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성진은 가끔 스테이지를 진행하며 길이나 상황, NPC 등을 미리 알고 있곤 했다.
남태수가 그 점을 물어보자 성진은 스테이지의 생성방식을 설명해주었다.
‘탑의 스테이지는 붙잡아둔 영혼의 기억에서 뽑아내는 거다.’
‘영혼의 기억이요?’
‘그래. 현실에 실존하는 장소와 사건, 사람들을 이용해 만들어져 있지.’
따라서 현실의 원본을 이미 알고 있다면 그 지식을 활용할 수 있었다.
‘이 방식의 특성상 영혼들이 기억하는 것만 불러올 수 있다는 문제가 있지만 그건 스테이지를 만들 천사 놈들이 걱정할 문제지.’
스테이지는 관리자들이 현장을 확인하고 만들며, 성좌는 방향성만을 지시할 뿐이었다.
탑마다 들어가는 영혼이 다 다른 데다, 그 탑에 도전할 플레이어들의 종족도 가지각색이니 어디서나 쓸 수 있는 공통 스테이지 따윈 없기 때문.
‘그럼 티타니아 같은 초강력 NPC가 더 등장할 수도 있겠네요? 멀리 갈 것 없이 티타니아의 기억이 있으면 성진 씨도 NPC로 등장시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야 그렇다만 나를 NPC로 내보내는 것이 플레이어들의 성장에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군.’
남태수도 그 말에 동감하여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있었다.
이 인간은 지구의 인류가 상대하기엔 너무 강하다.
인간의 성공사례로 보고 배울 수도 없는 게, 성진은 온갖 신성존재들이 ‘저게 뭐야 왜 저렇게 세?’하며 특이점이라 부를 정도의 존재였다.
저게 따라한다고 되는 거였으면 이미 온 세상에 신성존재가 가득했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성진이 NPC로 등장한 건 남태수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물며 그게 자신이 잡아야지만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스테이지 보스라면 더더욱.
-잘은 모르겠지만 마스터, 생각은 나중에 하고 일단 대답부터 하시죠.
‘응?’
-계속 그렇게 가만히 계시다간 죽을 겁니다.
눈앞의 성진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넌 뭐지? 어째서 네 영혼이 보이지 않지?”
“으힉! 진정하세요, 성진 씨! 저는 사룡왕 폐하의 사령술사라고요. 적이 아니에요.”
NPC 성진에게 멱살을 잡힌 남태수는 검은 불꽃을 피워 올리며 자신이 사령술사임을 밝혔다.
‘보스 몬스터라도 결국 성진 씨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면 대화가 통할지도 몰라!’
NPC 성진은 전에 없이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남태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성진이라는 사람을 ‘아군’으로 여기고 있던 남태수는 그가 아무리 보스 몬스터라고 해도 무섭지 않았다.
“그 녀석이 보낸 건가.”
다행히도 NPC 성진은 검은 불꽃을 보고 남태수를 놓아주었다.
“내 눈으로도 영혼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니. 성좌를 상대하기 위해 또 이상한 걸 만들어낸 모양이군.”
남태수가 그 말이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자 보고 있던 무르무르가 말했다.
-탑의 시스템에는 플레이어가 NPC에게 정신계 공격을 당하지 않도록 락이 걸려 있습니다. 계약자께서도 NPC로 등장한 상태라 마스터를 감지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눈앞의 존재는 진짜 NPC로 구현된 성진이 맞다는 뜻이었다.
-마스터. 저희는 아까의 공간전이로 뭔가 별개의 스테이지로 넘어와 버린 모양입니다만, 이런 상황이라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 마침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있는 최강의 NPC가 남태수를 아군으로 여기는 이상, 그가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나를 이곳에 던져놓고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대타를 보내놓은 건가. 뭐, 됐다. 그래서 나는 여기서 뭘 하면 되는 거지?”
NPC 성진은 남태수를 사룡왕의 대리인으로 여기고 그에게 지시를 부탁했다.
“그러면 일단 여기를 벗어나죠.”
“어디로?”
“어……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NPC 성진은 남태수의 멍청한 답변에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난 차원이동 따위의 마법은 못 쓴다. 그리고 여긴 전 차원이 천사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태라 도망칠 곳도 없다.”
“예?”
쿠르릉!
남태수는 그제야 아까부터 울려오는 소음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이건?”
