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74화 (74/170)

<74>

“태수 아재 제대로 클리어 판정받고 91층으로 올라왔데요.”

다나는 커뮤니티를 통해 남태수의 상황을 보고 받아 성진에게 전했다.

“용케 살았군.”

남태수가 스테이지의 뒤편에 떨어졌을 때, 성진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그를 두고 올라왔다.

하나는 남태수에게 사룡왕이나 무르무르 등 여러 영혼이 붙어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는 점.

다른 하나는 그가 스테이지를 깰 수 있냐 없냐와 별개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잘됐네요. 사도까지 되어서 탑을 오르고 있다가 그런 일로 내쫓겼으면 아무리 태수 아재라도 좀 불쌍했을 텐데. 그런데 여기까지 혼자서 올라올 수는 있을까요?”

“남태수 본인은 여전히 못 미덥지만 붙어 있는 놈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알았으면 다시 검을 들어라.”

구름을 뚫고 솟은 높다란 산맥.

그 산맥 위를 빼곡히 채운 어스름 수도원 총본산.

온갖 차원에서 밀려든 강자들이 어스름을 추종하며 무예를 수련하고 기예를 갈고닦는 곳.

“하나에 정신, 둘에 집중. 하나.”

““““정신!!!””””

성진의 구령에 다나를 비롯한 연무장을 가득 메운 수도사들이 일제히 검을 내려쳤다.

황금룬의 힘으로 거대해진 검들이 일제히 휘둘러지자 묵직한 바람이 산맥을 타고 휘몰아쳤다.

그러자 산맥 주위의 구름이 걷히며 그 아래의 모습이 드러났다.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해도 에베레스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구름 아래의 풍경 또한 그랬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처럼 점점이 보이는 도시.

어스름을 추종하는 자는 온갖 차원에 존재했다.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 모여든 수도원 총본산은 거대한 도시국가를 이루었다.

힘을 추구하는 이곳에서는 강자만이 더 높은 곳에 이를 수 있었고,

“성진 님. 슬슬 성탄제의 준비를.”

“벌써 시간인가. 곧 가지.”

성진은 그 정점에 서 있었다.

어스름 수도회의 투톱인 총대주교, 대수녀원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도회 내부 위계서열 최정상의 존재.

필멸자의 몸으로 신성존재인 성좌를 쓰러뜨린 뒤, 성직자가 아님에도 어스름 수도회에서 성인(聖人)으로 시성된 성자 주성진.

“그렇게 되었으니 다음 도전은 뒤로 미뤄두겠다.”

100층의 스테이지는 힘을 숭상하는 어스름 수도회에서 강자들을 꺾는 것.

“다나 너는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최대한 강해져 두도록.”

성진은 100층의 최종보스가 되어 있었다.

* * *

[다음 층으로 이동합니다.]

[진행에 따라 레벨이 상승합니다.]

[Lv.99 > Lv.100]

[어스름 수도자들에게 인정받으십시오.]

염기환은 반년째 갱신되지 않고 있는 저 메시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 씨, 이거 못 깨고 나가면 100렙 취급도 못 받는데…….”

레벨이 1이라도 높아야 형님이고 선배가 되는 세상.

개중에서도 탑에는 아예 계급이 바뀐다고 하는 구간이 셋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50레벨, 100레벨, 150레벨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다 하늘 같은 플레이어라곤 해도, 50레벨 미만은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하위권.

탑을 오르는 도중이라면 모를까, 레벨을 확정 짓고 나와서 그 모양이면 패배자 취급을 면치 못하는 계층이었다.

반면 50레벨에 2차 전직을 마친 50에서 100사이의 플레이어들은 어엿한 한 사람의 플레이어로 취급받았다.

100레벨을 넘기고 각성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어딜 가나 인정받을 수 있는 상위권 플레이어.

150레벨을 넘기면 아예 랭커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랭커부터는 재능에 따라 레벨이 천차만별이라 천외천이라 치고, 100렙을 넘기냐 마냐로 인생이 달라질 건데.”

탑의 100층, 어스름 수도원 스테이지에는 염기환과 같은 생각으로 포기하지 못하고 몇 년씩 탑에 박혀 있는 플레이어들이 수두룩했다.

이제는 완전히 고인물이 되어 할 수 있는 걸 다 해본 놈들이 온갖 기괴한 스킬셋을 시험해보는 스테이지가 된 지 오래.

