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 부수는 플레이어-78화 (78/170)

<78>

카르마.

놀라운 업적을 이뤄낸 영혼에게 쌓이는 업보와 그 업보에서 나오는 영혼의 힘.

다나는 가만히 앉아 성진이 자신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어스름에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그에 맞는 카르마가 필요하다.’

어스름은 꿈속 세계이자 세계의 꿈.

이 우주만큼이나 넓은 그곳에서 정확히 원하는 것을 찾아내기 위해선, 운명의 도움이 필요했다.

문제는 운명 옵션을 가진 카르마가 있다곤 해도 다나는 아직 그것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었다.

“시스템 창에 떠오른 메시지는 그저 표기일 뿐. 근본적인 게 아니야.”

성진의 카르마로 인해 받고 있는 버프 효과들.

탑은 이를 상태창의 형태로 다나에게 보여주고 있었으나 이건 카르마로 인한 결과물일 뿐이지 카르마 그 자체가 아니었다.

“마력은 이렇게나 잘 느껴지는데.”

다나는 날 때부터 남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성진과 만나기 전까진 그게 뭔지 잘 몰랐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가 보고 느낀 것들은 전부 마력에 의한 현상들이었으리라.

탑 이후 태생인 다나는 마력으로 가득한 세계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마력의 존재가 당연한 일이었다.

마력을 느끼고, 다루는 것도 그랬다.

다나에게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그러나 방법을 모를 뿐인 일이었고, 방법을 배우니 실제로 잘 됐다.

때문에 다나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카르마의 존재를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태수 아재가 마법을 배우는 게 이런 기분이려나.”

있지도 않은 걸 어떻게 다루라는 말인가?

아니, 다들 있다고 하는 걸 보면 있긴 한가 본데 이걸 어떻게 쓰라는 건진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내 영혼에 이미 토대가 되기에 충분한 카르마가 있다니. 있다고 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막막했다.

일단 느껴지기라도 해야 뭘 하든 말든 할 수 있을 거 아닌가?

다나는 어스름 수도원에서 매일같이 검술을 수련하는 한편, 육체적 단련을 쉬는 동안에는 명상을 계속했다.

‘명상을 통해 네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다. 네가 가장 잘 아는 카르마는 누가 뭐라 해도 너 자신의 카르마일 테니까.’

성진은 명상을 통해 스스로의 영혼을 마주하는 것으로 카르마를 깨우칠 수 있을 거라 말했다.

그러나 연습하면 연습한 만큼 늘던 검술과 달리 카르마에 대한 것은 잘 되어가고 있는 건지 어떤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한평생 천재로서 모든 것을 쉽게 익히며 살아온 다나가 처음으로 느끼는 평범한 사람의 감각.

“돌겠네 진짜. 이거 왜 이렇게 어려워?”

* * *

“오, 됐다. 이게 내 영혼인가? 되게 볼품없게 생겼네.”

-방법을 말씀드린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자신의 영혼을 인식할 줄이야. 생각보다 빠르시군요?

“이게 빠른 거였어? 나는 한참 걸리기에 성진 씨나 다나 같은 사람들은 집중 좀 하면 바로 인식하고 그런 줄 알았는데.”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인식하기 힘듭니다. 설령 영혼을 다루는 사령술사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무르무르의 칭찬은 빈말이 아니었다.

-자신의 영혼을 인식한다는 건 자기이해와 자아성찰이 완벽하다는 것과 같습니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주제 파악이 잘 된다 이거네? 상상 이상으로?”

-그거 참 명쾌한 설명이군요.

물론 남태수가 자신의 영혼을 빠르게 인식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닐 테지만, 그게 가장 큰 이유라는 건 확실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남태수는 욕을 들은 건지 칭찬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긍정적으로 생각하시죠? 카르마를 느끼려고 생고생할 걱정은 덜은 셈 아닙니까.

“그런가? 그래 어차피 이미 일어난 일인데 좋은 점만 생각하자고.”

일단 자신의 영혼을 인식했다면 그다음은 쉬웠다.

-카르마는 영혼에 새겨집니다. 그렇다면 영혼을 읽어내는 것으로 보유한 카르마를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굳이 복잡한 과정을 거칠 필요는 없었다.

남태수가 자신의 영혼을 본 순간, 탑이 상태창을 띄워주었으니까.

[보유 카르마 목록을 불러오는 중.]

[일반 등급 이하의 카르마를 생략합니다.]

[보유 카르마 목록.]

