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남태수에게는 천만다행히도 77층까지 전부 파야 할 일은 없었다.
“단순한 몬스터만 등장하던 76층이랑은 달리 여기선 난쟁이가 등장하는군.”
처음 난쟁이들을 마주쳤을 때, 남태수는 흠칫했다.
직전까지 거인들에게 시달린 걸 생각하면 난쟁이라고 안심할 순 없었다.
‘걸리버도 거인국, 난쟁이국 양쪽 다 고생했잖아?’
그러나 이어진 모습에 남태수는 경계를 풀었다.
“살려주십시오! 항복하겠습니다! 여긴 모두 민간인뿐입니다! 전사가 아니니 싸울 생각은 없습니다!”
“적이 아니라 아군인가 본데요?”
“글쎄.”
성진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에 남태수와 다나는 의문을 표했으나 그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백문이 불여일견.
무기를 집어넣고 난쟁이들에게 다가가자 설명할 것도 없이 난쟁이들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햣하! 속았구나 멍청한 인간! 죽어라!”
갑작스럽게 돌변한 난쟁이들은 숨겨두었던 기관총과 로켓포를 꺼내 협박도 경고도 없이 대뜸 모든 화력을 쏟아 부었다.
“으아아아 이게 뭐야 살려줘요!”
남태수는 황급히 바닥을 나뒹굴며 도망쳤고, 다나는 침착하게 바닥을 베고 참호를 만들어 그 안에 숨어들었다.
반면 성진은 그냥 그곳에 서 있었다.
파바박!
폭발적인 움직임에 옷자락이 공기를 터뜨리는 소리.
이어서 총성이 멈추고 나자, 성진의 손에서 탄환들이 떨어졌다.
“슬슬 총알 정도는 보고 잡을만하군.”
“허?”
날아오는 총알을 한 손으로 모두 잡아낸 모습.
그 어이없는 광경에 몬스터로 등장한 난쟁이들조차 얼빠진 소리를 냈다.
“저, 저 인간은 완전히 돌아 버린 인간이다 모두 도망쳐!”
안타깝게도 성진의 눈앞에서 도망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애초에 그들이 천사에게 죽을 일도 없었으리라.
난쟁이들은 뼈와 살이 그대로 남은 채, 영혼과 육신만이 분리되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성진의 근력으로 툭 치면 억하고 죽었으니까.
-억! 응? 이미 죽었네.
-이야 분명히 주먹으로 맞았는데 아프기 전에 죽어서 아프지도 않네.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NPC 생활 30년의 베테랑 난쟁이들은 자신의 죽음에도 무덤덤했다.
다른 층의 NPC들과 달리 이곳은 관리자가 방치한 구간.
천사에게 고문당할 일은 없었다.
플레이어와 싸우다 죽는 것 말고는 고통도 없었을 뿐더러, 플레이어가 스테이지의 모든 몬스터를 잡고 지나가는 것도 아니기에 보스가 아닌 이상 자주 죽는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난쟁이들은 나름대로 이곳에 적응한 상태였다.
-키야 역시 특이점이야.
-모가지 따는 거 하나는 도가 텄구만?
-오랜만일세. 나 기억하나? 옛날에 여기서 본 적 있는데.
“기억이 안 나는군. 친했나?”
-아니 그건 아니고…….
천상과의 전쟁은 무수한 차원에 걸쳐 벌어진 일.
성진은 차원을 오가며 수많은 사람들과 만났지만, 그 숫자가 아무리 많아봐야 전체 희생자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때문에 무르무르처럼 성진에 대한 것을 아는 자도 있을지언정, 지금까지 성진과 안면이 있었던 영혼은 티타니아가 유일했다.
-아무튼 오랜만이오 대전사.
하지만 이곳의 난쟁이들은 달랐다.
-그대가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면 대계가 멀지 않은 모양이군?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길어봐야 몇 년 안에 모든 게 끝날 거다.”
성진이 실패한다면?
