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타이탄.
난쟁이 장인의 모든 기술력을 집약해 만들어낸 이 기계병기는 난쟁이 전사의 모든 힘을 이끌어내기 위해 만들어졌다.
[타이탄 격납고였나! 과연 그렇다면 거주구획에 연결되어 있는 것도 이해가 가는구나.]
“이거 군사무기 아니에요? 오히려 밖에 있어야 하는 게 아닌지…….”
[타이탄은 전사가 직접 탑승해 조종하는 병기니라. 난쟁이의 다리로 뛰어나가는 것보다 타이탄을 타고 나가는 게 빠를 테니 숙소 근처에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조명이 줄줄이 켜지고 있음에도 끝이 보이지 않는 초대형 격납고.
그 안에는 남태수가 1층에서 본 수호거상과 같은 기갑 골렘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사룡왕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하는 한편 남태수를 추궁했다.
[헌데 네가 어떻게 이 시설을 열 수 있었던 것이냐? 내 사도가 그릇은 난쟁이처럼 작을지언정 종족은 인간일 텐데.]
“아 그게요.”
남태수는 인벤토리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두었던 수호거상의 핵을 꺼내 들었다.
[수호거상의 핵]
레전더리 재료 아이템
골렘 소환의 재료로 사용됩니다.
소환 시 골렘에 모든 스탯 +40
소환 시 골렘에 물리 저항력 +800
소환 시 골렘에 속성 저항력 +620
소환 시 골렘에 저주 저항력 +40
(재료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해 효과가 저하됩니다. 수리를 권장합니다.)
탑의 1층에서 얻은 전설급 아이템.
그가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을 사실상 졸업템으로 써먹고 있는 걸 생각하면 같은 등급인 수호거상의 핵 또한 상당한 물건이리라.
“근데 처음 골렘 소환 스킬을 배웠을 때, 이걸 촉매로 소환을 해봤는데…….”
[해봤는데?]
“비정상적인 액세스라며 자폭하려고 하던데요. 대기실에서 시험해본 거라 다행이지 스테이지에서 썼다면 죽었을 걸요.”
[그야 난쟁이가 아니라 인간이 타이탄을 활성화 시키려 했으니 당연한 일이니라. 그보다 이런 보물을 가지고 있었다면 진작 말할 것이지!]
“이게 그렇게 귀중한 거예요? 성진 씨도 딱히 신경 안 쓰시고, 저도 써먹을 수가 없어서 그냥 등급만 보고 팔 생각으로 가지고 있던 건데.”
[여의 계약자는 애초에 신성무구가 아니면 의미가 없으니 그렇지! 자신의 몸이 최종병기나 다름없는데 그보다 약한 무기를 어떻게 쓰겠느냐.]
대부분의 무기는 성진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적을 으깨기 전에 무기가 먼저 으깨졌다.
덕분에 템빨을 받지 못하고 항상 맨손으로 싸우던 성진은 늘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에렉투스가 무너지던 날, 난쟁이 결사대가 목숨을 걸고 가져온 청동망치를 손에 쥐고서야 그는 제힘을 낼 수 있었다.
[장인파가 모두 죽은 지금, 타이탄 코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말하자면 로스트 테크놀로지인 셈이니라.]
“여기 격납고에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데요?”
[이것들은 외장갑만 늘어놓은 껍데기일 뿐이니라. 중요한 것은 네가 가지고 있는 코어이지.]
흔히 마법사들이 부리는 골렘은 핵만 있으면 몸통은 주변 재료를 이용해 아무렇게나 만들어 붙일 수 있었다.
흙도, 물도, 강철도, 심지어는 살아있는 생물의 피와 살조차도 얼마든지.
이곳에 늘어선 기계장치들은 바로 그런 추가 장비일 뿐.
남태수의 손에 들린 코어야말로 진짜 타이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수리할 방법을 찾아 보거라. 이곳이라면 정비를 위한 설비가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
“그렇게까지 할 정도예요?”
1층에서 수호거상이 성진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나는 모습을 보았던 남태수는 의욕이 없었다.
그러나 사룡왕은 달랐다.
[네가 1층에서 본 건 그저 탑의 시스템이 껍데기만 기워 붙인 것에 불과하다. 아니, 붙이지도 못했겠지. 그냥 얹어놓은 수준일 테야.]
온전한 타이탄 코어라는 건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타이탄은 난쟁이들이 성좌를 잡기 위해 만든 것이니라. 알겠느냐? 천사가 아니라 성좌를 잡기 위한 무구란 말이다!]
필멸자가 신성존재를 잡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술력의 결정체.
물론 타이탄을 탄다고 성좌와 1:1로 싸울 수 있는 건 아니고, 타이탄 부대를 꾸려야겠지만 어쨌든 강력한 건 사실이었다.