문제는 고인물이라는 게 절대 좋은 뜻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게 다 가망 없는 놈들의 똥꼬쑈지. NPC 놈들은 이제 말도 안 걸어줘, 레벨링이 막히니 강해지지도 못해. 제 실력으로는 여기가 끝인데 미련 때문에 나가지도 못하는 놈들. 센트럴 시티처럼 포인트를 벌어다 팔 수도 없으니 제 한 몸 바쳐가며 스킬트리나 파는 놈들.”

현실의 탑은 게임과 달리 한 번 스킬 포인트를 소모하면 되돌릴 수 없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앞으로 얻을 스킬까지 전부 계산해 스킬 포인트를 아껴두는 편이었는데, 100층에 갇힌 이들은 결국 이걸 팔아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었다.

비주류 스킬을 찍어보고 정보를 팔거나, 온갖 스킬 조합을 직접 시도해보는 것.

“사실상 가진 게 없으니 몸을 파는 꼴이지.”

염기환은 자신이 그들과는 다르다고 믿었다.

실제로 4년 5년씩 고시낭인마냥 100층에서 썩고 있는 이들과 비교해 반년차인 자신은 훨씬 나은 상황이었으니까.

“클랜의 스카우트를 받지 못한 개인 플레이어의 평균적인 100층 통과기간은 1년에서 2년. 나는 아직 늦지 않았어.”

물론 그 기간은 어디까지나 평균일 뿐.

될 놈은 자기가 어느 정도 하면 될 거란 걸 알고 있고,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되지만 염기환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애초에 난이도가 이상하잖아. 저 미친 전투사제들을 어떻게 이기라고.”

어스름 수도자들은 강자를 숭상한다.

때문에 그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수도자들에게 도전하여 승리를 따낼 필요가 있었다.

“일반 수도자까지는 어떻게든 이겼는데…….”

어스름 수도회의 계급은 다음과 같은 식이었다.

일반 수도자.

사제.

전투사제.

수도원장, 수녀원장.

보좌주교.

주교.

대주교.

총대주교, 대수녀원장.

여기서 플레이어는 전투사제를 이겨야 101층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침묵과 광기의 사도는 한창 100레벨이던 당시 주교급에게도 도전해보았다 하지만, 보통은 전투사제도 이기기 힘들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의 전투사제들은 염기환이 보기에 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했다.

“분명 상성상 내가 유리한 전투사제를 찾아다가 도전하는데 저놈들은 상성이고 뭐고 그냥 때려 부수잖아. 난이도가 이게 말이 돼?”

어스름 수도자들은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강해질 궁리만 하고 사는 이들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실제 레벨과는 별개로 싸움에 능했다.

플레이어들이 암만 재능을 꽃피워봐야 초인적인 전투를 배운 건 탑에 들어온 뒤의 일.

그들이 많아 봐야 몇 년 연습한 것에 반해 이곳의 NPC들은 한평생 싸움을 연구해온 미친놈들이었다.

그러한 시간의 차이를 따라잡으려면 확고한 재능이나 확연한 격차가 있어야 했는데, 100층의 플레이어들은 모두 100레벨이었으니 후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재능이 있어야 101레벨이 될 수 있는 셈.

괜히 100레벨을 넘긴 플레이어가 상위권으로 평가받는 게 아닌 것이다.

“재능, 재능 그놈의 재능이 뭐라고. 개 같네 진짜.”

그래도 염기환이 믿는 구석도 없이 무작정 자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곧 성탄제가 열린댔지. 그리고 성탄제에서 벽에 막힌 이들도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고. 탑에서 처음 열리는 이벤트라는데 마침 내가 100층에 있을 때 열린다니. 나는 운이 좋은 게 분명해.”

약간 걱정인 것은 NPC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당최 성탄제에 정확히 뭘 하는 건지 설명해주지 않는단 점이었으나, 그건 감수할 만했다.

어차피 스테이지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라면 플레이어를 위한 것일 테니까.

“성탄제가 어떤 이벤트든 간에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선 포인트를 모아 둬야겠지.”

탑 안에서는 포인트만 있으면 상점에서 비행기든 전투식량이든 뭐든 살 수 있었다.

‘포인트를 벌기 가장 쉬운 방법은 역시 다른 플레이어를 털어먹는 것.’