그 경우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이 이상 나빠질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하지만 성진이 성공한다고 해도 이곳의 난쟁이들에게는 마냥 좋은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미 죽은 몸. 각오는 되어 있소.
죽은 자는 떠나야 하는 법.
제때 죽지 못한 미련은 30년의 시간 속에 모두 녹아내렸다.
그들은 탑이 무너지고 자신들의 영혼이 원래 가야 했던 곳으로 떠날 순간까지 모든 노력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망치가 그대를 인정한 그날 이후 모든 난쟁이 전사들은 당신을 따르기로 맹세했소. 죽음조차 전사의 맹세를 되돌리진 못할지니, 우리는 끝까지 그대를 따를 것이오.
난쟁이 전사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성진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다른 애들은?”
-다른 애라면?
“전사 말고. 장인들.”
난쟁이들은 성별과 연령, 국가와 부족을 가리지 않고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전사와 장인.
대장장이 신의 망치가 성진을 인정한 후로 모든 난쟁이 전사들은 성진을 따랐지만, 장인들은 아니었다.
망치는 어디까지나 난쟁이 삼신기 중 전사들의 신기.
심지어 당시의 왕은 장인 출신이었으며, 난쟁이들은 에렉투스의 지하대던전을 만드는 등 장인으로서 연합군에서 활약하고 있었다.
이런 까닭에 난쟁이 왕은 성진에게 망치를 내어주길 거절했고, 에렉투스의 지하대던전이 무너질 때 천사에게 죽었다.
전사였던 왕자는 전투 중에 왕위를 물려받자마자 성진을 대전사로 삼고 난쟁이의 신물인 망치를 넘겼다.
이후 망치는 성좌의 피를 머금고 성장하여 천사 파쇄기라고도 불리게 되었지만 그건 다른 이야기.
어쨌거나 이러한 일들 덕분에 전사파와 장인파는 사이가 안 좋았다.
“전사가 활약하는 것은 탑이 무너진 다음이고. 지금 필요한 건 차원문을 만들어줄 장인이다.”
티타니아가 30층에 만들고 있는 차원문은 천상으로 쳐들어가기 위한 발판이었다.
따라서 이 차원문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차원문보다 크고 튼튼해야만 했다.
-크흠, 그거라면 분명 중요한 일이지만, 장인파 난쟁이들은 이 층엔 없소. 그치들은 대부분 높으신 양반들이라 안쪽까지 가야 있지.
“장인의 숫자는 몇이나 되지?”
-글쎄 그리 많진 않을 텐데. 아무래도 장인들은 죽은 뒤에도 여기저기 부려 먹히니까.
성진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듣고 있던 남태수가 끼어들었다.
“여러분만으로는 어떻게 안 되나요? 같은 난쟁이인데.”
-지구인들은 축구선수를 데려다 핵미사일을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 있소? 같은 인간인데.
“골치 아프게 되었군.”
티타니아라면 차원문을 만들 수야 있었다.
그러나 그녀 혼자서는 연합군 전체가 움직일만한 규모의 차원문을 만들긴 힘들었다.
하물며 탑에 묶여 있는 상태가 아닌가.
“차원문의 규모가 당초의 계획보다 작아진다면 그만큼 병력의 집결이 늦어질 테고, 진격의 타이밍도 지연된다.”
성좌들에게 대비할 시간을 줬다간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몰랐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뭔가 방법이 있나요?”
“탑 안에 장인이 없다면 바깥에서라도 구해와야지. 춘식이 영혼을 펴 발라서라도 나갔다 오는 걸 시도해봐야…….”
-사, 살려주세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넌 이미 죽어 있다.”
-그러고 보니 나 죽어서 영혼만 남아 있는 거였지? 그, 그럼 가만히 죽어 있게 놔둬 주세요……?
정신 나간 소리에 정신 나간 반응만이 오갈 뿐이었다.
“쓸모없는 놈.”
성진의 말에 춘식은 당황하며 그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쓸모가 없으면 자신은 버려진다.
어디에?
티타니아의 손에.