[이곳을 다 뒤져서라도 반드시 고쳐야 한다! 여는 타이탄의 사용법을 알아보고 올 테니 그때까지 고쳐놓도록!]
사룡왕은 그 말을 남겨놓고 인간을 정식 사용자로 등록할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사라졌다.
덕분에 남태수는 무르무르와 함께 이 넓은 시설을 다 뒤져야만 했다.
“일단 언데드를 뿌려서 눈에 띄는 게 있는지 찾아보자.”
남태수는 언데드를 시키는 한편, 자신도 직접 격납고를 돌아보았다.
“거 난쟁이 아저씨들은 여기에 대해 뭐 아는 거 없어요?”
-글쎄다…… 타이탄 기수는 전사 중에서도 최고의 전사들만 도전할 수 있었던 영역이라.
-타이탄은 당시 개발된 지 얼마 안 된 신무기였다. 정보가 극비리에 다뤄진 건 물론, 타이탄 기수도 예비인원을 포함해 총 100명 남짓이었단 말이다.
종족 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의 엘리트 전사가 아니라면 관련 정보를 취급할 수 없었다는 뜻.
이 스테이지에서 나오는 적들은 대부분 무인병기였다.
덕분에 그간 그들 파티가 해방시킨 난쟁이 영혼은 얼마 되지 않았던지라 타이탄에 대한 정보를 가진 이들은 없었다.
“그럼 결국 직접 알아봐야 한다는 건데…….”
남태수는 다시금 격납고 내부로 시선을 돌렸다.
격납고에 늘어선 거상들은 확실히 군사 장비라 하기에는 너무 가지각색인 모습이었다.
“그나저나 이름이 타이탄이라니 묘한 느낌이네. 난쟁이들이 거인족에 타는 것 같잖아.”
-그거야 한 번 번역을 거친 이름이니 그럴 겁니다.
“번역? 아 그러고 보니 너도 한국어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
탑의 시스템은 탑 내부에 등장하는 문자나 언어를 실시간으로 번역해준다.
이에 따라 탑에서는 바벨탑이 무너지기 전처럼 모두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 번역시스템은 카르마를 이용해 직접 뜻을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덕분에 두 가지 특성이 있지요.
“하나는 알 것 같네. ID 문제지?”
-네 맞습니다. 카르마 번역은 법이나 언어규정을 따르는 게 아니기에 플레이어의 ID는 실제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장 많이 불린 이름으로 등록됩니다.
두 번째는 단어의 치환에 관한 것이었다.
-카르마 번역은 보고 듣는 사람의 인식에 직접 작용합니다. 때문에 새로운 단어가 나올 경우,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과 가장 가까운 말로 치환하게 되지요. 뜻이 달라지더라도 말입니다.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대충 뜻만 통한다는 건가?”
-네. 구체적으로 예시를 들어보자면, 마스터는 지구 문화권에 익숙하기 때문에 탑에서도 해당 단어들을 자주 접할 수 있겠지요.
75층의 보스였던 아틀라스도, 난쟁이의 타이탄도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름이었다.
즉, 지구인이 아니면 알아들을 리 없는 말인 것.
이는 그것들이 실제로 그런 이름이라는 게 아니라, 남태수에게 맞춰서 그런 이름으로 번역되는 거란 뜻이었다.
“그럼 내가 타이탄이라고 말할 때, 너는 다른 단어로 듣고 있겠네?”
-맞습니다. 이러면 고유명사도 다른 단어로 바뀐다는 문제가 있지만, 카르마 문화권에서는 발음보다도 뜻이 중요하니까요.
말에 구애되지 않고 카르마에 실린 뜻 그 자체를 전달하는 방식.
-애초에 소리가 아니라 전기 신호나 마력감응으로 대화하는 종족도 있는데.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게 번역하려면 다소의 오차는 감수해야지요.
서로 제각각인 종족들이었지만, 카르마에 묶여 있다는 사실 하나는 똑같았다.
때문에 카르마를 이용해 대화하는 편이 가장 편리했던 것,
말하자면 언어가 아니라 생각을 번역하는 텔레파시 같은 셈이었다.
“대충 마법으로 뿅 하고 되는 게 아니었구나.”
-그러니 심상치 않은 이름으로 번역되는 적이 튀어나오면 일단 도망치십시오. 탑의 번역 시스템은 이름값을 하는 편이니까 말입니다.
무르무르로서는 이 말이 하고 싶어서 앞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었다.
남태수는 그 말을 기억하며 격납고에 가득한 타이탄들을 살폈다.
마력을 다룰 수 있게 된 덕분에 마도공학에 대한 지식이 바닥인 남태수도 어느 정도는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코어가 핵심이고 외장은 사실상 교체용 파츠인가 보네.”
용도에 따라 크기도 형태도 제각각인 외장들.
이들은 코어만 꽂으면 바로 작동할 수 있게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로 탑승하는 건가?”