<버려진 아이 (희귀)>

<특이점의 추종자 (영웅)>

<타이탄 오너 (영웅)>

<사룡왕의 사도 (신화)> (임시)

“아니 잠깐만. 사룡왕의 사도라는 게 여기 다 나오는데?”

-플레이어에게 모두 공개하지 않을 뿐 탑은 상시 모든 플레이어의 카르마를 읽어 들이고 있습니다. 마스터도 아시지 않습니까? 계약자께서도 탑에 들어오기 위해 카르마를 모두 지워야 했단 걸.

“허어…….”

남태수는 문득 생략되었다는 일반 등급의 카르마를 펼쳐보았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목록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서울 OO병원 161,832번째 출생아 (일반)>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 (일반)>

<천애고아 (일반)>

<밥보다 빵이 좋아 19,822 (일반)>

…….

그것은 남태수의 인생을 기록한 목록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먹은 빵의 개수까지 적혀 있잖아? 그보다 버려진 아이가 있는데 천애고아는 왜 또 있어?”

-천애고아는 일부러 버린 게 아니라도 될 수 있으니까요.

“너무하네 진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므로 무르무르는 화제를 돌렸다.

-카르마는 이처럼 살아가며 행하는 모든 일에 쌓입니다. 그러나 저런 일반적인 일로 쌓인 카르마는 사실상 아무런 효과도 없지요.

카르마가 정말로 의미 있는 효과를 발휘하려면 일정 이상의 등급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남태수는 충분한 카르마를 가지고 있었다.

-사룡왕의 사도라는 타이틀은 비록 임시라 할지라도 막대한 카르마를 보장합니다. 그러나 그 사용처가 제한되어 있지요.

사룡왕의 사도라는 카르마는 오로지 사령술에만 영향을 준다.

남태수가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력한 영혼들을 자유롭게 다뤘던 것도, 가진 마법실력에 비해 사령술만 유달리 잘 써먹고 있는 것도 다 이 카르마의 영향.

그마저도 임시 사도에다, 본인이 정식 사도가 되기 싫다고 반항하면서 거의 모든 효과가 잠겨 있는 게 이 정도였다.

-가장 쉬운 방법은 마스터께서 얌전히 정식 사도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시는 겁니다. 결심하시기만 해도 세계정부의 사도들을 우습게 여길 힘을 얻으실 수 있겠지요.

“싫어! 그거 하면 세지긴 할지 몰라도 내 인생이 나락 가잖아? 그것도 한평생이면 모르겠는데 영원히 나락 갈 걸 왜 해?”

게다가 남태수가 세계정부의 사도들보다 강해진다고 해도 밖에 나가 깽판치고 살 수는 없었다.

남태수가 그러고 다니면 성좌들이 사룡왕의 개입을 알아챌 것이고, 그럼 성진의 존재도 들킬 테니까.

사룡왕이 그런 짓거리를 용납할 리 없으니 사실상 남태수로서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는 짓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두 번째 방법을 택할 수밖에.

물론 무르무르도 그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두 번째 방법이 뭔데?”

-사룡왕의 사도를 그대로 쓰는 게 아니라, 그에 파생되는 하위 카르마를 만드는 겁니다.

성진이 가진 <세계의 특이점>이라는 카르마에서 <특이점의 추종자>라는 카르마가 파생되었듯, 신화급 카르마라면 파생형 하위 카르마로도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것이 분명했다.

-사룡왕의 사도가 아닌 사령술사 남태수의 카르마를 만들면 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탑에게서 빌린 것이 아닌, 진짜 사령술을 보여주십시오. 그것으로 지구 최초의 사령술사 카르마를 획득하십시오.

“이미 몇몇 사령술은 스킬이 아니라 마법으로 쓰고 있는데?”

-하지만 그걸로 다루는 영혼들은 탑이 가져다준 이계의 영혼들이잖습니까.

남태수는 그 말에 무르무르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깨닫고 흠칫했다.

-신토불이라고 아십니까?

그렇게 말하며 미소 짓는 무르무르의 모습은 남태수에게 마치 절대로 따라선 안 될 악마의 유혹처럼 보였다.

-지구의 사령술사라면 지구인의 영혼을 다뤄야 하지 않겠습니까?

* * *

당사자가 들으면 고개를 갸웃하다 못해 목이 돌아가겠지만, 성진은 일단 남태수를 믿고 있었다.

