그녀는 마지막으로 콜라를 싹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일 먼저 인페르노 클랜을 뜯어먹기 시작한 걸 보면 일단 웨어울프 놈들도 의심스럽고. 이제부터 알아봐야 할 게 한둘이 아니구만?”
수사반장의 턱을 잡고 자신을 마주보도록 돌린다.
“그런데 넌 뭔데 그런 거 캐고 다녀?”
기아스를 이용한 영혼의 구속.
단순히 마법을 이용해 정신을 조작하는 것이 아닌, 영혼 그 자체에 강제되는 명령이 그의 대답을 이끌어냈다.
“저는 인류해방전선 소속의 반정부주의자로 동료들을 위해 세계정부에 잠입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세계정부에 반하겠다고?”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며, 누군가에게 지배받아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신의 뜻을 이행하는 존재인데? 고작 개인의 사상으로 신의 뜻을 거슬러도 돼?”
“누군가로부터의 자유에서 말하는 누군가는 그 대상이 신이라도 마찬가지인 절대적인 것입니다.”
“기아스를 걸었으니 진심으로 답한 걸 텐데. 와 너 기개 있네.”
산달폰은 대견하다는 듯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특별히 그냥 보내줄게. 오늘 일은 다 잊고 열심히 살아봐. 혹시 알아? 정말로 인류가 해방될지.”
찰싹!
말에게 채찍질하듯 엉덩이를 때리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호텔방을 떠났다.
기아스를 걸었으니 최면술과는 달리 이후의 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으리라.
“사도와 엮이는 일은 싫은데.”
산달폰은 성좌의 혈족인 케루빔으로서 사도 따윈 두렵지 않았다.
다만 사도의 뒷배인 성좌들이 직접 문제를 제기해오면 그녀라도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밥그릇 다툼 중재하려다 골로 간 선배들이 한둘이 아닌데…….”
일단은 머리를 들이밀기 전에 견적부터 뽑아봐야 했다.
“새로 온 녀석이 기존의 세계정부를 상대하려면 그만한 세력이 있어야겠지. 그러면 그 세력을 어디서 충당해야할까?”
플레이어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 숫자는 전체 인구에 비해 소수였다.
세계정부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원만 가지고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먼저 민주주의 체제부터 마취시킬 필요가 있었다.
마침 그들에게는 매혹과 세뇌가 가능한 권능스킬이 있었다.
“각국의 주요 정치가를 매혹한 뒤 나머지를 숙청. 시민들이 다른 정치가를 뽑으면 당선자를 매혹한 뒤 정권심판론을 꺼내들고 기존에 포섭한 인물을 숙청.”
누구를 뽑든 당선자가 시민들을 대표하지 못하게 한다.
투표로 돌아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가 무의미해지니 모든 것이 도미노였다.
“그 과정에서 중간층은 죄다 죽거나 감방행. 남은 건 사도의 뜻에 따르는 소수의 상류층과, 무의미한 투표용지를 든 일반 시민뿐.”
머릿수가 힘을 잃으니 남은 건 무력 뿐.
그리고 무력으로는 소수의 상류층이 나머지 모두보다 강했다.
“이러한 양극화를 30년간 지속하니 이제 남은 플레이어는 죄다 친정부 성향이란 말이지. 그렇다고 일반 시민들은 힘을 못 쓰고. 그럼 여기서 새로운 세력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감옥뿐이다.
견적을 뽑아낸 산달폰은 곧장 세계 최대 규모의 정치범 수용소, 21세기의 굴라그가 존재하는 극동군구 자치령으로 향했다.
각종 반체제 인사와 범죄자들, 반 세계정부 계열 플레이어들.
그리고 사도가 되지 못한 자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
정부군을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자들이 갇혀 있던 굴라그는 이미 불꽃에 휩싸여있었다.
“이야, 빠르네.”
새로 온 놈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정말 작정하고 세계정부를 엎어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 * *
“굴라그 폭파와 수감자들의 탈출은 계획대로 성공했습니다.”
“잘했다.”
성진과 합류한 베르나데트는 센트럴 시티에서 바깥에 내보낸 플레이어들이 작전에 성공했음을 알려왔다.
“웨어울프를 끼고 스펜서 가문의 이름을 빌리니 굴라그도 면회가 되네요. 이래서 권력이 최고라니까.”
굴라그에 당당히 면회를 신청하고 들어간다는 발상은 세계정부 측에서도 예상치 못했으리라.
물론 그 다음 건 더 예상치 못했음이 분명했다.
