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76화 (76/170)

<76>

“자신 있으세요?”

그렇게 말하는 남태수의 손에서는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이 흉흉한 기운을 뿜어냈다.

정확한 아이템 정보는 확인할 수 없어도, 대낫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오라는 어설픈 템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높은 등급임이 확실해 보였다.

아무리 플레이어가 돈을 많이 번다지만, 대를 이어 자산을 불려온 이들에 비하면 혼자 몇 년간 번 돈은 한계가 있었다.

유니크 이상의 고등급 아이템은 대기업이나 대형 클랜의 스폰서쉽을 받던가, 아니면 진짜 부자들이나 만질 수 있는 물건.

보통은 이것만 봐도 꼬리를 내려야 했지만, 염기환은 무기를 보고 쫄기엔 남태수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뭐하냐 너?”

그는 남태수를 비웃었다.

“어디서 운 좋게 주웠는지 무기는 좋은 걸 쓴다만 너 사령술사지? 쓰레기 직업으로 용케 여기까지 올라왔다?”

마법사 무기 중에 대낫 형태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저주받은 사신의 대낫은 누가 보아도 사령술사 전용 아이템임을 알아볼 수 있는 무기였다.

“난 성기사인데? 사령술사 새끼가 무기 좀 좋은 거 들었다고 비벼볼 수 있을 것 같냐?”

염기환은 인벤토리에서 자신의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플레이어들의 직업 평가에서 성기사는 부동의 1티어.

반면 사령술사는 단독 진행 스테이지를 뚫을 수 없는 쓰레기 직업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성기사는 상성상 사령술사를 발라먹는 카운터 직업.

염기환은 오히려 남태수의 무기를 보고 코웃음을 쳤다.

“씁, 좋게 좋게 가려고 했더니. 잘 대해주려니까 맞먹으려고 든다?”

대검 찌르기.

예고도 없이 발동된 공격 스킬.

비록 스킬 포인트를 많이 투자하지 않은 기본 스킬이었으나, 100레벨 성기사의 찌르기는 철판도 가볍게 찢을 위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대검이 남태수에게 닿기 전, 그의 발치에서 솟아오른 그림자가 공격을 막아냈다.

다용도로 활용하기 위해 상시 소환해놓고 다니는 살아 있는 그림자였다.

“작열하는 고통.”

이어서 100레벨이 되자마자 찍어둔 중급 저주.

그와 함께 남태수의 손바닥이 염기환의 따귀를 후려쳤다.

짜악!

“억……!”

저주로 증폭된 고통에 염기환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기도문을 외지 못하는 성기사는 무기술밖에 쓰지 못하는 전사와 다를 바 없었다.

짜악!

짜악!

남태수는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염기환은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큰 대미지는 아니었지만 저주로 통증이 증폭된 통증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뭔 놈의 사령술사가 힘이…….’

그는 방패 보호막을 발동시키며 뒤로 물러나려했다.

그러나 어느새 발 아래로 퍼져나간 살아 있는 그림자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침묵.”

염기환이 반사적으로 시도하던 정화 주문을 차단한 남태수는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성기사의 장비는 일반 금속과는 비교할 수 없이 무거웠으나, 타이탄 강화장갑은 그조차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들어 올린 목에 사신의 대낫이 걸렸다.

“계속해 보실래요?”

질문을 던지며 침묵을 풀어주자 염기환은 빠르게 사과를 쏟아냈다.

“미안, 시발 미안 그만해.”

염기환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고민도 없이 아무 말이나 주워섬겼다.

“알아들으셨죠? 오늘 안에 다 갚으세요. 3,500.”

“……니가 이러고도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왜요? 한효승 씨요? 그 인간이 형 복수를 해주기라도 한데요?”

남태수는 염기환이 하려는 말을 가로챘다.

“그 인간이 형한테 무슨 의리가 있어서요? 제 생각엔 제가 형보다 레벨이 높아지면 그 인간도 형이 아니라 제 편을 들어줄 것 같은데요?”

흠칫.

듣고 보니 그랬다.

한효승이 보기에 염기환이나 남태수나 똑같은 인간군상이리라.

그렇다면 레벨이 더 높은 쪽을 가까이 할 게 뻔했다.

지금의 상황만 보면 남태수가 염기환보다 높이 올라갈 거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시발…… 그렇다고 3,500을 어떻게 하루 안에 구해?”