에렉투스의 지하대던전은 이름 그대로 지면 아래, 지하에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그러나 지금.
건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남태수는 지하에서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별? 아니, 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데? 인공위성이 저렇게 많을 리는 없고. 그러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은하수처럼 하늘 위를 가득 메운 별들.
그러나 그 점들은 별이 아니었다.
“천사?”
탑의 스테이지가 실존하는 공간을 불러온 것이라면, 스테이지마다 다른 공간이 아니라 같은 공간의 다른 시간대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뜻.
-아무래도 저희는 지금 천상의 침공이 이뤄지고 있던 당시의 에렉투스에 와 버린 것 같군요.
“무인병기만으로 막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사룡왕이 네게 따로 지시한 사항은 없나?”
“저, 저거 천사가 지금 몇이나 되는 거죠?”
“적의 숫자를 내가 어찌 아나?”
-당시 기록상 에렉투스에 투입된 전투천사는 약 4,200억입니다. 상위 천사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그럼 아군은?”
“나. 그리고 너.”
그 말에 못 박힌 듯 하늘을 바라보던 남태수는 어이가 없어 성진을 돌아보았다.
“난쟁이 왕은 모든 구획을 닫고 농성에 들어갔다. 에렉투스는 지금 한 층씩 돌파당한 곳을 분리해 버리는 식으로 버티고 있다.”
“여기도 지금 천장이 뚫렸는데요?”
“그래서 회생불가 판정을 받고 분리 당했지. 대피하지 못한 민간인 40만 명과 함께.”
장인파와 난쟁이 왕은 자신의 백성을 버렸다.
그러나 다른 차원에서 온 한 인간은 그들과 함께 분리되는 구획에 남았다.
“그럼 건물 안에 있던 난쟁이들은…….”
“아직 대피하지 못한 시민들이다. 아니, 사실상 대피할 방법도 없지. 왕이 아예 구획을 분리시켜 버렸으니까.”
왕이 버린 자들.
이계에서 온 전사만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4,200억의 적을 상대로.
단 한 사람만이.
“당장 계획이 없다면 생각하고 있어라. 일단 저놈들부터 처리하고 오지.”
성진은 그렇게 말하곤 제자리 도약만으로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졌다.
난쟁이들은 남은 남태수에게 다가왔다.
“특이점이 아니라 특이점의 동료셨군? 젠장, 망할 우리 왕 때문에 고생이 많소.”
그들은 자신들을 버린 왕에게 적대심을 숨기지 않았다.
“망할 왕이 저 위대한 전사에게 걸맞은 무기만 내어줬어도…….”
천사를 밟아 죽이고 남태수의 멱살을 잡던 NPC 성진은 아무런 무기가 없는 맨손이었다.
아무리 성진이라도 맨손으로 저만한 숫자의 적들을 상대할 수는 없기에 에렉투스는 계속해서 구획을 내어주며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무기라면 청동망치를 말씀하시는 거죠? 왜 성진 씨한테 청동망치를 주지 않는 거죠?”
“그야 저 멍청한 왕은 신기를 들고 나가 싸웠다간 결국 성좌들에게 신기를 빼앗기리라 걱정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왕이 보기엔 아무리 강한 전사라도 끝없이 밀려오는 천사를 홀로 막아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괜히 신기를 쥐어 주었다가 성진이 전장에서 사망하기라도 하면 신기는 그대로 성좌들의 손에 들어가는 셈이었다.
“하지만 성진 씨는…….”
“그래. 질 리가 없지. 신기 없이도 저렇게 강한 전사라면 어쩌면 성좌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겁 많은 장인 놈들과 우리 왕은 전장에 나오질 않으니 저 모습을 알 리가 있나!”
난쟁이 왕은 난쟁이도 아닌 이계의 인간에게 자신들의 신물을 맡기길 거부했다.
덕분에 성진은 망치만 있다면 금방 쓰러뜨릴 수 있는 적들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었으며, 에렉투스의 방어선은 계속해서 밀려나고 있었다.
“전사에게 망치가 있다면…….”
모든 난쟁이가 성진에게 망치를 넘기자 외치는 와중에도, 왕과 장인파는 성문을 걸어 잠그고 현실을 도피하고 있었다.
방어선이 뚫릴 때마다 무수한 숫자의 백성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말이다.
이것이 바로 에렉투스 공방전의 실체.
“미친.”
차원간 이동기술을 지닌 난쟁이 문명.