“그런데 보스께서 주셨던 그건 도대체 뭐였던 겁니까? 말씀하신 대로 흡혈귀로 종족변환한 수감자에게 전달하니 탈출에 성공하긴 했다는데.”
“내 피다.”
“예?”
“다른 말로 흡혈왕의 혈청이지.”
흡혈왕의 혈청으로 상위 혈족이 된 흡혈귀라면 사도의 권능스킬로도 추적이 쉽지 않으리라.
“그런 난리가 났으면 한동안 탑 안의 일까진 신경 쓰기 힘들겠지. 우리에겐 기회다.”
거신왕의 황금룬을 손에 넣은 성진은 자신의 상태를 재점검했다.
“정령술에 더불어 룬 마술까지 회복되었군. 이거라면 청동망치 없이도 천사를 잡을 수 있겠지.”
성진의 카르마는 모두 청동망치에 저장되어 있어 그것을 소환했을 때만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렇다고 청동망치를 자꾸 불러내다간 결국 성좌들에게 들킬 거라는 것.
그러나 신성마법을 두 개나 복구한 지금이라면 망치 없이도 사도에 맞먹는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다만 이걸 써먹을 연료통이 모자라군. 춘식이 하나로는 역시 부족해.”
지금 성진이 사용하는 힘은 한 가지 분야에서 끝을 봐야만 겨우 닿을까 말까한 수준의 힘.
그걸 고작해야 지난 몇 달 동안 긁어모은 마력만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써먹는 데 한계가 있었다.
“어쩔 수 없지. 76층부터 최대한 마법석이라도 캐는 수밖에.”
그리하여 76층으로 진행한 성진은 황금룬의 힘으로 손에 든 곡괭이를 강화시켰다.
탑의 76층.
에렉투스의 지하대던전.
천상과의 싸움을 위해 난쟁이들이 만들어낸 행성단위의 지하요새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76층부터 펼쳐지는 던전 스테이지는 플레이어마다 개별로 진행되는 스테이지였다.
거인 층의 플레이어들이 보스를 잡아서 도망치려 했던 것처럼 다른 플레이어와 마주치지 않고도 진행할 수 있는 스테이지.
게다가 파티 시스템으로 자신들은 함께 진행할 수 있으니 남태수로서는 간만에 편하게 진행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 너도 곡괭이를 들어라.”
성진이 곡괭이를 꺼내기 전까지는.
“무너지지 않게 파야한다. 머리 위로 수 킬로미터가 다 흙이니 무너지면 너는 죽는다.”
“…… 우리가 아니라요?”
“나는 안 죽는다.”
남태수는 다나를 바라보았다.
“이단심문관은 광전사에 사제를 더한 거라 자체 생존기 빵빵한데요.”
“으아아 사령술사가 또!”
그렇게 곡괭이질이 시작되었다.
깡! 깡!
“아니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아예 지하에서 시작하는 스테이지.
당연하게도 전후좌우는 물론 위아래로도 스테이지의 대부분이 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러한 스테이지에서 곡괭이질을 한다는 것은 그냥 스테이지를 통째로 파내겠다는 뜻.
“끝이…… 없잖아?”
심지어 마법직인 사령술사에게는 피지컬을 보조해줄 수단도 없었다.
“진짜로? 어디 체력 흡수 패시브 같은 거 없어?”
남태수는 자신이 원해서 고른 것도 아닌 직업에 고통받으며 혹시라도 도움이 될 스킬은 없는지 스킬트리를 훑어보았다.
이미 백번도 넘게 훑어본 스킬트리에서 이제 와 새로운 스킬이 발견될 리는 없었으나, 다른 건 발견할 수 있었다.
“사룡왕?”
[폐하라 부르거라 폐하. 그보다 상태창은 왜 이리 안 보는 게냐? 기껏 시스템 메시지를 해킹해서 전언을 남겨놨더니 당최 보질 않으니…….]
“한동안 애들을 돌보느라 정신없었거든요.”
틈만 나면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애들이라 남태수도 24시간 긴장을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렇다고 소환을 해제해뒀다간 75층 공격대가 기습을 걸어올 수도 있었으니 그럴 수도 없었고.
‘어째 레벨 업으로 체력이 늘어나는 것보다 고생으로 체력이 줄어드는 게 더 빠른 느낌이…….’
[전에 기분을 내느라 실시간 연결까지 시도했더니 한동안은 이런 식으로 대화하는 게 한계이니라.]