-중요한 건 탑 안팎을 오가는 게 아니라 차원문을 잘 만드는 거잖아? 그거라면 방법이 있어!
“말해봐라.”
어디 한번 씨부려 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성진의 표정에 춘식은 움찔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100층! 100층까지만 가면 난쟁이 장인을 대체할 무언가든, 땜빵하고 있던 재료를 온전한 걸로 교체하든 할 수 있어!
“100층? 100층이라면…….”
-어스름 수도회 스테이지!
이어진 춘식의 말은 사룡왕이 보았던 것들을 확인해주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어스름의 성녀가 있어!
* * *
“그게 도대체 뭐였지?”
“예? 그거요?”
“네놈이 나한테 준 것 말이다.”
레벨 제로.
일반적인 플레이어는 티타니아와 달리 시스템으로 부여받은 레벨을 빼앗기면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
그리하여 굴라그는 초인 수감시설이 아니라 일반인 수감시설로 만들어져 있었고, 힘을 얻은 빅토르의 탈출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걸 흡수한 순간 잃어버린 것보다도 많은 힘이 손에 들어왔다. 사도 놈들이 빼앗아간 것보다도 더 큰 힘이 돌아왔단 말이다!”
빅토르 이바노비치 카렐린.
한때 299레벨이었던 플레이어이자,
흡혈귀 혈마법사이자,
사도가 되지 못한 자.
지구상 300레벨을 넘은 자가 12명뿐이며, 그들이 모두 사도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흥분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조그마한 앰플 하나로 이만한 힘을 얻다니. 도대체 내가 마신 건 누구의 피냐?”
2미터가 넘는 거구의 사내가 따져 묻자 센트럴 시티에서 곧장 달려온 49레벨 플레이어는 자연스레 몸이 움츠러들었다.
“보, 보스가 주신 거라고 밖엔…….”
“보스?”
그 말에 남자는 베르나데트가 지시한대로 성좌의 진실을 제외한 정보를 털어놓았다.
“…… 그래서 세계정부를 무너뜨릴 생각이니 협조를 해달라는 건가?”
“예, 아니, 꼭 협조가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굴라그 수감자 여러분이 이렇게 감옥에서 나와 있는 것만으로도 놈들이 압박을 받을 테니까요.”
“무슨 소리!”
빅토르는 그를 질책했다.
“사도를 갈아 마시는 건 내 어릴 적 꿈이었다! 당연히 협조해야지!”
젊은 나이에 굴라그에 처박혀 거의 30년에 가까운 세월을 썩은 빅토르는 사도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탔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릴 탈출시켜준 게 그 새끼들을 조지려는 작자라고?”
“거기 혹시 사람 부족하지 않나? 우리가 사실 꿍쳐놓은 미사일이랑 잠수함이 좀 있는데.”
플레이어 군인으로 군부를 교체하며 잘려나간 재래식 군대의 군인들.
“계속 도망쳐 다닐 순 없지.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놈들을 쳐야 해.”
“내가 인류해방전선 본부와 연락할 수 있네. 거기 대장이 내 후배야.”
정치적으로 숙청된 반체제 인사들.
“세계정부가 무너지면 우리 형량도 백지화되나?”
그냥 범죄자들까지.
아무렇게나 긁어 모인 인원들이 세계정부에 대한 분노로 똘똘 뭉치자 대환장파티의 전조가 흘렀다.
“다들 의욕이 충분하신 것 같네요. 그렇다면 보스께서 맡기신 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는 베르나데트에게서 받아온 스킬북들을 꺼냈다.
“이제 와서 무공? 어차피 우리는 레벨 제로 상태라 스킬도 못 쓴다고.”
“아니오, 여러분들은 이 스킬북을 통해 진짜 무공을 배울 겁니다.”
“흠?”
“성좌에게 받아쓰는 것이 아닌, 진짜 자신의 힘. 여러분은 사도가 빼앗아 갈 수 없는 진짜 무공을 배울 겁니다.”
요정향, 센트럴 시티의 플레이어들에 이어 탑 바깥의 플레이어들까지.
혁명군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