“이건 탑승이 아니라 갑옷처럼 입는 형태네.”
“얘는 다리가 장식인가? 비행 용인가 봐.”
영화에서나 보던 기계장치가 한가득한 모습에 남태수는 누가 남정네 아니랄까 봐 두 눈을 빛냈다.
-꽤나 마음에 드시나 봅니다, 마스터?
“그치만 로스트 테크놀로지 로봇이라잖아!”
격납고에는 타이탄의 장비도 한가득했기에 남태수는 그것들도 뒤져보았다.
“레이저가 나가는 빔 라이플 같은 건 없나? 광선검이라든가?”
-광선검이나 빔 샤벨을 만드느니 차라리 검기를 쓰겠지요. 어차피 숙련된 전사들이 탈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와 이건 엄청 크네. 카이주도 찢을 수 있겠다.”
-마스터께선 그것보단 차라리 사도를 찢으셔야 합니다만.
안타깝게도 보라색 타이탄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정비시설로 추측되는 새로운 공간이 그들을 맞이했다.
-보아하니 저곳에 코어를 올려놓고 어떻게 하는 건가 봅니다.
수호거상의 핵은 사람 머리통만 한 구 형태로 되어 있었다.
마침 그곳에는 딱 맞는 크기의 거치대가 있었으므로 그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 기능을 어떻게 작동시키는 건지 모르겠는데. 혹시 뭐 아는 거 없어요?”
남태수는 데리고 있던 난쟁이 영혼들에게 질문해보았으나 대답은 아까와 같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잘 모른다.
-애초에 스테이지 끝자락에 걸쳐서 구현된 설비가 제대로 작동할지도 의문이고.
-일단 하나씩 가동해보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어쩔 수 없네. 그럼 전원 버튼은…… 가장 큰 게 전원이겠지?”
-마스터? 잠ㄲ……!
남태수의 손이 크고 빨간 버튼을 누른 순간 시공이 뒤집어졌다.
스테이지를 이동할 때 몇 번이고 느껴본 공간전이의 감각.
[해당 좌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테이지를 신설합니다.]
[영혼에서 기억 추출 중…….]
[지형 생성 중…….]
[NPC 배치 중…….]
[보스 몬스터를 지정.]
[스테이지 생성을 완료했습니다.]
[대전기, 에렉투스 공방전.]
[천사들을 도와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리십시오.]
“우왓!”
갑자기 발밑이 변하자 반사적으로 넘어지지 않게 자세를 잡은 남태수는 황급히 주변을 경계했다.
“스테이지를 새로 만들었다니 그게 무슨…… 그보다 여긴 어디야? 성채구획?”
주거구획으로 들어서기 전에 계속 보았던 구조.
적어도 완전히 이상한 곳으로 이동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천사들을 도와 보스 몬스터를 쓰러뜨리라니? 설마 관리자가 왔나? 그건 아니겠지?”
-일단 어딘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개방된 공간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남태수는 마침 출입구가 많고 다른 건물과 실내로 이어진, 적당히 숨어 있기 좋은 건물을 발견하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뭐시여?”
“인간? 혹시 당신이 그 특이점인가 뭔가 하는 그건가?”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난쟁이들과 마주쳤다.
언데드도 안 불러놓은 상황에서 대량의 적들과 근접전은 위험.
남태수는 반사적으로 보호마법부터 치면서 몸을 빼려고 했으나, 뒤에는 더 무서운 적이 있었다.
펄럭.
새의 날갯짓을 닮은 소리.
돌아본 그곳에는 천사가 그를 향해 창을 겨누고 있었다.
우우웅!
“특이점을 따라온 건가!”
“발사되기 전에 막아!”
남태수 또한 천사의 창끝에 모이기 시작한 대량의 마력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파괴광선?’
어째서 천사가 여기 등장한 진 모르겠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천사의 파괴광선을 코앞에서 직격당하면 시체도 안 남으리라.
“무르무……!”
황급히 무르무르와 교대하려는 찰나.
콰직!
위에서 떨어져 내린 성진이 천사를 짓밟으며 통째로 으깨 버렸다.
“성진 씨!”
찰나의 순간에 위기를 넘긴 남태수는 감격하여 성진에게 매달려 들었으나 성진은 그런 그를 피하며 멱살을 잡았다.
“뭐냐 넌?”
“예?”
코앞에서 얼굴을 마주한 상황.
남태수는 멍하니 성진의 머리 위에 떠 있는 ID를 확인했다.
일반적인 ID와는 거리가 먼, 3줄짜리 ID.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건 역시 첫 번째 줄.
“보스……?”
플레이어에겐 붙을 리 없는 그 문구가 남태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를 잡는 스테이지라고 했는데.”
보스 몬스터로 등장한 NPC 성진은 말없이 남태수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