“방법은 형이 직접 생각해내셔야죠. 제가 형 사정까지 봐줘야 해요?”

남태수는 그렇게 말하며 염기환을 내팽개쳤다.

-꽤나 담력이 생기셨군요? 자기가 더 센데도 옛 생각에 쫄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성진 씨처럼 해보려고 했는데 비슷한지는 모르겠지만 나쁘진 않았던 것 같아.’

솔직히 성진과 함께하는 지금은 3,500이고 뭐고 포인트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염씨 형제에게는 그간 쌓인 울분이 있었으므로 조금쯤은 괴롭혀주고 싶었다.

‘이건 성진 씨한테 폐 끼치지 않고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니까.’

지금이라면 한효승이 직접 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태수 본인이야 레벨이 부족하지만 그와 함께하는 영혼들은 100레벨쯤은 우스운 이들이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남태수와 염기환이 일으킨 소란에 어스름 수녀들이 나타났다.

“무슨 일입니까?”

염기환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이곳에서는 서로 간의 합의하에 도전한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싸운 거면 NPC들이 잡아가지?’

힘을 추구하며 강자를 숭상한다고 치안이 개판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수많은 강자들이 즐비한 이곳은 다른 어디보다도 엄격한 규칙으로 돌아가는 도시였다.

“마침 잘 됐다. 수녀님들 저 새끼가…….”

염기환은 방금까지만 해도 사과하던 입으로 남태수를 팔아먹으려 들었다.

“폭력사건입니까? 마법사 형제님. 해명을 해주셔야겠습니다만.”

남태수가 염기환을 바라보자 그는 입만을 움직여 말했다.

‘네가 어쩔 건데?’

그 모습에 남태수는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개새끼였네.”

그래도 한때는 형 동생 하던 사이였건만.

다시 봐도 개새끼는 여전히 개새끼였다.

-마스터.

“알고 있어.”

남태수는 해명을 요구하는 수녀에게 해명 대신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내주었다.

[어스름의 증표]

표식 아이템

어스름 수녀회의 증표로, 이 표식을 지닌 자는 어디서든 수녀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훔치거나 강탈하는 등, 적법하지 못한 방식으로 획득한 증표를 내보일 경우 수녀회의 추적을 받을 수 있으니 주의하십시오.

“저놈이 먼저 덤볐다가 혼자 나가떨어진 겁니다. 예전에 즈덴다 원장님께 받은 겁니다만. 이걸로 제 말을 믿어주실 수 있을까요?”

“오오, 귀인이셨군요. 본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형제님.”

그와 동시에 남태수의 주변에 100층 클리어를 알리는 팡파레가 터져 나왔다.

[수도회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스테이지 클리어.]

[해당 스테이지는 추가 도전을 통해 더 많은 보상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언제든지 클리어를 선언하고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 자유롭게 더 높은 기록에 도전하십시오.]

[각성기 습득이 가능해집니다.]

남태수는 그 알람을 옆으로 치워두고 눈앞의 수녀에게 물었다.

“아, 그리고 제가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시 아시나요? 다나라고 칼 쓰는 애인데.”

염기환이 보는 앞에서 성진의 이름을 들먹이긴 좀 그랬으므로 남태수는 일부러 다나의 행방을 물었다.

“다나 자매님의 일행이셨군요! 안 그래도 형제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오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어스름 수녀는 그렇게 말하며 남태수를 이끌었다.

남겨진 염기환은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볼 뿐이었다.

* * *

기본적으로 100층에 등장하는 어스름 수도자들은 플레이어들을 고깝게 여겼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선 자신을 갈고닦으려는 노력은 않고 손쉽게 힘을 손에 넣은 플레이어들이 한없이 게을러 보였으니까.

“일하지 않는 자는 먹을 자격도 없습니다.”

“당신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변하는 것이 없군요.”

“벌써 자려는 겁니까? 그 실력에 잠이 옵니까? 재능이 없으면 노오력이라도 하십시오, 노오력!”

반대로 플레이어들 또한 수도자의 고행을 바보처럼 여겼다.

“NPC 주제에 사람 존나 무시하네…….”

“레벨만 올리면 처바를 수 있는 허접들이…….”