100층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된 멍청이들을 잘 구슬리면 얼마든지 포인트를 뽑아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100층에 새로 올라온 뉴비를 찾아다니던 염기환의 눈에 들어온 한 인물이 있었으니.

“역시 나는 운이 좋아.”

* * *

“죽겠다…….”

-오 그럼 이참에 리치화?

“그건 안 한다니까…….”

90층 스테이지의 뒤편을 클리어한 남태수는 몇 번이고 똑같은 대화를 반복하며 겨우겨우 100층에 도달했다.

“완전히 미친 난이도였던 90층도 깼겠다. 100층까지는 별로 어렵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개힘들어 진짜.”

-잘 생각해보면 90층의 전투는 거의 NPC로 등장한 계약자님께서 다 하셨으니까요. 심지어 중간에 있었던 전투도 사실상 리젤로테 중장이 밀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그런데…….”

-원래 스테이지란 게 이 정도 난이도는 됩니다. 그냥 마스터가 지금까지 온실 속 화초처럼 꿀만 빨아오느라 몰랐던 겁니다.

“내가 온실 속 화초였다니. 이게 화초의 삶이야? 농약 먹은 잡초가 아니라?”

-온실 속의 식물인간이 되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하하 그거 재미있는 농담이네. 왜? 기계 몸에도 영혼을 넣을 수 있다는 게 확인됐으니 나중에 내 영혼을 식물에 박아 넣기라도 하게?”

-…….

“……농담 맞지?”

무르무르는 남태수를 돕게 되어 있으니 그를 배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말로 식물이 되는 게 차라리 낫다 싶은 상황이 온다면 진짜로 그럴 수 있으리라.

“……나의 라임 오렌지나무 같은 걸 읽을 때 나무에 이입해서 읽은 적은 없었는데.”

쓰레기를 나무로 바꾸는 힘이 실존할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거에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아무튼 개고생해서 올라왔으니 빨리 성진 씨나 다나와 합류해서 좀 쉬어야겠어.”

남태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뜨기 같은 그 모습은, 먹잇감을 노리고 있던 한 플레이어의 시선을 끌었다.

“남태수! 너 남태수 맞지!”

“나야 나 염기환. 같은 성삼보육원 출신. 기억해?”

염기환은 시설 시절의 이야기를 떠들어대며 남태수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그러나 남태수는 염기환의 얼굴을 본 순간부터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내 돈 떼먹은 놈.’

탑에 들어오기까지만 해도 어차피 받지 못할 돈이라 생각해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타이탄 코어까지 손에 넣은 남태수라면 염기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염기환의 말을 듣고 있던 남태수는 적당한 타이밍에 막 기억났다는 듯이 답했다.

“오랜만이네요, 형. 제가 형을 어떻게 잊겠어요?”

“이야 너도 탑에 들어왔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시설 출신이라 가산점이라도 받았나? 너는 어떻게 청약에 당첨됐대?”

“그보다 형이 탑에 들어온 지 좀 됐죠? 제가 1,201회차인데. 이만큼이나 회차 차이가 나는데 같은 층에서 만났네요.”

“뭐? 아오, 새끼가.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딴 얘기부터 할래?”

“그런데…… 저야 형이 어디서 뭐하고 사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형도 몰랐나 봐요? 제 근황.”

탑의 유입이 끊기고, 센트럴 시티 연합이 여론을 정리한 뒤로 플레이어 사이에서 남태수의 이야기는 뜸해졌다.

그렇다곤 해도 남태수의 이름은 꽤나 알려진 상태였다.

무려 세계정부에서 공개수배한 테러리스트였으니까.

그러나 염기환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리도 아니지. 100층부터는 다른 층 이야기에 신경을 쓰기 힘들어지니까.’

그래도 알고 지내는 플레이어가 있다면 소식 정도는 들었어야 했다.

그것조차 듣지 못했다면 염기환은 여전히 혼자라는 뜻.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소리였다.

“내가 그걸 알아야 되냐? 그런 걸 누가 찾아보고 다녀.”

“그래요? 찾아보고 다니셨어야 하셨을 텐데.”

“아무튼 잘됐다. 내가 요즘 사제 트라이 중인데, 너 지금 포인트 얼마 있어?”

“왜요? 돈이 부족하신가 봐요?”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청약에 당첨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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