스킬 설명란의 문구가 계속해서 변하며 채팅처럼 사룡왕의 말을 옮겼다.
[그래도 일단 대화가 되니 이걸로 사령술을 한 수 가르쳐줄 수 있을 테지.]
“무르무르가 가르쳐주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데요?”
[여가 그걸 몰라서 이러는 줄 아느냐? 네놈이 아니라 바로 그 리치를 가르칠 것이니라 리치를!]
일단 무르무르를 가르쳐놓으면 나중에 무르무르가 남태수에게 가르쳐주면 된다.
남태수가 죽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둘은 계속 붙어 다닐 테니 아무나 한 명만 가르쳐놓으면 되는 것.
[네 시스템 창은 네게만 보일 테니 여가 불러주는 내용을 받아 적어 그놈에게 보이도록 하거라.]
그리하여 낮에는 곡괭이, 밤에는 사령술을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이, 이 나이에 공부라니?”
[배움에는 끝이 없느니라. 아가리 하고 손이나 움직이거라.]
사룡왕은 시스템의 번역 때문인지 그냥 본심인지 모를 애매한 소리를 해대며 그를 농락했다.
[네놈은 글씨가 무슨 그따위냐? 시스템도 글자가 아니라 그림으로 판단해서 번역하다 말고 중간부터 지렁이가 기어가지 않느냐?]
“힝.”
[저 개과녀는 왜 안 되는 룬 마술을 잡고 낑낑대는 것이냐? 설마 룬 마술로 가슴을 키워보겠다고 저러는 것이냐?]
“왜 그렇게 봐요?”
다나와 눈이 마주쳤으나 다행히 그녀는 사룡왕의 메시지를 볼 수 없었다.
[잠깐 묻고 싶은 게 있으니 기다려 보거라.]
“갑자기 뭔데요?”
[휴우. 다 묻고 왔느니라. 한 달 뒤에 파보면 예쁘게 뼈만 남아 있겠지.]
“아니 진짜 뭔데요? 사람 무섭게!”
[여도 네놈들이 먹던 그 부대찌개라는 것의 맛이 궁금해지는구나. 어디 보자 재료가 햄, 소시지, 대파…….]
“남의 스킬창을 메모장으로 쓰지 말아주실래요?”
“그러고 보니 제 쪽에서는 메시지만 보이는데 어떻게 폐하는 제 말이나 행동도 알 수 있는 거죠? 설마 저 감시당하고 있는 건가요?”
[정답이니라. 여의 능력이라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
“그럼 제 인권은……?”
[인권……?]
“엑.”
이 사악한 리치 드래곤에게 인권 같은 개념 따윈 없었으므로 남태수에게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었다.
“정신 나갈 것 같아. 정신 나갈 것 같아. 정신 나갈 것 같아.”
“태수 아재를 옆에서 보고 있는 입장으로선 이미 나간 것 같은데요.”
“음. 이젠 곡괭이질도 좀 익숙해진 것 같군. 할당량을 늘려도 되겠어.”
“히끅.”
가공할 공포가 엄습하자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성진은 몸 쓰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전문가였다.
그가 남태수를 쥐어짜낼 때는 정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알뜰살뜰하게 쥐어짜는 편.
이미 남태수는 죽지 못해 사는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늘린다고요? 이미 언데드를 뺑뺑이 돌리면서 저 자신까지도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데?”
“애초에 넌 체력 단련이 더 필요한 상태다. 레벨이 오르며 기본능력이 강화됐으면 필요한 운동량도 늘어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마법사라도 체력이 중요한 건 똑같았다.
체력이 늘면 집중력도 늘어나니까.
일반 플레이어라면 몰라도 스킬이 아니라 마법을 직접 사용하는 남태수에게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걱정 마라. 속 편히 뻗어 버리게 놔두진 않을 테니.”
이렇게 시달리다 그날의 곡괭이질이 끝나면, 다음은 다시 사룡왕이었다.
“이게 정녕 인간의 삶이란 말인가? 아냐 그럴 리 없어. 이딴 게 인생일 리 없지.”
그리고 마침내 해방의 날.
“스테이지 내의 마법석을 전부 캤군. 맵 바깥에 있는 것까지 캐면서 가는 건 비효율적이겠지.”
“기어이 이걸 다 캤네…….”
성진은 더 이상 파낼 게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야 노가다를 중단했다.
“자, 그럼 이제 77층을 캐러 가볼까.”
“예?”
“에렉투스의 지하대던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남태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