물론 그의 능력을 믿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남태수를 혼자 내버려 두면 아무것도 못하겠지. 하지만 그 녀석은 혼자가 아니다.”

무르무르가, 사룡왕이, 그리고 수많은 영혼들이 남태수와 함께하고 있었다.

남태수는 성진이 보기에도 기막힐 정도로 소시민이었다.

그 말은 곧 소시민답게 주위에서 모두 yes를 외치고 있을 때, 혼자 no를 외칠 근성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좌를 족치는데 눈 돌아간 놈들과 함께하는데 혼자 발을 빼진 못할 녀석이다.”

하지만 그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등 떠밀려 한 일이라고 해도, 결국 세상을 구한다면 그건 구원의 카르마가 될 테니까.

“그러니 녀석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려라.”

“흐응, 사룡왕의 사도라. 이 동네 플레이어 중에선 그럴 깜냥이 될만한 녀석 따윈 안 보였는데. 아닌가? 한 명 정도는 괜찮은 애도 있긴 했었지?”

남태수를 기다리라는 성진의 말에 마리아는 입을 삐죽 내밀곤 절벽에 앉아 다리를 휘저어댔다.

수녀복 틈새로 신발조차 벗어던진 맨다리가 노출되었다.

새하얀 다리가 눈앞에서 흔들거리는 모습은 꽤나 선정적인 것이었으나, 성진이 주목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각법을 새로 배웠나?”

“응. 이 탑에 있는 동안 나는 테레사한테 권법을 가르쳐줬고, 테레사는 나한테 각법을 가르쳐줬거든.”

극한까지 단련된 초인의 신체는 그 어떤 병기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강력한 무기였다.

때문에 별다른 무기 없이 맨손격투술을 쓰는 강자도 심심찮게 있었는데, 마리아와 테레사는 각자 권각법의 달인이었다.

“패배에서 배운 게 있나 보군.”

“이 안에서는 스스로 갈고닦는 데 한계가 있었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배운 거지.”

“내게는 죽고 나서야 그럴 생각을 한 게 더 신기하다만. 진작 그랬으면 너희도 성좌 하나는 잡을 수 있었을 거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우리 수도회가 세면 장땡으로 보일지 몰라도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모이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모두의 신앙이 똑같을 수는 없었다.

어스름을 믿긴 하지만 자신의 입신양명이 먼저인 사람도 있고, 단지 무예를 배우기 위해 입교했을 뿐인 이들도 있었다.

아무리 서로가 강해지는 걸 돕는 편이라고 해도 자원은 유한했다.

사람은 둘인데 영약은 하나라면?

더 재능 있는 쪽에 줘야 할까?

아니면 수도회에 대한 기여도가 높은 쪽에?

사람이 모이면 파벌을 가르기 마련이었고, 어스름 수도회도 마찬가지였다.

어스름 수도회 내에는 수녀회라는 파벌이 따로 존재했다.

딱히 성별과 관계가 없는 교리임에도 수도회 내에서 수녀들의 입김이 센 이유는 간단했다.

성녀가 수녀 출신이었으니까.

그들은 성녀의 희생에 대한 대가로 자신들이 더 많은 것을 받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둘이 각 파벌의 대표를 맡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수도자들의 반발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어. 내분이 일어났다간 천사들의 공세를 버틸 수 없었을 테니까.”

결국 성좌에게 죽은 지금와선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우리 뜻대로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두 사람이 힘을 합쳤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마리아. 교대 시간이에요.”

“오카이. 갑니다 가요.”

테레사의 부름에 마리아는 후다닥 달려가 그녀와 교대했다.

마리아와 교대하고 쉬러 나온 테레사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주교복의 가슴께를 들추고 손부채를 부쳤다.

“도와주신 덕분에 어스름의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어요. 탑 안에서도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답니다.”

성탄제를 위해 어스름과 스테이지를 오갈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 작업.

성진은 탑에 영혼이 묶여 힘을 쓸 수 없게 된 마리아와 테레사를 대신해 자신의 카르마를 부담하고 있었다.

“내 카르마는 온전하지 않다. 이대로라면 오고 가는 것 중 하나만 될 거다.”

“성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남태수라는 자가 저희들을 해방시켜준다면 나머지는 어떻게든 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어스름에서 무엇을 가지고 나오느냐죠.”

보통은 어떤 카르마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어스름 안에서 무얼 가지고 나오는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라면 지금의 다나가 가지고 나올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대로 들여보내면 그 애는 죽을 거예요.”

테레사는 다나의 죽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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