에렉투스의 상주인원은 지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곳이 무너진다는 건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천사에게 학살당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분노는 좋은 원동력이 됩니다만 그에 삼켜져서는 안 됩니다 마스터.
무르무르는 남태수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말했다.
-이미 일어난 일을 재현한 것에 불과한 스테이지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크음……!”
전쟁으로 사람이 죽었다는 소리는 책에서, 뉴스에서 얼마든지 보았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실감’해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일단 상황부터 파악하도록 하지요. 여긴 누가 보더라도 정상적인 스테이지가 아닙니다만. 상태창은 정상적으로 작동합니까? 커뮤니티를 통하면 다나 양과 연락할 수 있을 텐데요.
남태수는 다나를 통해 실제 성진과 연락하는 데 성공했다.
[다나: 어디서 뭘 하다 이제야 연락하는 거예요?]
[남태수: 그 뭐냐, 공간전이 기기를 잘못 건드리다 이상한 스테이지로 온 것 같은데.]
[다나: 가지가지 하시네요 정말.]
다나는 남태수의 증언을 듣고 성진과 함께 타이탄 격납고에서 그가 만진 버튼을 찾아냈다.
[다나: 아재가 건드린 이거, 성진 아저씨 말대론 정비기기는 맞는데 작동이 불가능한 상태래요.]
[남태수: 엥? 난 실제로 작동돼서 이상한데 떨어지기까지 했는데?]
[다나: 정확히는 창고에 있는 자재를 공간전이로 가져와서 수리하는 시스템인데, 스테이지 상에선 창고가 구현되지 않아서 오류가 생긴 것 같다는데요.]
타이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이상을 확인하고 수리하는 시스템.
그러나 스테이지로 구현된 것은 해당 시스템의 일부분뿐이라 공간전이가 이상한 곳으로 연결된 것.
[다나: 플레이어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전이되니까 탑이 자동으로 새로운 스테이지를 만들었고, 그 결과가 지금 상황인 것 같은데. 보스를 잡는 스테이지라고요?]
[남태수: 응. 그리고 보스는 NPC로 구현된 성진 씨야.]
[다나: 저런. 지금까지 수고하셨어요.]
[남태수: 작별인사 하지 마! 대화가 통해서 같이 다니고 있단 말이야! 어쩌면 안 싸우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나: 쳇.]
[남태수: …… 조금은 걱정해주시면 안 될까요?]
[다나: 아무튼, 아저씨가 보기엔 망가진 타이탄 코어를 들고 있던 탓에 그게 망가진 시점으로 날아간 것 같다던데요.]
성진은 75층에서 스테이지의 뒤편으로 넘어가기 위해 보스였던 아틀라스를 좌표로 삼았다.
반면에 남태수가 좌표로 삼은 것은 1층에 있던 수호거상의 핵.
그러나 지정된 좌표에 아무것도 없자, 탑의 시스템이 수호거상의 핵을 바탕으로 임의의 스테이지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가장 강렬한 기억인, 에렉투스 공방전을 재현한 스테이지를 말이다.
-영혼이 아닌 도구에도 카르마를 담을 수 있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왜 마스터의 고향에서도 오래된 물건이 도깨비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술이 충분히 발전한 문명도 냉병기를 사용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무기 자체의 성능보다는 무기에 깃든 카르마가 더 중요해지니까.
[다나: 아무튼 저희 쪽에선 그쪽 좌표를 알 수 없어서 구하러 갈 수는 없다네요. 아재 혼자 알아서 깨고 나오세요.]
[남태수: 내가 알아서 나가야 한다고?]
[다나: 그러게 버튼은 왜 막 누르셔서.]
다나는 당황하는 남태수에게 못을 박았다.
[다나: 성진 아저씨는 기다려줄 시간 따위 없다며 먼저 올라가시겠데요.]
[남태수: 잠깐만 날 버리고 간다고?]
[다나: 그럼 100층에서 다시 합류하는 걸로.]
[남태수: 다나야? 다나야???]
서로 다른 스테이지에 있어 파티도 자동으로 해제된 상황.
그리하여 남태수는 무르무르와 단둘이 이곳을 헤쳐나가게 되었다.
-까짓것 해보죠.
“무르무르 넌 왠지 의욕이 넘쳐 보인다?”
-말로만 듣던 역사적인 순간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게 된 거 아닙니까. 기대가 될 수밖에 없지요.
무르무르는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