그러나 전투사제를 이기고 100층을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덕분에 100층에 남아 있는 플레이어들은 하나같이 자신보다 강한 NPC들에게 무시당하며 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시를 지나는 남태수의 모습은 다른 플레이어들이 보기에 매우 어색한 것이었다.

“본산에 오신 소감은 어떠신가요? 마침 성탄제를 준비 중이니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이것 좀 드셔보실래요? 맛이 아주 좋답니다.”

“형제님은 소스를 찍어 먹는 편이신가요…… 그렇다면 저도 오늘부터 붓지 않고 찍어 먹겠습니다!”

수녀들은 남태수에게 찰싹 달라붙어 계속해서 재잘거렸다.

“저 새끼는 뭐야……?”

“쉿! 들을라. 남태수라면 세계정부가 수배했던 범죄자잖아!”

“뭐? 그거 1,201회차에 들어온 녀석 아니었어? 1,201회차가 어떻게 벌써 100층까지 와?”

“그보다 수녀들이 왜 쟤한테는 저렇게 친절한데?”

플레이어들은 남태수의 모습을 보며 수군거렸다.

남태수 본인 또한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뭐지? 왜 환영받지? 난 사악한 사령술사인데?’

-마스터께서 사도라는 사실을 밝혔으니 그런 거 아닙니까. 사도쯤 되는 강자라면 어스름에도 엄청나게 기여했을 테니 어스름을 추종하는 이들에겐 위인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수많은 영혼들의 꿈이 만들어낸 어스름.

어스름을 추종하는 이들에겐 조금이라도 강해져서 어스름에 더 많이 기여하는 것이야말로 미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성존재나 그 사도는 이들에게 있어 같은 신도는 아닐지언정, 신도 이상으로 신실한 이들이었다.

-말하자면 성좌를 숭배하는 이들 앞에 천사가 나타난 셈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남태수는 그의 인생에 다시없을지도 모를 인기폭발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럼 내가 사실 그렇게 강한 게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면 찬밥신세가 되는 거 아냐?’

-어차피 클리어 조건은 갖췄으니 조용히 있다가 넘어가면 되지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오랜만에 나랑 마음이 맞았구나.’

남태수는 그냥 이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염기환이라는 자는 그대로 놔둬도 괜찮겠습니까?

‘돈 갚으라고 말하긴 했지만 짜낸다고 없는 게 나올 것도 아니고. 내버려 두면 알아서 커뮤니티에서 내 이야기를 확인해보고 도망치지 않을까?’

이래저래 염씨 형제 밑에서 착취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죽을죄는 아니었다.

한효승이나 염석환과 달리 염기환은 동생이라고 같이 남태수와 갈굼 당하던 인물이기도 했고.

‘지금쯤 바짝 쫄아서 떨고 있겠지. 아마 탑을 포기하고 밖으로 도망치고 나서도 계속 떨면서 살아야 할걸? 그 정도면 족해.’

물론 한효승 쪽은 얻어맞은 것도 있으니 맞은 만큼은 돌려줘야겠지만.

염기환에겐 이 정도면 충분했다.

“여깁니다.”

그러는 사이, 수녀들은 남태수를 계단 앞으로 안내했다.

“여기서부터는 증표를 가지고 계셔도 따로 힘을 증명해 주셔야 올라가실 수 있습니다. 물론 남태수 형제님께는 어렵지 않으시겠지만요.”

구름 위까지 이어진,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힘을 증명하라고?”

“네. 올라가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시련을 맞이하게 되실 거예요.”

그냥 올라가라고 해도 오늘 안에 끝까지 못 갈 것 같은 계단 앞에서 수녀들은 시련 같은 무시무시한 단어를 내뱉었다.

‘무르무르?’

-저도 여긴 와본 적 없습니다.

‘사룡왕 폐하?’

[부재중]

[옆 동네에 천사들이 쳐들어와서 며칠 못 봄. 알아서 잘 하길.]

결국 남태수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수녀들에게 물었다.

“시련이라는 거 많이 어렵나?”

수녀들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네! 자격이 안 되는 자가 도전하면 반도 못 올라가서 죽어 나자빠지지만, 형제님이라면 괜찮으실 거예요!”

“참고로 다나 님은 성자님과 이 위에 계세요!”

수녀들은 남태수를 잘 모셔왔다는 생각에 뿌듯해했다.

남태수는 이미 표정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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